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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한국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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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화이(華夷)의 경계를 허문 세계주의자

홍대용 이미지 1

1765년(영조 41) 초겨울날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중국 땅을 밟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평소 시 짓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은 예외였다. 평생의 소원이 하루아침의 꿈같이 이루어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말고삐를 움켜쥐며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하늘이 사람을 내매 쓸 곳이 다 있도다.
나와 같은 궁색한 인생은 무슨 일을 이루었던가?
…(중략)…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 들판을 날아 건너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망해정 제일층 취후에 높이 앉아
묘갈(墓碣)을 발로 박차고 발해를 마신 뒤에
진시황의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초한 행색이 누구의 탓이라 하리오.[을병연행록] 중에서

세계관을 바꿔 놓은 중국 여행

서른다섯의 나이로 머나먼 중국 땅에 가게 된 홍대용. 그는 좁은 조선 땅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아는 대부분의 조선 유자층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중국 여행은 세계관을 변화시킨 큰 경험이었다. 중국을 다녀 온 뒤 쓴 [을병연행록]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그리고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중국견문록으로 꼽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중국견문의 붐을 일으켰다.

홍대용은 원리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형적인 선비 타입의 인물이다. 세속적인 선비가 아닌 진실한 선비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그가 동시대를 살았던 선비들과 다른 점이라면, ‘명(明)’이여야만 된다는 아집에만 젖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뒤 조선사회는 북벌(北伐)과 함께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올랐다.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젖은 조선 유학자들은 청을 중화(中華)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중국 연행(燕行)을 다녀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선 인물이 홍대용이다.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석실서원에서 수학하다

주류에서 태어났지만, 비주류의 삶을 지향했던 실학자 담헌 홍대용은 1731년(영조 7) 충청도 천안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에서 부친 홍역(洪櫟)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사회의 중심에서 출발한 인물이다. 그가 속한 남양 홍씨 가문은 누대로 정계에 진출한 노론의 핵심 문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는 보장받은 혈통이었다. 그런 배경을 안고 출발하였지만, 홍대용은 집안 전통과 달리 순수한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 이미 10세 때부터 ‘고학(古學)’에 뜻을 두어 과거시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시험을 합격하기 위해서는 시험에 걸맞은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홍대용은 반복되는 입시시험, 즉 과거시험에는 영 흥미가 없었고, 인연도 없었다. 물론 훗날 집안 대대로 중앙관직과 지방수령을 거친 선조들이 있었기에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진출하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관직에는 큰 뜻이 없었던 인물이라 평할 수 있다.

노론의 명망가 출신이다 보니 스승을 정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홍대용은 어린 나이에 당시 김원행(金元行)이 있는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들어갔다. 석실서원은 안동 김씨 세거지에 있었던 서원으로 북벌론의 이념적 표상이었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이후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김창협(金昌協)이 이곳에서 그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스승인 김원행은 당대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홍대용이 석실서원에서 수학한 기간은 12세부터 35세까지 23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엄격한 학풍을 내면화하면서 철저한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아울러 이 무렵 박지원, 박제가등 북학파를 형성했던 인물들과 교유하였고, 부친이 나주목사를 하던 시기에는 나주의 실학자인 나경적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청년시절에 이룩한 구도자적 삶과 과학적 탐구정신은 연행을 통하여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의무려산에서 만난 실옹과 허자

홍대용이 북경을 가게 된 것은 공식적인 업무로 간 것은 아니고, 서장관으로 북경 사행에 참여한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군관, 즉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것이다. 중국 사행단에서 사신의 임무를 띤 대표적인 관원은 삼사(三使)라 하여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가 있었다. 이들은 사신으로서의 공식 일정을 완수하느라 바쁠 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제약이 따랐다. 그러나 삼사의 친인척 중에서 주로 임명되는 자제군관들은 특별한 임무가 없었던 관계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등이 자제군관 신분으로 북경을 다녀오면서 많은 중국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홍대용이 북경에서 60여 일 간 머물면서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경험은 이후 자신의 사상을 살찌우는 산 경험이 되었다. 특히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소설 [의산문답(醫山問答)]은 실제로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醫巫麗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산문답의 배경이 된 의무려산 전경 <출처 : 실학박물관>

[의산문답]은 모든 사람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풍자한 과학소설이라는 점에서 1623년 갈릴레이가 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오디세이, 즉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비견되는 글이다. [의산문답]은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세속적인 허례허식과 공리공담만을 일삼는 허자의 물음에 실학적인 인물인 실옹이 답하는 대화체의 글로, 30년간 성리학을 익힌 허자가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다가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 자신이 그 동안 배운 학문이 헛된 것이었음을 풍자한 놀라운 작품이다.

