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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대한 비판(批判)


자주시보(http://www.jajusibo.com)에서 관심있게 연재 중인 우리역사 시리즈에서 이용섭 역사연구가가 쓴 '임나본부설에 대한 비판' 기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역사.49]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대한 비판(批判) - 제 1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 일본서기(신공황후기)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5/04/16 [12:47]  최종편집: ⓒ 자주시보

[우리역사이야기 – 53]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대한 비판(批判) - 제 1부

  

▲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학계에서도 폐기한 주장이고 지적하는 한신대 하종문 교수 ©자주시보


들어가는 말
 
근래 들어 일본의 역사 왜곡책동이 도를 넘고 있다. 일본의 우리겨레의 역사에 대한 왜곡은 이미 우리역사 이야기 제2편에서부터 제6편까지 연재를 하면서 다루었다. 일본은 우리겨레가 적어도 일백만년 이상 살아온 이 땅을 강탈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역사시기만 하여도 적어도 일만 년 선사시기까지 하면 일백만 년 이상을 조선반도에서 살아온 우리겨레를 영원한 식민지 노예로 부려먹기 위하여 악랄하게 우리겨레의 역사를 왜곡 · 조작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겨레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1912년부터 1932년까지 근 20여 년 간을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아끼지 않고 투입을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의 주 대상은 찬란했던 우리겨레의 상 · 고대사에 집중이 되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겨레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가장 중시했던 대상은 바로 우리의 상 · 고대사이다. 그들은 교묘하게 상 · 고대사를 왜곡을 하였다.
 
그들이 우리겨레의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데 상 · 고대사에 집중을 했던 이유가 있다.
 
첫째,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겨레를 식민지 노예로 삼기 위해서는 우리의 위대한 지나간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면 안 된다. 만약 식민지 지배를 받는 우리가 일본보다 위대했고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식민지통치를 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거세게 저항을 할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겨레의 지나간 역사가 결코 찬란했다거나 위대했었다는 것을 알면 안 된다.
 
둘째,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우리겨레의 역사 왜곡하는데 가장 중심에 두었던 역사는 상 · 고대사 가운데에서도 일곱 분의 한님(桓因)이 이끌던 한국시대(桓國時代)와 열여덟 분의 한웅(桓雄- 한검)이 이끌었던 박달나라시대(神市時代), 그리고 마흔일곱 분의 임금이 이끌었던 후박달나라(檀君朝鮮) 였다. 그들은 먼저 일곱 분의 한님이 이끌던 한국시대나 열여덟 분의 한웅이 이끌었던 박달나라시대(神市時代)라는 것은 아예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만약 우리겨레의 역사가 한국시대도 있었고 박달나라시대(신시시대)가 있었다고 한다면 배달겨레의 역사는 무려 9,300여 년 혹은 일만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온 누리 최대, 최고의 문명을 구가한 위대한 민족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본다면 온 누리 현생 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시원을 이룬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시기에 대해서는 아예 논의 대상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설왕설래가 있었던 시기인 후박달나라(檀君朝鮮)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논의를 하는듯하다가 결국에는 그나마도 아예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해버리는 역사적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후박달나라(檀君朝鮮)시기에 대해서 논의를 해보려고 시도를 했던 부분은 우리조상들의 찬란했던 참 역사에 대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그 당시에도 이민족에 의해 우리민족이 식민지지배를 받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즉 화하족들인 기자의 동래설과 위만이 후박달나라 후기 우리민족을 지배를 했다는 위만조선설이 그것이다. 그 근본 목적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우리겨레는 이미 상 · 고대시기부터 이민족에 의해서 지배를 받은 민족이었으니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식민지지배를 받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우리겨레에게 주입을 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참으로 교활하고 악랄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이다.
 
셋째,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겨레의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데 두 번째로 중점을 두었던 시기는 고대시기이다. 우리조상들이 남긴 역사서를 보면 7분의 한님(桓因)이 이끌었던 한국시대(桓國時代)나, 18분의 한웅(桓雄- 한검)이 이끌었던 박달나라시대(神市時代)에 대한 기록들이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반면 우리겨레를 제외한 이민족들에게서는 그 시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전무하다. 물론 화하족들이 배달겨레의 역사를 가져다가 자신들의 역사로 바꿔치기를 한 기록들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를 기록한 역사적 기록으로 우리 조상들이 남긴 내용과는 대비가 되지 않는다. 화하족들이 우리의 역사나 혹은 조상들을 자신들의 역사요 조상들이라고 바꿔치기를 한 시기는 우리역사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고시씨, 신지씨, 치우씨의 후손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 또 그 인물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둔갑을 시킨 것이다. 그 대상이 된 동이족들과 역사는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소호 금천씨, 순 임금 등이며, 그들이 이끌었던 나라의 역사를 바로 화하족의 역사로 둔갑을 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집필 중에 있다. 여기서는 화하족들의 역사 왜곡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니 여기서 그친다.
 
화하족들이 이 정도였는데 왜인(倭人)들이야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왜인들의 역사라는 것은 뒤에서 다루겠지만 거의 고대소설을 보는 듯하다. 그들의 역사서라는 것이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대표적이다. 얼마 전에 마친 일본서기 주역 본 서문에 보면 우리의 고대 사서들을 짜깁기 한 것 같다고 한다. 왜인들의 고대 역사서가 우리겨레의 역사서를 짜깁기 하여 역었으니 우리겨레의 고대사에 대해서도 당연히 왜곡하고 조작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겨레의 고대사에 대한 왜곡과 조작도 치밀하게 이루어졌으며 시간이 흐를 수로 그 년대가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고대사 즉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라(伽倻)의 역사도 심각하게 왜곡을 하였다. 학자라는 탈을 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돌격대인 일본의 역사가들은 우리겨레의 역사가 일본의 역사 시작 시점보다 더 오래 되었으며 위대하고 찬란했다는 것을 도저히 허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제국주의 역사학자들은 우리겨레의 한국(桓國) - 박달나라(神市) - 후박달나라(檀君朝鮮) - 삼조선(三朝鮮: 신한 · 말한 · 불한)의 역사는 도저히 실재했던 역사로 인정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돌격대들인 일본역사가들은 우리겨레의 상대사뿐 아니라 우리겨레의 고대시기인 고구려 · 백제 · 신라· 가라(伽倻)의 초기 역사마저도 허용을 할 수가 없었다.
 
