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당(生祀堂) 이야기
조선시대에 주민이 수령이나 감사 등의 훌륭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당사자 생시에 지은 사당인 생사당에 관한 영남일보와
매일경제에 보도된 기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 이야기
김양진과 박의장
청백리 중 한 사람으로 허백당(虛白堂) 김양진(1467~1535)이란 인물이 있다. 40년간 관직 생활을 하면서 청백과 애민의 자세로 일관한 그는 자신의 봉급까지 털어 가난한 백성을 구휼할 정도로 민생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슨 일을 계획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항상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하고 앞세웠다.
그는 1520년에는 전라감사로 완산(전주)에 부임했다. 이듬해 임기를 마치고 떠나게 되자 그를 전송하는 주민들이 탄 수레와 말이 수백m나 이어졌다. 눈물을 뿌리며 계속 따라오는 그들을 타일러 보내느라 큰 애를 먹어야 했고, 그중 노복이 되기를 자원하며 따라온 30여명은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고 결국 안동까지 따라와 노복으로 함께 살았다. 완산 주민들은 이런 허백당이 떠난 후 생사당(生祀堂·주민이 수령이나 감사 등의 훌륭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당사자 생시에 지은 사당)을 지어 그 덕을 기렸다.
청신재(淸愼齋) 박의장(1555~1615)은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무장이면서 목민관으로서도 남다른 치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면서 숙부로부터 양곡을 얻어 아사 직전의 주민 구휼을 위해 쓰는 등 임란 후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경주부민들은 이런 그를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관찰사나 임금에게 여러 차례 유임을 간청하는 소장을 올렸고, 덕분에 그는 판관(2년)에 이어 부윤으로 7년간 재임해야 했다.
요즘도 주민들은 이런 목민관을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정말 만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며칠 전 하성식 함안군수가 월급을 3년째 기부하고 있다는, 기분 좋은 보도를 접했다. 선거공약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취임 후 지금까지 봉급 1억7천800여만원을 내놓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내년 지방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부인이 받아오라는 마지막 월급만 받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란다.
대구·경북에서도 주민들이 생사당을 지어주고 유임 소장을 올리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지자체장들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김봉규 논설위원
출처: 영남일보
http://m.yeongnam.com/jsp/view.jsp?nkey=20130610.010310708410001
두번째 이야기
이여송의 생사당(生祠堂)
1593년 1월 12일 의주 용만관에서 선조가 어전회의를 개최했다. 좌의정 윤두수와 병조판서 이항복 등이 참여한 어전회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평양성을 탈환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8개월 전 일본의 침략으로 20여 일 만에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란 온 선조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이었다.
요동에서 주로 활동하며 큰 전과를 올려 명 황제 만력제에게 신임을 받아 온 이여송은 조선 총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당시의 나이가 겨우 30세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조선의 전시작전권을 통째로 장악하고 선조보다 더 큰 권한을 갖게 됐다. 그런데 평양성 탈환의 소식을 들은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여송의 공적을 치하하며 그를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건립하기로 한다. 죽은 사람들 중 공로가 많은 사람을 위해 조정에서 사당을 건립하는 경우는 있어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사당을 만들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외국인을 위한 생사당 건립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여송의 생사당 건립이 당연하다며 그의 초상화와 신주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심지어 명나라 총병 양원이 황제의 장수들은 기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선조와 조선 대신들은 명보다 더 호들갑을 떨었다. 결국 이여송의 생사당은 건립됐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다른 장수들의 생사당까지 만들어졌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 명나라 군대에 대한 고마움은 인정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한 행동이었다.
리퍼트 주한 미 대사 피습사건 이후 한국인들이 보여 준 과도한 애정 표현에 대해 국내외 언론사들이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일제히 꼬집었다. 쾌유기원 촛불 문화제가 등장했고, 부채춤과 난타 공연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제부는 단식과 석고대죄를 했고, 특히 상가(喪家)에서 우상숭배라며 고인에게 절하지 않는 일부 종교인들이 미 대사를 향해 큰절을 올리는 모습은 적절한 행동으로 보기 어려웠다. 앞으로는 미국에 대해 우방으로서의 예의를 지키는 것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명확히 구분했으면 한다.
[김준혁 한신대 正祖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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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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