그렇다면 홍대용은 왜 소설의 배경으로 의무려산을 택했을까? 북경 방문길에 들렸던 소설 속 배경인 의무려산은 화이(華夷)의 구분을 짓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가 의무려산에서 무한우주관을 제시한 것은 최종적으로 중국과 오랑캐, 즉 화와 이의 구분을 부정하는데 있었다. 북경 방문을 계기로 홍대용은 기존의 우주관에 회의를 품으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중요한 이론인 지전설과 무한우주관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지구는 회전하면서 하루에 일주한다. 땅 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는 12시이다. 이 9만 리의 거리를 12시간에 달리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벼락보다 빠르고 포환보다 신속하다”[의산문답] 중에서

홍대용의 우주관은 사실 금성, 수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의 행성은 태양 둘레를 돌고 태양과 달은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우주 체계에다가 지전설만을 덧붙인 것이었다. 따라서 홍대용의 우주체계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는 “지전설은 송나라 학자 장횡거가 그 원리를 조금 밝혀냈으며, 서양 사람도 배에 타고 있으면 배가 나아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론으로 추정해냈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추론은 지전설에서 멈추지 않고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우주관을 완성해 냈다.

중심주의를 해체한 조선의 지성

1636년 병자호란 이후 한 세기 이상이 지났지만, 조선사회는 여전히 중화주의적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청나라는 여전히 야만국이었고 명나라의 제도를 보존하고 있는 조선은 사라진 중화의 적통이었다. 홍대용의 북경 여행은 조선 유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명분론이 비현실적인 것임을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되었다. 30년간 성리학 공부만 하던 허자가 세상에 나와 야심차게 내뱉은 말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고 허자는 곧 홍대용 자신이었다. 실옹의 입을 빌려 홍대용은 무한우주론을 설파했다.

“우주의 뭇 별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의산문답] 중에서

무한우주론은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론 중국 고대우주론에서 선야설이라 하여 무한의 공간을 상정한 적도 있었고, 북송의 철학자 장횡거(張橫渠, 1020~1077)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지만, 홍대용처럼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구로 태양계의 중심이라 한다면 옳은 말이지만, 이것이 바로 여러 성계(星界)의 중심이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물에 앉아 하늘 보는 소견이다”

홍대용의 우주관은 탈지구중심론이라는, 실로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식론적 대전환을 제기했다는 측면과 함께 과학적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폄하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과학자로서의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동양의 지성으로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지도를 그린 선각자였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구 세계를 저 우주에 비교한다면 미세한 먼지만큼도 안 되며 저 중국을 지구 세계와 비교한다면 십수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헤아릴 수 없는 별의 세계가 우주에 산재하고 있다는 홍대용의 우주관은 세계가 화(중국)과 이(오랑캐)로 구분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시공을 초월한 우정

시류의 선비들이 이론만 떠받들면서 실천에는 등한시한 세태를 걱정하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만을 고대하던 조선의 지성, 홍대용은 아쉽게도 1783년 풍으로 쓰러진 후 일어나지 못했다. 홍대용의 갑작스런 부고를 전달 받은 연암 박지원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의 묘지명을 썼다.

홍대용은 넓은 땅에서 제대로 된 선비를 만나고 싶은 소망이 있던 차에 북경 유리창에서 엄성·반정균·육비 등 청나라 학자들을 만났다. 이들 또한 평소 제대로 된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학식에 놀라고 반기며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다. ‘한 번 이별하면 다시는 못 만날 것이니, 황천에서 다시 만날 때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 생전에 더욱 학문에 정진하자’하며 약속하고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덕보(홍대용)는 이들 중 동갑인 엄성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엄성에게 충고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은 때에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엄성이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어서 과거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간 뒤 몇 해 만에 그만 죽었다. 부고를 받아든 덕보가 제문을 짓고 제향(祭香)을 중국으로 보냈는데, 마침 이것이 엄성의 집에 도착한 날이 대상(大祥;죽은 지 2년만에 지내는 제사)이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며 ‘명감(冥感)이 닿은 결과다’라고 하였다. 엄성의 아들이 부친의 유고를 덕보에게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도착하였다. 그 유고에는 엄성이 손수 붓으로 그린 덕보의 초상화가 있었다(그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홍대용의 유일한 초상화이다). 엄성이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기증한 조선산 먹과 향을 가슴에 품고 떠났다. 관 속에 이 먹을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절강사람들이 기이한 일이라 하였다.박지원의 [홍덕보묘지명] 중에서

조선에 돌아 온 홍대용은 이들과 나눈 왕복 편지와 필담을 묶어 [회우록(會友錄)]이라 하고 이 서문을 박지원에게 부탁했다. 이들이 나눈 세기의 우정을 누구보다 부러워했던 박지원은 홍대용이 갔던 길을 따라 1780년 북경을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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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이황 동방의 주자 의견400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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