위대하고 찬란했으며 장구했던 우리겨레의 역사를 축소시키기 위해 일본인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모든 열과 성을 다 바쳤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등장한 것인 바로 ≪삼국사기초기불신론≫이다. 그들은 고구려 · 백제 · 신라· 가라(伽倻)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기원후 4세기 이전의 역사 기록에 대해서는 인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학자라는 고상한 탈을 뒤집어 쓴 일본의 역사가들은 조선반도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고 우리겨레를 영원한 식민지노예로 다스리기 위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해냈다. ≪삼국사기초기불신론≫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모든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면 우리겨레에게는 고대부터 강력한 고대국가가 존재를 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또 우리겨레에게 고대부터 강력학 고대국가가 존재를 했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왜곡하고 조작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결국  조작된 허구의 역사가 되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심각한 논리의 모순에 빠져든다. 이 말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실재하지 않았던 역사가 된다. 이에 따라 일본제국주의 역사가들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삼국사기초기불신론≫을 또 조작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현재 우리 사회에는 과연 ≪삼국사기초기불신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이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돌격대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고 우리겨레를 자신들의 영원한 식민지노예로 삼기 위해 조작된 ≪삼국사기초기불신론≫을 과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겨레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주입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끈임 없이 강조를 하고 있는바 현재 우리의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강단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초기불신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인가. 그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주류사학계의 이러한 역사적 이론에 따라 중 · 고등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역사교과서에는 고구려 · 백제 · 신라를 건국한 건국시조들이 누락이 되어있으며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 제7차 교육과정 이전의 <국사교과서> 부록의 ‘역대 왕조 계보’에 삼국 초기 임금들의 재위연대에 대해서 아예 기록도 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53~146)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부터, 신라는 한술 더 떠서 제17대 내물왕(356~402)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하고 있었다.
 
필자도 고등학교과정에서 역사교육을 받을 때 고구려 · 백제 · 신라에 대해 배울 때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들었던 말이 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삼국초기에는 나라다운 나라의 틀을 갖추지 못했다. 신라는 기원후 4세기 내물(奈勿) 마립간(麻立干)에 이르러서야 나라다운 나라의 틀을 갖추었다. 바로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이 왕(王)을 호칭하는 지배자의 이름이다. 그 이전까지의 호칭인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은 다 ≪무당≫이나 ≪촌장≫을 가리키는 명칭일 뿐이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칭호가 아니다.”라고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가 없고 억이 막힌다.
 
필자가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당시 역사 선생님들은 제대로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위에서 역사 선생님들이 언급한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이 ≪무당≫이나 ≪촌장≫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하였는데 어불성설이다. 즉 그들은 이두에 대해서 배우지지 못하다 보니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이 모두 나라를 이끌어가는 영도자의 명칭인 ≪임금≫을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를 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학생들에게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선봉대 돌격대들에 의해 왜곡된 식민사학을 자라나는 배달겨레 후손들에게 주입을 시키고 있었다. 참으로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도 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 증거가 현재 학교라는 공간에서 우리역사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사용을 하는 국사교과서의 내용이다.
 
이렇게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돌격대들이자 선봉대들인 일본인 학자들이 왜곡 · 조작한 우리겨레의 역사는 우리 사회에 심대하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로 그러한 부정적 현상들이 현 남쪽 사회를 휩쓸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땅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겨레를 영원한 식민지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조작한 역사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요, ≪삼국사기초기불신론≫이다. ≪삼국사기초기불신론≫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작하고 왜곡한 정설(定說)이 아닌 허설(虛說)일 뿐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허구성이 깨지면 ≪삼국사기초기불신론≫ 역시 그 이론적 타당성을 잃게 된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허구성에 대해 보도록 하자.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허구성을 논증하기 위해서 활용하게 될 사료나 자료들은 남쪽역사학계, 북쪽학계,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이론들을 동시에 보도록 한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열제릉비해제본≫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를 참고자료로 활용을 하게 될 것이다. 기타 필요하다고 여길 시 여러 사서들과 관련 도서와 자료들을 함께 활용을 할 것이며 필자가 이미 다룬 식민사관의 성립에서 자료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2.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태동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나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은 그 명칭에서부터 목적성이 뚜렷이 두러난다. 특히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은 일본이 조선반도 남쪽을 식민지경영을 했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을 조작하고 이를 근거로 마침내 조선의 조정을 강압하여 강제로 맺은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자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다음의 세 가지 조작된 증거를 토대로 세운 이론이다. ① 국강상광개토경호태열제릉비문의 비문 ② 칠지도 ③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이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선봉대 돌격대들인 일본인 역사학자들은 조선이 고대부터 일본에 의해 식민지지배를 당했다는 것을 논증하고 고증을 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학자라는 양심을 버리고 침략의 돌격대가 되어 식민지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타민족의 역사와 자신들의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 조작을 하였다.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일본의 국학자들은 고사기 · 일본서기의 연구를 통해 태고 적부터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주장하였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1)에 들어서서 서양의 실증사학을 받아들여 문헌고증의 근대 역사학이 성립되었다. 국학연구의 전통을 이어받은 간(菅政友) · 쓰다(津田左右吉) · 이마니시(今西龍) · 아유가이(鮎貝房之進) 등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로 전제를 하고 임나관계의 지명 고증작업을 행하였다.
 
또한 스에마쓰(末松保和)는 ≪대일본사 大日本史, 1933≫를 저술하여 <일한관계 日韓關係>를 정리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남선경영론을 완성시켰다. 남선경영론의 핵심은 ≪임나흥망사 任那興亡史, 1949≫였다. 스에마쓰(末松保和) 임나일본부설의 요지는 몇 가지로 요약을 할 수가 있다.
 
㉠ ≪삼국지≫ 위서 ≪왜인전≫의 기록으로 보아 3세기 중엽에 일본이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임나가라를 점유하고 왜왕은 임나가라를 근거로 해서 삼한에 통치력을 행사하였다.
 
㉡ ≪일본서기≫ 진쿠황후(神功皇后) 49년 조의 7국 및 4읍 평정기사로 보아, 369년 당시 왜는 지금의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일부를 귀속시켜 임나 지배체제를 성립시키고, 백제왕의 조공을 서약 받았다.
 
㉢ 국강상광개토경호태열제릉비의 비문을 보아 왜는 400년 전후 고구려와 전쟁을 하여 임나를 지역의 지배를 굳건히 하였으며 잭제에 대한 복속관계를 강화하였다.
 
㉣ ≪송서 宋書≫ 왜국전에 왜 5왕의 작호로 보아, 일본은 5세기에 외교적인 수단으로 왜 · 신라 · 임나 · 가라에 대한 지배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인정받았으며, 백제의 지배까지 송나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 ≪남제서 南齊書≫ 가라국전 및 ≪일본서기≫ 게이타이왕(繼體王) 때의 기사들로 보아, 일본은 5세기 후반에 임나에 대한 통제력이 완화되기 시작해 6세기 초반에는 백제에게 전라남북도 일대의 임나 땅을 할양해 주기도 하고, 신라에게 남가라(南加羅) 등을 약탈당하기도 하면서 임나가 쇠퇴하였다.
 
