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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철도를 따라 읽어 가는 근세사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철도를 따라 읽어 가는 근세사

기사입력 2016.03.23. 오후 5:50 최종수정 2016.03.28. 오후 12:57 기사원문 스크랩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후마니타스) 부제는 ‘기관사와 떠나는 철도 세계사 여행’입니다. 현직 철도 기관사 박흥수씨가 풀어 쓴 철도 세계사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이 책은 철도를 타고 떠나는 근대 여행기이다. 자유로운 여행, 특히 열차 여행이 으레 그렇듯이 눈부신 속도로 달리기도 하고, 걸음걸이처럼 서행하기도 하고, 고장이 나서 한참을 서 있어야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할 터인데 모든 것을 기관사에게 맡기고 차창밖에 펼쳐진 세계를 함께 즐기기를 당부 드린다”고 소개합니다. 박홍수씨의 철도 세계사 여행을 따라가봅니다.






■철도의 기원

철도는 길을 평탄하게 만든 후 그 위에 레일을 깔아서 구성된 궤도를 달리는 시스템입니다. 레일의 역사는 깁니다. 처음 도입한 건 기원전 이집트가 피라미드 건설 때 석재를 운반할 때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배를 옮기려고 레일을 이용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레일 시스템은 오스트리아에 있는 라이스추크 철도입니다. 1504년에 운행을 시작해 현재도 운용중입니다.



라이스추크 철도|출처 snotty, Wikimedia


■영국, 철도의 시대가 시작된 곳

영국에서 증기기관과 레일을 바탕으로 철도교통이 탄생합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증기기관을 이용한 석탄 채굴이 활발했습니다. 증기기관사 조지 스티븐슨은 유명하죠. 그는 기차와 레일이 합쳐져 ‘철도’라는 교통수단이 된다는 것을 이해한 인물입니다. 스티븐슨은 레일과 철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1825년 첫 증기기관차가 운행을 시작합니다.

초기 철도 궤간 등 기본은 레일 위를 달리던 합승마차와 같습니다. 철도는 초기에 석탄운반을 놓고 운하업자와 경쟁해 승리합니다. 마차 승객들도 장거리 여행에서 빠르고 쾌적한 기차를 선호했습니다.



기차 궤도에 영향을 준 영국 레일 마차 |출처 Walton Adams Reading Borough Libraries (1893년)


문제도 생깁니다. 철도산업이 성공하자 투기가 광풍처럼 몰아쳤습니다. 경쟁도 심했습니다. 같은 노선에 또 철로를 놓는 일도 나왔습니다. 기차회사 마다 레일 규격도 틀렸습니다. 투기는 1845년에 거품이 꺼집니다.

영국에선 왜 철도가 크게 발전했을까요? 우선 석탄 매장량이 풍부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노동자가 많았죠. 노동 세계사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영국 노동당은 철도노동자들이 1900년 파업으로 발생한 손해배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창당했습니다.



■ 철도가 바꾼 것들

철도 발전은 문화와 일상 생활에 여러 변화를 가져옵니다. 신문 배급은 철도를 통해 체계가 잡혔습니다. 기차 내에서 독서를 하는 것이 일상으로 자리잡자 ‘문고판’이 생겼습니다. 생선 같은 식재료 물류비가 줄면서 ‘피시앤 칩스’ 같은 음식문화가 탄생했죠.

숙박시설도 발달했죠. 사보이와 리츠가 이때 생긴 고급호텔입니다. 기차 객차 1·2·3등실은 자본주의 계급 차등을 반영했죠.

예술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화가들이 기차와 역을 그린 그림들은 18세기 중후반 근대에 대한 불안과 궁금증을 표현합니다.



‘삼등열차’ |오노레 도미에 (1862년) 열차 초기 3등칸의 풍경을 잘 묘사했다.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반 고흐 (1890년) 마차가 상징하는 전근대와 기차가 상징하는 근대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시간에 맞춘 출발과 도착이라는 시스템이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지역마다 태양을 기준으로 정오를 정했습니다. ‘24시간 시스템’도 만들었습니다. 샌드퍼드 플레밍이라는 청년이 오전 5시35분 기차를 오후로 알고 놓쳤습니다. 그는 철도회사에 취직해 ‘17시35분’으로 표기하는 시스템을 개발합니다.