㉥ ≪일본서기≫ 긴메이왕(欽明王) 때의 기사로 보아, 540년대 이후 백제와 임나일본부는 임나의 부흥을 꾀했으나, 결국 562년에 신라가 임나지역을 토벌하여 임나가 멸망하였다.
 
㉦ 임나가 신라의 토벌로 무너진 후에도 왜는 임나 옛 땅에 대한 연고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646년까지 신라에게 임나의 조(調)를 요구해 이를 받아냈다.
 
위 내용을 종합하면 왜왕이 조선반도의 남쪽인 임나지역을 정벌해 점령지에 설치한 직할통치기관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설이다, 왜(倭)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기반으로 하여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가라(伽倻)를 비롯해 백제 · 신라 등의 조선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 · 남선경영론인 것이다.
 
참으로 황당무계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 조작한 임나일본부설을 좀 더 상세해보기로 한다. 일본의 학자들인 식민사관론자들은 일본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이 4세기 후반에 조선반도에 출병하여 2세기 동안 가라(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였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의 학계나 일반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를 정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출병과 지배라는 허황한 설을 조작하는데 주요한 근거로 내세운 것이 ‘국강상강개토경호태열제릉비’와 ‘칠지도’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사’ 등이다.
 
일본이 1970년대 중반까지 임나일본부설을 학문적으로 확정하여 정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이 조선반도식민지지배가 끝장이 난지 3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조선반도에 대한 식민지지배의 야망을 버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야망 즉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이라는 망상은 아베정권 들어서서 극을 달리고 있다. 아베정권 들어서서 독도에 대한 강탈 야욕이 이전 정권들에 비해 그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군국주의로 나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일본헌법 제9조의 개헌을 통해 보통국가를 이루고 군사대국화로 나가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1980년대 이후에 주춤했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생들에게 강압적으로 주입시킴으로서 군국주의 야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의 부활은 바로 조선반도를 또 다시 침략을 하여 지배를 하고 이를 발판으로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대륙을 점령하여 대동아공연권의 개꿈을 실현해보고자 하는 망상에서 벌어지는 일본극우주의자들의 발악이다. 바로 이와 같은 망상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과거 식민사관을 부활시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작된 야마토 정신(大和精神)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임나일본부설을 다시 꺼내든 것은 일본극우주의자들의 망상을 기어이 실현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겨레는 이를 중시해야 하며 경계를 해야 한다. 역사 왜곡이나 조작이 단순하게 역사적 사실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를 토대로 상대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시도를 하는 것이며 이를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역사 조작이요 왜곡인 것이다.
 
 
3.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돌격대인 일본인 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의 주요한 근거로 내세운 것이 ‘국강상광개토경호태열제릉비문’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칠지도’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 내세운 세 가지의 근거가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따로 다루고 여기서는 그들이 내세운 근거를 단순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임나일본부설은 후에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에게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 同祖同根論)과 타율성론의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1)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열제릉비문(國岡上光開土境平安好太列帝陵碑文)
 
일본제국주의 학자들이 내세운 가장 주요한 근거는 바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열제릉비문’의 내용이다. 그들이 내세운 주요근거는 ‘국강상광개토경호태열제릉비문’의 신묘년(辛卯年) 기록이다. 이에 대해 간략히 보기로 하자.
 
국강상광개토경호태열제의 정확한 호칭은 비문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필자가 굳이 ‘열제’를 붙이는 것은 당시 고구려는 아시아 아니 온 누리에서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물론 왜곡된 역사적인 내용만을 알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동북아시아에서 강대했을지 모르지만 온 누리에서 가장 강대했던 국가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강단사학(植民史學)으로부터 자유로운 신분에서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본 연구가들은 이에 대해 대부분 긍정을 하고 있다. 필자 역시 본 부분에 대해서 공감을 하고 있기에 ‘열제’를 붙이고 있다. 이 점 이해하기 바란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80년 재발견이 된 이후 1883년 일본인 육군참모본부 중위 ≪사까와 가게아끼≫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구해가지고 일본으로 들어간 후 6년 동안 연구하여 1889년 6월 일본 아세아협회(亞細亞協會)가 발간한 『회여록(會餘錄)』 제 5집에 릉비문(陵碑文)의 전문인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공개하면서였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다음의 문장이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白殘□□〔□+斤〕라, 以爲臣民.
(백잔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도해, 파백잔□□〔□+斤〕라, 이위신민.)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이에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왔다. 백제를 깨고 □□〔□+斤〕라를 하여 이에 신민으로 삼았다.」
 
바로 위 국강상광개토경호태열제릉비의 신묘년기사가 문제가 된 것이다. 바로 위 신묘년기사에서 파손되어 해석을 할 수 없는 부분을 일본인들이 제 멋대로 ≪임나≫라는 글자와 ‘라’ 앞의 글자인 ‘□+斤’를 ‘新’자로 해석을 하여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를 조작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과 위당 정인보 선생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또한 1972년 일본에 있던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에 의해서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가 일제에 의해서 조작이 되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 이 후 남측 학계 이형구와 박노희는 1986년에 발표한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에서 릉비문에 대한 조작설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물론 1980년대 들어서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또한 북에서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릉비(陵碑) 위작설(僞作說)을 기초로 하여 김석형 선생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자세한 것은 별도로 분석을 할 것이다.
 
 
2)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記: 기원후 201년~269년 재위)
 
임나일본부설의 두 번째 근거는 바로 일본서기 신공황후기(神功皇后記)이다. 신공황후기를 읽고있으면 도대체 내가 고대 신들의 나라에 대한 소설을 읽는 것인지 역사적 사료를 읽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역사서의 기본도 갖추지 못하였다. 신공황후의 기년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신공황후는 201년에 시작을 하여 269년에 섭정이 끝이 난다. 그런데 신공황후가 201년에 시작을 하는데 기록을 보면 389년에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아래에서 더 상세를 하겠지만 일단 신라 · 고구려 · 백제와 관련된 신공황후의 기사를 간단히 보도록 하자. 그 논리의 모순이 얼마나 큰지 역사서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으며 설사 소설이라고 해도 논리적 모순에 대해서는 해명할 길이 없다. 도대체 어찌 이런 기록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역사와 우리겨레의 역사를 왜곡하는 근거로 삼는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백제 근초고왕부터 침류왕까지의 기록을 먼저 보기로 한다. 백제 근초고왕부터 근구수와 그리고 침류왕까지 삼국사기의 기록도 간단히 올려준다.
 
-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
 
-55년(서기 255년)에 백제 초고왕이 죽었다.(서기 375년)(역주 일본서기. 연민수, 김은숙 외 4인. 동북아역사재단. 2014년 2월 14일. 507쪽)
 
-56(서기 256년)년에 백제 왕자 귀수가 왕위에 올랐다.(서기 375년)(서기 375년)(역주 일본서기. 연민수, 김은숙 외 4인. 동북아역사재단. 2014년 2월 14일. 507쪽)
 
-64(서기 264년)년에 백제국 귀수왕이 죽었다.(서기 384년) 왕자 침류왕이 왕위에 올랐다.(서기 375년)(역주 일본서기. 연민수, 김은숙 외 4인. 동북아역사재단. 2014년 2월 14일. 509쪽)
 
-65(서기 265년)년에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서기 385년) 왕자 아화(阿花)는 나이가 아렸다. 숙부 진사(辰斯)가 찬탈하여 왕이 되었다.(서기 375년)(역주 일본서기. 연민수, 김은숙 외 4인. 동북아역사재단. 2014년 2월 14일. 509쪽)
 
*** 일본서기에 기록된 ≪초고왕≫은 백제 ≪근초고왕≫이다. ≪귀수왕≫은 백제 ≪근구수왕≫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2 -
 
- 근초고왕(近肖古王):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와서 북변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왕이 장수를 보내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또 대병력을 출동시켜 보복하려다가 흉년이 들어 결행하지 못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죽었다. 백제가 개국한 이래 문자(文字)의 기록이 없다가 박사(博士) 고흥(高興)에 의해 비로소 문자의 기록이 있었다. (서기 375년)(서기 384년)(삼국사기. 김부식/ 신호열 역해. 동서문화사. 2007년 7월 20일.467쪽)
 
근구수왕(近仇首王): 10년 봄 2월, 해에 세 겹의 무리가 쳤고, 대궐 안에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에 왕이 죽었다. (서기 384년)(삼국사기. 김부식/ 신호열 역해. 동서문화사. 2007년 7월 20일.468쪽)
 
-침류왕(枕流王): 2년(서기 385년) 봄 2월, 한산(漢山)에 불사(佛寺)를 창건하고 도승(度僧) 10면을 두었다. 겨울 11월 왕이 죽었다.(서기 384년)(삼국사기. 김부식/ 신호열 역해. 동서문화사. 2007년 7월 20일.468쪽)
 
일본서기 신공황후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서 보듯이 두 자료의 기록이 무려 두 갑자(甲子) 즉 120여 년의 차이가 난다. 도대체 이런 차이는 어디서 빚어지는 것인가? 이러한 엄청난 사료의 자이를 보이고 있음에도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해냈으며 아직까지도 버젓이 교과서에 올려놓고 일본의 자라나는 세대들을 세뇌시키며 군국주의 돌격대로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신공황후가 태어난 시기는 서기 169년으로 본다. 또 서기 201년에 재위에 올라 서기 269년에 끝나는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신공황후는 그녀가 태어나서 생을 마친 269년까지로 보면 대략 100살을 살았던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제의 근초고왕부터 침류왕 때까지도 신공황후가 집정을 하던 시기라고 본다면 도대체 귀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집정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죽어서도 집정을 하면서 백제의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가. 또 신공황후가 태어나서 백제의 침류왕 때까지 집정을 했다고 한다면 그의 나이는 무려 220년간 살아던 것으로 계산이 된다.
 
신공왕후가 집정하기 시작한 후 재위 49년 조를 뛰어넘어 55년 조에 이르면서 갑자기 서기 375년이 된다. 재위 49년 조와 55년 조 사이에는 6년이라는 세월이었음에도 갑자기 126년 뒤의 백제 근초고왕의 서거를 기록하고 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아마도 급하게 또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미 조작된 내용을 다시 조작을 하다 보니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記) -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또 다른 기사를 보자. 본 기사에 대한 오류문제는 다음 장 정도에서 정밀 분석을 할 것이다. 여기서는 해당 기사를 단순히 올려주기만 한다. 본 기사를 보고 일본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이 가졌던 지향점과 현 시기 임나일본부설을 교과서에 실어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본 극우주의자들 더 정확히 말하면 군국주의 망상에 빠져있는 집단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우리겨레 구성원들은 과연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심사숙고해보기를 바란다.
 
❝ 9년 겨울 10월 기해삭 신축(3일)에 화이진(和珥津 : 와니노츠)¹에서 출발했다. 이때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은 파도를 치게 하였다. 그리고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모두 떠올라 배를 떠받쳤다².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를 따라온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 일로 인해서 천신지기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신라의 건국 이래 바닷물이 나라 안까지 들어온 일은 아직 없었다. 천운이 다해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나고, 북과 피리 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신라왕은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 장차 신라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 전의를 상실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³이라고 한다. 또한 성왕이 있는데 천황(天皇)⁴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내어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백기를 들어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드리우고 두 손을 뒤로 묶고, 도적(圖籍)⁵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지금 이후부터 길이 천지와 함께 복종하여 사부(飼部: 미마카이)⁶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사이 없이, 춘추로 말벗과 말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꺼리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조(調)⁷를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거듭 맹세하여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는 일이 없는 한, 또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⁸가 역류하고 강의 돌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춘추로 조공을 거르거나 태만하여 말벗과 말채찍을 바치지 않는다면 천신지기여, 벌을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역주 일본서기. 연민수, 김은숙 외 4인. 동북아역사재단. 2014년 2월 14일. 476~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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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첨자 주석
 
주역자들이 주석한 내용을 올려주고 필요할 시 필자의 주석을 올려준다.
 
1. 화이진(和珥津 : 와니노츠): 현재 대마도(對馬島)의 북단에 있는 상현부(上縣部) 상대마정(上大馬町)의 악포(鰐浦)이다.
 