런던 시의원 찰스 피어슨은 “런던과 교외주민이 이용할 철도를 런던 지대가 비싸니 땅굴을 파고 기차를 달리게 하자”는 제안했습니다. 지하철 탄생 배경입니다. 지하철은 제2차 대전 중 방공호로 사용되면서 많은 사람을 구하기도 했죠.



‘비, 증기, 속도’|윌리엄 터너 (1884년) 증기기관과 철도가 가져다 준 근대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을 잘 묘사했다.


철도는 인명을 앗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대형 철도 사고는 비용절감을 위해 돈을 아끼다가 발생합니다. 또다른 사고원인은 인간의 오만입니다. 1998년 독일에서 고속열차 탈선으로 103명이 즉사합니다. 점검반이 7년 동안 사고가 전무해 기차 바퀴 피로도를 육안으로만 점검하다 난 사고입니다.



■ 대륙횡단철도와 아메리칸드림

대륙횡단 철도 완공으로 미국은 ‘세계 최고의 철도국가’로 섭니다. 대륙횡단 철도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기 위해 강한 힘을 가진 기관차와 제동자치가 필요했죠. 기술발전이 뒤따랐습니다. 인디언 학살, 남북 전쟁, 미국 정치·경제도 철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미국 대륙횡단철도 연결 기록화 |Tomas Hill(1881년) 대륙횡단 철도를 연결하는 ‘골든 스파이크’ 설치 모습을 그렸다.


남북전쟁 때 북부는 철도 인프라 81%를 확보했습니다. 북군은 마차나 도보가 아닌 철도로 병력과 보급품을 공급합니다. 전쟁 양상도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는 것에서 철도 부근에서 전투를 펼치는 것으로 바뀝니다.



미국 대륙횡단철도 완공식 |Nimitz Musem, Anaapolis(1869년)


규모가 거대해 한 개인이나 기업이 대륙횡단 철도 전체에 투자하기는 힘들었습니다. 투자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미국에서 처음으로 ‘주식회사’가 탄생합니다. 신용신탁회사도 생겼습니다. 철강산업이 발전하고, 금융회사들도 성장했습니다. 철도 연결로 석유 수송도 수월해졌죠.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미국 정가의 로비스트, 언론과 대기업 유착도 이때 나타납니다.



중국이민자와 인디언(북미원주민)은 철도의 희생자들입니다. ‘센트럴 퍼시픽 철도’(CP)를 두고 “중국인과 화약을 도구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상사가 많았죠. 사고가 발생합니다. ‘유니온 퍼시픽 철도’(UP)가 지나간 길은 인디언 거주지입니다. 서부로 철도가 이어지면서 인디언 학살도 계속 벌어집니다. .



보빙사.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길준, 앞줄 가운데 민영익 |출처미상


조선인 유길준은 보빙사 일원으로 1883년 미국에 갔죠. <서유견문>에 대륙횡단 열차를 탄 소감도 남겼죠. 객차에서 만난 미국인 존 프랭클린 가우처 목사와 조선의 상황을 두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가우처 목사가 이날 유길준을 만난 것을 계기로 언더우드 등 미국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조선에 파견옵니다.



■ 철도 제국의 무기가 되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개항시키며 사람이 탑승할 수 있는 모형기관차와 100미터의 레일을 선물합니다. 서구 문물을 견학하러 간 일본 사절단은 영국에서 각지를 이어주는 철도를 보고 철도건설에 박차를 가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1871년부터 일본은 철도를 놓기 시작합니다. 1872년 첫 개통이 된 도쿄-요코하마 29㎞ 구간은 영국에 재정적 도움과 기술로 수입품 기차로 운행합니다. 철강산업이 발전했죠. 제철업은 조선공업을 이끌어 군사력도 키웁니다.