2. 『고사기(古史記) 중애천황단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3.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왜(倭)와 일본이 혼용되어 나온다. 일본 국내 사료에서 대외적으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사용한 것이 확실한 기자는 『속일본기(續日本記)』 대보(大寶) 2년(서기 702년) 을유조(乙酉條)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당에 파견된 율전조신진인(栗田朝臣眞人)이 자신이 일본국의 사신이라고 주장하자. 당 황제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질문하였다고 한다. 중국 측 사료의 경우는 『구당서(舊唐書)』 권(卷) 6 측천황후본기(則天皇后本紀) 대족(大足) 2년(702년) 기사와 동(同) 권(卷) 199 상(上) 열전(列傳) 왜국조(倭國條)에서부터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 문무와 10년(670년) 12월조에 일본이란 국호가 처음 보인다. 이러한 일본(日本)이란 국호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추고천황(推古天皇)이 수(隋)의 황제에게 보낸 국서(國書)에 있는 ‘일출처천자(日出處天子)’〔『수서(隋書)』 권(卷)81 열전(列傳) 왜국조(倭國條)〕를 근거로 일본(日本)의 중국의 동방이 있다는 의미로 추고조(推古條)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현재는 천무말(天武末)에서 지통초(持統初)에 걸쳐(7세기 말~8세기 초) 성립하여 지동천황 3년(689) 정어원령(淨御原令)에 의해 제도화된 후, 신라나 당나라에도 전해졌다고 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 최근 중국 학술잡지에서 보고된 백제인 이군〔(示+爾)軍. 613~678〕 묘지명에 새겨진 ‘일본(日本)’이라는 글자는 왜국의 정식 국호가 아니다. 여기서 ‘일본’은 자연지리적 특징에 따른 은유적 명칭으로 중국 쪽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일본’이 백제를 가리킨다는 자중도 있다. 묘지명에서 실제 왜국은 해좌(海左), ㅇ동(ㅇ東) 등으로 표기되어있기 때문이다.
 
4. 왜왕(倭王) 또는 대왕(大王)(熊本縣 江田船山古墳出土 大刀銘)에서 바뀐 고대 일본 군주의 칭호이다. 성립 시기는 먼저 추고조(推古條)의 법융사(法隆寺) 「약사여래상광배명(약사여래상광배명(藥師如來像光背銘))」과 효덕조(孝德條)의 「원흥사탑로반명(元興寺塔露盤銘)」에 ‘천황(天皇)’이 새겨진 것을 근거로 추고조(推古條)에 즈음하여 성립되었다는 견해와, 천무기(天武紀) 이전의 『일본서기(日本書紀)』 기록은 물론 금석문 등에 보이는 천황호는 천무, 지통천황 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현재는 1983년 비조경유적에서 출토된 ‘황자(皇子)’, ‘대진황(大津皇)’ 목간과 1997년 ‘天皇聚□弘寅□’이라고 적힌 비조지 출토 목간을 근거로 일본(日本) 국호와 함께 7세기 말 천무조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5. 도적(圖籍): 지도와 호적을 의미한다.
 
6. 율령제하에서 말의 사육을 담다하는 곳을 말한다. 『령집해(令集解)』 직원령(職員令) 좌마료조(左馬療條)에 「頭一人, 掌左閑馬調習, 養飼, 供御乘具, 配給穀草, 及飼部戶口名籍事.(두일인, 장좌한마조습, 양사, 공어승구, 배급곡초, 급사부호구명적사)」라고 나온다. 신라가 왜국의 사부(飼部)가 되겠다는 것은 『고사기(古史記)』 중애단(仲哀段)에 신라왕이 ‘어마감(御馬甘)’이 되겠다는 표현 및 『일본서기(日本書紀)』 웅략천황 8년 2월조에 신라인을 ‘전마(典馬)’로 삼았다는 표현과 함께 앞으로 일본에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한반도제국에서 말과 마구, 말의 사육법등이 왜국에 전래된 사실과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이라는 전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
 
7. 조(調): 『일본서기(日本書紀)』 숭신천황 12년 9월조에 보이는 「此謂男子(弓+耳)調, 女子手未調也(차위남지ㅇ조, 여자수미조야)」를 가리킨다. 남자가 수렵을 통해서 얻는 고기와 피혁, 그리고 여자가 손수 짜내는 명주와 무명 등의 조세를 일컫는다. 여기서 ‘조(調)’라는 용어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외교 교섭시에 보낸 선물을 나타내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일본 중심적인 독특한 표현이다. 주변 국가들을 ‘번국(蕃國)’으로 놓고, 그 번국의 공물의 의미로서 고대 일본 율령 세제용어인 조(調)를 사용하여 표기한 것이다.
 
8.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 신라 경주의 북부를 흐르는 북천(閼川)으로 비정된다.
 
필자의 주석: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는 우리 말 ‘아리라’를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 ‘아리라’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했듯이 우리 겨레가 살고 있는 지역을 흘러가는 성스러운 《물길(江)》을 말한다. 특히 ‘아리라’는 신성할 뿐 아니라 대단히 넓고 큰 물길을 말한다. 여기서 ‘아리라’는 곧 ‘아리랑’이라는 이두로도 표기가 된다. ‘아리라’의 고갱이 우리 말 뜻이 이러한데 현재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가 경상북도 경주시 북부를 흘러가는 물길 《북천》으로 비정된다니 어불성설이다. 현재 경주시 북부를 흐르는 물길 정도는 도랑(道浪- ‘길라’ 산골짜기를 막 벗어나 넓지 않은 들을 흐르는 ‘물길’이다.)이지 시내(市奈- ‘벌라’. 산이 없는 벌판지대를 흐르는 물길)도 되지 못한다.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에서 ‘아리’는 그대로 ‘아리(鴨)’ ‘오리(鴨)’을 말하며 “말고 깨끗하며 푸르게 흘러가는 넓고 긴 강”을 말한다. 또 ‘아리’는 《신성(神聖)》하고 좀 더 근원적인 것을 말한다. 또 ‘나(那)’ ‘례(禮)’ ‘하(河)’ 등은 모두 《물》을 말 하는 고갱이 우리 옛 말인 ‘라’를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나타낸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는 “말고 푸르고 깨끗한 물이 흘러가는 넓고 긴 신성한 물길(강)”을 말한다. 따라서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를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북부지역을 흘러가고 있는 《북천》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굳이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를 찾고자 한다면 경상북도 경주시가 아닌 대륙의 어디에서 찾아야 한다.
 
현재 경주시가 옛 신라의 고도였다고 한다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말기의 경주의 인구수와 비교해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과 여타의 사서들을 종합해보면 신라의 도읍지로서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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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까지만 올려준다. 나머지는 다음 장에서 고구려 · 백제 · 신라와 관련된 신공황후기사를 더 많이 올려준다. 그리고 상세히 분석을 하여 그 허구성을 논증해보기로 한다. 굳이 긴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미 우 첨자 주석에서 본문에 대한 해석을 거의 다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논할 것이기에 여기서 그친다.
 
다만 일본서기라는 것이 대개가 신공황후기사와 같이 고대소설 혹은 신화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역사서를 읽는다고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공상소설 같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史記)를 이용하여 배달겨레의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을 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우리겨레를 식민지노예로 부려먹으려는 망상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으니 이를 우리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는 명백하다.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3) 칠지도(七枝刀)
 
칠지도에 관해서는 후일 필자가 자료를 구하여 더 상세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위키백과사전에 올라와 있는 칠지도(七枝刀)에 대한 내용을 전문으로 실어준다. 문장 구성이 좀 매끄럽지 못하지만 원작자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실어준다. 아래 내용은 위키백과사전에 올라와 있는 칠지도(七枝刀)에 대한 설명이다. 참고로 일제식민사학자들은 아래 내용에도 언급이 되어있듯이 칠지도(七枝刀)에 대한 해석도 제 멋대로 하여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주요한 근거로 삼았다.
 
❝ 일본 나라 현[奈良縣] 텐리 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봉안되어 있다. 〈니혼쇼키 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에 백제가 왜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는 74.9㎝로서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 칼이다. 칼의 몸 좌우로 각각 가지칼이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칼몸의 앞과 뒤에는 60여 글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고 그 외곽을 가는 금선으로 둘렀다. 칠지도의 명문은 이소노가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있었던 간마사도모[菅政友]가 1870년대에 처음으로 확인한 이래 지금까지 그 명문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칼의 제작연대를 비롯해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인가 하사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하여 고대 일본이 가야지역을 200년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한 근거로까지 이용되었다.
 
최근의 명문해석에 의하면, 그 제작연대는 369년(근초고왕 24)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태화(泰和) 4년 5월 16일 병오(丙午) 정양(正陽)에 100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후왕에게 나누어 마땅하다. (아무개가 이 칼을) 제작했다"라는 것과 "선세(先世)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었기 때문에 성상(聖上)의 말씀으로 짐짓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백제의 우위를 명백히 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명문에는 백제왕의 '말'을 극존칭인 '성음'이라고 표현한 데 반하여 상대방인 왜왕에게는 경어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형의 하행문서 양식으로 되어 있어 이같은 해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부월(斧鉞)이나 도검(刀劍)의 하사는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주목할 때, 백제왕의 칠지도 하사 동기는 왜왕에 대한 일본열도 내에서의 일종의 대표권을 승인하는, 양국간의 종주·신속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는 백제왕이 그 권력범위를 확대하려는 데 근본 목적이 있었다.
 
한편 칠지도의 형상은 단군신화에 보이는 신단수와 같이 신앙의 대상을 도형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백제왕권이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성, 즉 초월적인 권위 및 사방천하관(四方天下觀)이 반영되어 있으며 천손을 자처한 백제왕의 역할과 권위를 과시하는 주술적 성격의 성구(聖具)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칠지도의 일부로 생각되는 유물이 부여 군수리 절터의 탑기둥 구멍 밑에서 출토된 바 있어 주목된다. ❞(인터넷 위키백과사전 인용)
 
 
4) 일선동조론 · 동조동근론(日鮮同祖論 · 同祖同根論)
 
일제가 왜곡 조작한 임나일본부설은 일제 감점기 학자라는 탈을 쓰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돌격대 선봉대가 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일선동조론 · 동조동근론(日鮮同祖論 · 同祖同根論)의 기반이 된다. 일제는 이 이론을 근거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정당화 합리화시켰다. 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연재한 우리역사 이야기 4편에 자세하게 논의가 되었기에 여기에서 다시 올려준다. 자주민보가 수구세력에 의해 폐간이 된 관계로 본인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를 올린다.
 
에도시대의 국학파(國學派-官學派)의 전통을 이어받아 심화발전시킨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일선동조론(日鮮同組論)은 일제의 조선침략(朝鮮侵略)을 합리화하는데 매우 유용한 이론으로 작용이 되었다. 일제는 그들의 조선침략행위를 일한동역(日鮮同域)의 복고(復古-고토를 회복)라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조선지배(朝鮮支配)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운동과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부당성을 역설하면서 그에 대한 탄압이 정당하다는 합리성을 부여하였다.
 
일선동조론은 일선동종론(日鮮同種論) · 일선동원론(日鮮同源論) · 일선일역론(日鮮一域論) · 일선동역론(日鮮同域論) 등으로도 불린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일본서기 출운신화(出雲神話)에 나오는 아래 내용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스사노오 노미코토(素盞鳴尊)가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니히 모니코토(稻氷命)
 
가 신라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아메 노히보코(天日槍)가 왜에 귀화하였다.“
 
이와 같은 허황하기 짝이 없는 황당 소설보다도 못한 내용을 근거로 조선과 왜는 조상이 같으며 조선은 고대로부터 왜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근대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은 침략이 아니라 복고(復古)라고 하면서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합리화 하였다. 이러한 황당한 역사해석은 일본의 보통 사람들에게까지도 반도조선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역사상(歷史像)을 믿게 했고, 그들의 침략행위에 대해서조차도 응당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일본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즉 근대에 들어서 일본의 조선침략은 침략이 아닌 과거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며 원상복구라는 논리로 정당하게 받아들여졌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만선사(滿鮮史)와 연계가 되어 대동아공영권(일본의 대륙침략 이론을 제공)으로 확대가 되었다. 즉 “일본과 조선뿐만 아니라 만주 · 몽고의 여러 민족까지도 같은 조상 · 같은 근원을 가졌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조선침략은 물론이고 대륙과 몽고를 침략하는 것 역시 정당하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일선동조론은 배달겨레 말살의 근본이념이 되었으며 일본어와 일본사는 국어와 국사로 둔갑을 하였다. 또한 일본은 내지(內地) 이며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나 식민지가 아닌 내지의 연장이라고 강변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인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마음대로 징병하여 대포 밥으로 써먹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조선인들을 마음대로 징용하여 써먹을 수 있는 자기들의 소유물 정도로 여겼다. 일제는 일제강점기 우리의 뿌리를 알 수 있게 하는 성씨 마져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일선동조론의 대표적인 학자는 기다(喜田貞吉) 이다. 3·1운동 직후 기다(喜田貞吉)은 《일한양민족동원론(日韓兩民族同源論)》을 통해서 일선동조론을 되풀이하여 주장하였다. 기다는 더 나아가 이 논문에서 일선동조론을 뛰어넘어 만주와 몽고의 여러민족까지 같은 조상 같은 근원을 가졌다고 주장을 하였다. 기다의 이 이론은 1930년대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주장한 대아시아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대아시아주의”는 <일선동조론> 이나 <만선사관>의 범위를 뛰어넘는 침략논리의 확대 재생산의 결과로, 일제가 침략의 범위를 확대하며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것도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뿌리는 매우 깊고 간악하다. 이 논리는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침략과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정당화 시켜주는 이론으로서 존재하고 작용한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논리였다.
 