미일 화친 조약 후 페리 제독은 일본에 모형 기관차를 선물했다|출처미상


일본 정부는 철도를 국가가 나서서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스마번을 중심으로 사무라와 다이묘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내전이 일어나는 등 국내가 어수선했습니다. 홋카이도는 미국, 규슈는 독일인이 철도를 처음 놓는 등 5개 사기업이 철도를 건설합니다. 일본 정부는 다이묘들에게 채굴권 등 이권을 주고 귀족 작위를 주어 불만을 무마했고 이들은 재벌로 성정합니다. 이후 일본 철도는 재벌이 정부 계획을 수행하는 식으로 건설했습니다. 현재도 일본 공공요금이 비싸지만 그 비용을 기업이나 직장이 부담하는 시스템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국가가 해야 할 공적역할 일부를 기업이 맡는 ‘일본식 자본주의’의 한 단면 입니다.



신바시 철도와 기차 |Utagawa Kuniteru(1873년)


일본은 철도를 이용해 성장하고 조선과 만주를 침략합니다. 1885년 일본인 마스다 고조는 4년간 의술로 조선인들 환심을 사며 방방곳곳을 탐사합니다. 그는 정보를 수집해 조선침략 토대를 마련합니다. 일본 체신성 철도국에 1892년 조선 답사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철도기사 고노 다카노부가 파견 된 후 조류 연구로 속이고 2개월 만에 경부철도 위한 386㎞ 노선답사를 끝냅니다.

동북아는 철도와 관련된 전쟁이 이어집니다. 청일전쟁에선 승리한 일본은 경인철도부설권과 경부철도부설권 얻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이 이를 저지합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빼앗은 요동을 외교력으로 청나라에 찾아줍니다. 이는 만주지역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황단철도 공사 중 어려움이 산적하자 남쪽 만주지역에 철도를 놓을 계획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동청철도와 지선인 남만철도 부설권을 얻었고 하얼빈은 ‘동방의 모스크바’로 발전합니다.



경부선철도 북부기공식 모습|경향신문 자료사진(1908년)


일본은 러시아와 일전을 위해 철도가 필요했습니다. 프랑스도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부설권을 노렸습니다. 조선의 첫 철도 부설권은 우여곡절 끝에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얻어 냅니다. 이때 조선 철도부설권을 모스에게 넘긴 사람이 매국노 이완용입니다. 일본은 모스에게 170만2000엔을 주고 철도부설권을 사들여 1898년 4월 경인선 기공식을 가집니다. 1899년 9월18일 첫 제물포-노량진 운행 개업식 주변은 온통 일장기 물결이었습니다.



경인선 철도 기공식|출처미상 (1908년)


일본 근대 최초의 ‘국민적 기업’은 조선에 설립한 경부철도주식회사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1900년 10월 애국운동 차원에서 주주모집에 나섭니다. 주주모집은 목표를 2배 초과달성 해 20만9000주를 모았습니다. 경부선은 1908년 8월20일 영등포, 21일 부산에서 각각 기공식을 갖고 건설에 들어갑니다.



부산 초량 경부철도 기공식 |출처 미상 (1908년)




경의선 철로 폭파 혐의로 처형된 조선인|출처미상 (1905년)


경의선은 1905년 러일전쟁 중 일본군이 직접 건설합니다. 국제법상 불법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이 ‘대한철도회사’를 설립하고 철도를 직접 건설하려는 걸 막은 거죠. 착취도 했죠. 일본은 보상비는 낮게 지급했습니다. 백성들을 강제 동원합니다. 일본인 행패도 심했습니다. 철도건설 중 노동자를 즉결처분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와중에 조선관료들은 일본을 등에 업고 백성들을 등치고 재산을 수탈합니다. 당시 러일전쟁을 취재한 영국기자 잭 런던은 이를 기사로 남겼습니다.



■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왕국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은 철도회사가 바탕이 된 나라입니다. 만주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욕망이 담긴 땅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신화의 공간’ 입니다. 일본인에게는 노스텔지어로 희망과 절망이 범벅이 된 공간입니다. 중국인에게 지역이 아닌 종족 이름으로 여진족 누르하치가 ‘만주’로 자신들을 칭했습니다.

일제시대 만주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이 만든 왕국과도 같습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러시아가 건설한 동청철도에 맞서 1906년 6월9일에 만철을 설립합니다.

일본은 만주 뿐 아니라 조선에서 중국 내륙과 시베리아로 갈 횡단철도를 계획했습니다. 전초전으로 조선인이 개간해 살던 간도에 ‘조선인 보호’ 명목으로 행정력과 군사력을 뻗칩니다.



일제시대 조선과 동철철도 주요노선|후마니타스 제공


만철은 1945년 일본 패망까지 거미줄 같은 철도망을 건설합니다. 만철노선 1㎞ 마다 15명의 수비병력 배치가 가능했습니다. 일본은 독립수비대 6개 대대를 창설합니다. 이 부대는 1919년에 창설된 관동군의 모태입니다. 관동군이 일으킨 만주사변도 철도가 원인입니다. 일본군은 철도에 폭약을 설치 한 후 폭발시킵니다. 중국 군벌 장쉐량의 동북군을 몰아내기 위한 자작극을 펼친 것 입니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1935년 조선 총독부에서 특별제작한 열차|박흥수 제공(2015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로고|위키피디아


일제에 태어난 조선청년 일부는 식민지 젊은이로 희망 없이 살다 만주에서 일제를 위해 항일세력 괴멸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기회의 땅’인 만주에서 공을 세워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이를 ‘신인화’(新人化)라고 미화했습니다. 박정희는 그런 인물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만철은 일제의 중국 침략을 바탕으로 발전해 1932년에서 1943년까지 5000km의 철도를 더 깔았습니다. 만철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라 제철, 탄광, 해운, 금융, 창고, 전기, 숙박업을 망라한 거대한 조직이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만철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전쟁과 철도, 저항과 투쟁

철도는 병력과 보급품 수송 등 능력 때문에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산업화와 기계 발달로 1000만명 넘는 사망자를 냈습니다. 이 전쟁은 참호, 독가스, 철조망, 기관총으로 요약되며 4년을 끌었습니다. 철도는 1차 대전기난 동안 계속 물자와 병력을 공급했습니다.



독일 장갑 무장열차 |German Federal Archives (1942년)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1차대전보다 영향이 더 커집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믿은 것 두가지는 “공습과 레지스탕스의 철도 공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철도노동자와 레지스탕스는 독일군 화물을 고의로 분실하거나 엉뚱한 곳에 실어 날라 저항했습니다. 또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나치 열차를 지연시켰습니다. 레지스탕스의 철도 공격이 이어지자 독일은 장갑무장열차까지 만들어 대응합니다.

네델란드 철도노동자들은 1944년 9월 유태인 수용소행 기차 운행을 거부합니다. 또 독일군 병력 재배치 이송도 거부한 후 함께 숨어버립니다.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1944년 3월부터 6월까지 영국 철도 사상 가장 바쁜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 기간동안 3만회가 넘는 열차운행이 이어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한 물자와 병력 이동이 이뤄집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호응해 프랑스 철도노동자 레지스탕스인 페르 조직은 터널 안에서 독일군 열차를 탈선 시켜 버립니다. 페르는 부품 고장 등 다양한 태업으로 37개 노선 선로를 끊었습니다. 페르는 연합군에 독일군 병력과 이동경로 등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레지스탕스는 노르망디에 보낼 독일군 정예사단 지원부대를 철도 파괴 등으로 48시간 지연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에 투입된 대원 28명은 대부분 전사 했습니다. 나치는 저항활동을 한 철도노동자 3000여명을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미 공군 폭격으로 파괴되는 철교|National Archieves and Records Adminstration (1950년)