 
5) 타율성론(他律性論)
 
타율성론(他律性論)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배달겨레의 역사가 배달겨레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달겨레의 일만년(강단사학에서는 어불성설이라고 하나 이 역시 면밀히 연구를 해야한다.) 역사가 북쪽으로부터 화하족 · 몽고족 · 만주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남쪽으로는 일본 등의 이웃한 외세의 침략과 압제에 의해서 비주체적(非主體的)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역사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조선사(朝鮮史)에 보이는 타율적요소(他律的要素)들을 끄집에 내어 그것을 역사주류로 서술하였다. 반면 조선사의 자율적인 모습은 외면을 하였다. 대외투쟁사(對外鬪爭史)에서 우리의 자주적(自主的)인 역량이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한 사건들 조차 거의 외면을 하거나 애써 과소평가를 했다.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승리를 가능하게 해준 사회경제적(社會經濟的) · 문화적(文化的) 능력(能力)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 조차 하지않았던 것이다. 또 고대사(古代史)에서 조선인(朝鮮人)의 자주성(自主性)과 깊은 관련이 있는 단군(檀君-박달 임금)에 대해서는 “그 설(說)이 황당(荒唐)하여 믿지 못할 것”이라고, 혹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반도 고대사(古代史)의 한 시기를 획득하였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연구로 인정(認定)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우리 고대사를 억지로 공백으로 만들어버렸다.
 
배달겨레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량을 부정하고 타율적(他律的)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진 조선사 특히 고대사는 왜곡될 대로 왜곡이 되었다. 조선(朝鮮)의 역사는 태고적부터 북쪽은 화하족의 식민지로, 남쪽은 왜의 영향아래에서 시작된 것으로 왜곡을 하였다. 즉 북쪽에서는 기자(箕子), 위만(衛滿), 한사군(漢四郡) 등의 화하족세력이 지배를 하였고 남쪽은 신공왕후(神功王侯)의 정벌(征伐)을ㄹ 전후하여 수세기 동안 왜의 지배하(支配下)에 있었다고 하는 인본의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 내지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창작해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사(朝鮮社)의 전개의 논리는 비단 고대사 뿐만 아니라 중·근세사까지 확대적용을 하여 조선사에 있어서 외세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 외세(外勢)에 의하여 타율적(他律的)인 역사가 전개되어왔다고 강변을 하였다.
 
이러한 조선사의 타율성(他律性) 이론(理論)은 만선사관에서 시작되었다. 만선사관(滿鮮史觀)은 만주사(滿洲史)를 화하족의 역사에서 분리시켜 조선사와 한 체계 속에 묶어 당시 중국이 만주에 대한 영토주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논거를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만선사의 체계는 조선사의 독자성(獨自性), 자주성(自主性)을 불가피하게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일체가 외세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이룩되어 조선의 독자적인 것은 없다는 논리로 발전하며 조선인에게는 자주성이 없다는 사고의 논거가 되었다.
 
만선사관이 대표적인 학자는 이나바(稻葉岩吉)였다. 그는 조선이 ㉠ 조선 왕가의 대부분이 만주나 중국계라는 민족 계통상의 동질성. ㉡ 국토와 국경이 중국과 분립할 수 없는 점. ㉢ 경제적으로 중국에 예속된 점 등의 이유를 들어 만선불가분론(滿鮮不可分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조선사의 종속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타율성론을 강조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만선사관론자(滿鮮史觀論者)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조선사의 타율성 이론을 주장한 것이 반도적(半島的) 성격론(性格論)이다. 이 사관의 대표적인 학자는 미나미(三品彰英) 이다. 미나미(三品彰英)는 조선사의 성격을 부수성(附隨性), 주변성(周邊性), 다린성(多隣性) 등으로 규정을 하고 이같은 조선사의 최대 형성요인(形成要人)이 반도(半島)라고 하는 지리적(地理的) 조건(條件)임을 지적하였다. “아시아 대륙(大陸)의 중심부(中心部)에 가까이 있는 부수(附隨)된 이 반도는 정치적(政治的)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반드시 대륙에서 일어난 변동(變動)의 여파를 받음과 동시에 주변 위치 때문에 항상 그 본류(本流)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부수성(附隨性)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같이 주변적임과 동시에 다린적이었던 조선반도(朝鮮半島)의 역사에 있어서는 이 두 개의 반대작용이 동시에 혹은 단독으로 미쳐서 아주 복잡다기한 양상 마져 나오게 하고 동양사(東洋史)의 본류로부터는 벗어나 있으면서 항상 1개 내지는 그 이상의 여러 세력의 여파가 폭주하여 밀려오고, 때로는 2개 이상의 세력의 항쟁하에 시달리고 혹은 하나의 압도적 세력에 지배가 되던가 했다”고 그 주변성 다린성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정치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사(文化史)에도 보여진다고 하였다.
 
반도적 성격은 대외투쟁(對外鬪爭)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대외관계(對外關係), 국내(國內) 정치권형성(國內政治圈形成), 당파성(黨派性), 문화면(文化面)에서도 나타나 소위 사대주의(事大主義)라고 하는 성격(性格)을 형성하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조선사를 소위 사대교린(事大交隣) 외래문화(外來文化) 수용(受容)의 역사로 보고 특히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것은 절대적(絶對的) 존재(存在)라고 생각되는 국외세력에 복종(國外勢力)에 복종하고 그 권위 밑에 번속(藩屬)하고 의존주의에 의해서 국가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외교관계(外交關係)에 있어서는 사대주의가 기본이념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만일 의존하고 있는 린방세력(隣邦勢力)에 변동이 생기면 그것이 국내 정치적세력에 영향을 미쳐 정쟁이 보이고 역사적 전환의 중대 시기가 나타나는 바 조선사상에 나타난 친명파(親明派), 친청파(親淸派), 친일파(親日派), 친로파(親露派) 등이 그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조선사(韓國史) 전개에 대한 불가결한 요건으로 외세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조선사의 분립(分立) 항쟁(抗爭)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대립의 해소도 대부분 타율적(他律的)으로 이뤄졌다고 하며 이런 상황에서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변증법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타율적 요소는 문화창조면에서도 나타나 조선의 문화는 종주국의 것을 모방한 것 외에는 없다는 식으로 강변을하였다. 미나미의 이러한 주장은 조선의 자주성을 말살함으로서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타율성(他律性) 사관론자(史觀論者)들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사를 타율적인 것, 의타적인 것, 숙명론적인 것으로 강조하다 보니 이러한 성격들이 조선신의 일제적인 행동과 사고에도 영향을 미쳐 소위 사대주의(事大主義)라고 하는 고질적인 성격이 조선인(韓國人)의 생리화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병적인 생리는 조선인(한국인)의 의식구조, 행동양식, 등 일상의 모든 것을 구제하는 고질화된 “주의(主義)”로 굳어졌다는 것이며 이 사대주의는 조선인(한국인)의 골수에 사무쳐 민족성(民族性)으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있어서 하나의 관념지주인 타율성론(他律性論)은 그것의 범주에 개념화시킬 수 있는 만선사관(滿鮮史觀), 반도적(半島的) 성격론(性格論), 사대주의론(事大主義論)과 더불어 조선(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모두가 외래세력(外來勢力)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조선문화(韓國文化)의 독자성, 조선인(韓國人)의 자주성 조차도 부인하는 해괴한 이론인 셈이다.
 