철도와 기차는 인류최대의 학살에 도구로 쓰였습니다. 1942년 독일 나치 최고위층 13명은 회의를 통해 1100만명에 달하는 유럽 내 유태인을 ‘최종해결’ 하기로 합니다. 나치는 집단수용소로 사용될 지역을 기차 연결지점이나 최소한 철도가 닿는 곳을 선호했습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에 대형으로 집단수용소를 지은 이유도 철도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제국 철도는 유태인을 화물열차에 강제로 싣고 여객운임을 받고 수송을 했습니다. 유태인을 수송한 열차 속에는 화장실 대신 작은 드럼통 하나만 있었답니다. 유태인들은 자신의 운명도 몰랐습니다. 가끔 정차 때 화물열차 나무 틈새로 역이름과 풍경을 봤다고 합니다. 심지어 한 수용소는 승객들이 철도역을 빠져 나오면 바로 가스실에서 처형을 하도록 설계를 했습니다.



■해방의 함성과 한국전쟁 포화 속에서

철도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45년 9월11일 소련군이 남북간에 철도를 단절시켰습니다. 마지막 기차 운행은 8월9일 소련 열차가 평양-경성을 2차례 오고 갔다고 합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석을 위해 열차가 다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1946년 9월 철도노동자들은 미 군정청에 “쌀을 달라”고 3차례나 요청했으나 반려되거나 묵살당합니다.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철도 운수부장 코넬슨 중좌는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 먹어 행복하다”고 발언합니다. 발언으로 노동자들은 더 분노했습니다. 결국 금속·화학 노동자까지 25만명이 파업에 동참을 했고 학생들도 1만명 이상이 동맹휴업을 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기차피난민 1호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서울역에서 26일 새벽 4시 특별열차로 도망 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낮12시30분 대구까지 갔습니다. 이 대통령은 너무 내려가서 민망했는지 대전으로 오후 4시30분에 다시 올라왔습니다.

27일 오전 7시와 낮 12시에 각각 열차 한대가 고위 관료들이 탄 피난열차가 떠났습니다. 이 열차는 북한군이 서울 함락하기 전 마지막 서울역 출발열차 입니다. 28일 새벽 용산역에서도 마지막 하행 열차가 떠났습니다. 이때 부유층은 객차로 피아노와 개까지 데리고 피난을 갔습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기차에 매달려서 피난을 갔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철길을 따라 걸어서 갔습니다.



경부선 철길 하행선의 여명 |박흥수 제공(2015년)

원산 북한군 수송로를 폭격하는 미군|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

(1950년)



미군은 2차 대전 때와 같이 공군 전력으로 철도요충지를 공격했습니다. 원산은 한국에서 2번째로 큰 기관차 수리·제작공장이 있었습니다. 또 3대 철도 간선지 중 하나라 미군 폭격이 심했습니다. 미군의 계속되는 폭격에 북한은 인민과 군인 중국인 군인·노동자 국군포로까지 동원해 철도를 복원합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은 휴전선에서 공방하는 장기전에 들어갔습니다.

철도는 한국전쟁 때 벌어진 학살과도 인연이 있습니다. 경부선 영동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타고 가다보면 터널을 지나 내리막길을 달립니다. 이 길을 기차로 2~3분 가다 보면 선로 밑으로 마을을 이어주는 굴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 다리가 바로 노근리 다리입니다.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 미군 주민 학살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 “서울에서 파리행 열차표를 끊으며…”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철도의 2막은 새로운 반전을 준비해야 한다”며 “식민지 침탈과 전쟁의 도구였던 철도가 소통과 연대의 도구로 변신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 출발점이 서울과 평양, 신의주를 잇는 노선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이라며 “서울역에서 런던행과 파리행 열차표를 끊으며 미소 지을 수 있었으면 더 할 나위가 없겠다”고 말합니다.






<손봉석 기자 paulsohn@kyunghyang.com>

 

원본출처; blog.daum.net/bluewave/manage/newpost/?type=post&returnURL=%2Fbluewave%2Fmanage%2Fposts%2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