조선사에서 자주성이 일단 부정이 되면 그러한 비주체적(非主體的)인 역사(歷史)를 가진 조선민족(韓民族)은 언제나 외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불가피한 것으로 된다. 그런 가운데 일제의 조선에 대한 역할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식민사관론자(植民史觀論者)들이 노린 목적이었다.
 
일제의 어용사학자들 가운데 타율성론(他律性論)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은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과 미나미(三品彰英)였다.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는 조선사는 중국대륙세력 · 만주 방면세력 · 일본세력 등 세 개 세력의 소장(消長)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다고 했다.
 
미나미(三品彰英)은 조선이 전례주의적(典禮主義的)이고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중국,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이고 정복주의적(征服主義的)인 만몽(滿蒙), 주정주의적(主情主義的)이고 애호주의적(愛護主義的)인 일본 등 3대 강국의 영향에 따라 역사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이나 호전적 정복세력인 몽고 · 만주세력에 안기기보다는 주정주의적인 일본에 와야한다고 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합이화하고 정당화시켰다.
 
결론적으로 타율성론이라는 것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합리화하는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이 필요하다는 억지논리를 강변하면서 이의 당위성을 역사왜곡과 문화왜곡에서 찾으려고 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현재를 살아가는 배달겨레의 구성원으로서 심각하게 그 교훈을 찾아야하며 뼈저린 반성을 해야한다. 현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등 모든 분야를 상기한 타율성론과 등치시켜보면 할 말을 잊게 만든다. 그에 대해서는 굳이 구구절절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다만 현 한국사회는 위에서 살펴본 타율성론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아야한다.
 
현재는 오로지 바다 건너 아메리카만 바라다보며 모든 것을 내 맡기고 있으며, 그토록 배달겨레에게 참혹한 상처를 남긴 일본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현재의 한국사회는 일제강점기보다도 훨씬 더 악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민사관 특히 타율성론에 철저히 세뇌가 되어버린 한국사회 치유할 방법은 없는가? 우리 모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그럼 왜 한국사회가 해방이 된지 69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일제가 기획하고 어용사학자들이 작품을 쓰고 각색한 시나리오가 오늘 날 한국사회를 철저히 지배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배달겨레의 얼과 넋은 가진 사람들이라면 모두 힘을 모아 그 극복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래는 이병도의 《풀뭇간의 쇠망치》에서 〖한국인(韓國人)의 민족성(民族性)〗 중 단점을 나열한 부분의 전문을 실어준다. 상기한 타율성론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 가를 비교하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바로 오늘 날 한국의 현실이 있게 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다시 다음에 좋지 못한 유형의 몇 가지를 든다면
 
(1) 량협(量狹)한 성질(性質) ...... 이것은 우리 반도의 지리적 환경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우리나라에는 산악 · 협곡(峽谷) · 분지(盆地)가 많아, 저 넓은 대지에서 자라난 민족에 비하여 기우(氣宇)가 좁고 애중(愛憎)이 심하고, 조그만 일에까지 이해를 따지고 시비를 분석하며 상호배제(相互排除) · 시기 · 질투 등 양협의 습성이 대동단결을 방해하는 사례가 많다.
 
(2) 형식치중의(形式置重)의 습성(習性) ...... 옛날로부터의 허례허식이 이를 잘 증언하고 있다. 근래 헤일 수 없는 빈번한 종종의 기념식과 동상 건립, 내용보다도 외형에 치중하는 대학의 건축물들 ― 근사한 예로 요리상(한식韓食) 위에 벌여 논 잡다한 가짓 수는 왕왕 외국인을 놀라게 한다.
 
(3) 천박(淺薄)한 현실주의(現實主義) ...... 원대한 전망이나 계획보다도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에 구애되어 그때 그때를 미봉해 나가는 일이 우리 생활 가운데 허다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 위대한 종교가 생겨나지 못하고² 미신적인 요소가 지금에까지 잔존한 이유도 여기에 잇다고 나는 본다.
 
(4) 꾸준한 노력(努力)과 근면(勤勉)의 부족성(不足性) ...... 재질에 있어서는 가까운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고 어느 점에서는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적인 노력과 근면은 그들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의 공적사적 생활 가운데 용두사미(龍頭蛇尾)격의 것이 많이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 기인한 바도 있겠지만 대체로 보아 꾸준한 노력과 인내의 결핍에서 초래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위에서 든 기질적성격의 유형 이외에도 더러 다른 것이 있을지 모르나, 대체적으로 그러한 범주를 추출할 수 있지 아니한가 생각된다.
 
상기한 이병도의 <한국인의 민족성>의 내용을 보면 한 마디로 한국인(조선인)은 반도에서 태어나고 살다 보니 성격도 협소하고 겉치레에 치우치는 형식주의적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안목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천박한 현실주의자이며, 게으르고 근면하지 못한 근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 위대한 종교가 생겨나지 못하고】에 있어서는 그가 과연 제대로 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연구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오랜 기간 많은 자료들을 섭렵하고 연구야 했겠지만 그가 접한 자료들이라는 것이 일제가 만들어낸 자료들 이외에 무얼 더 접하고 연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다.
 
위에 예를 든 〖한국인의 민족성〗이 일개 평범한 사람이 한 말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병도가 누구인가? 해방이후 한국의 사학계의 시조와 같은 인물이 아닌가? 그런 이병도가 위와 같은 사고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끌어오고 후학들을 배출하고 그 후학들이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지배하는 현실이라면 오늘 날 남쪽의 현실에 대해서 일면 이해가 간다.
 
 
단기 4347년 2월 28일(서기 2015년 4월 16일)
 
이 용 섭
 
 
다음 회에는 임나일본부설이 얼마나 허황하고 황당한지에 대해서 각 항목별로 치밀하게 논증을 할 것이다. 이번 회에 굳이 《이병도》의 글을 올려준 이유는 바로 그가 주장한 이론이 식민사학을 이은 것이며 그 식민사학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우리겨레의 위대하고 뛰어난 얼과 넋을 다 상실하고 식민지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깨닫고 그 극복방안을 심사숙고해보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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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1. 역주 일본서기. 연민수, 김은숙 외 4인. 동북아역사재단. 2014년 2월 14일.
2. 삼국사기. 김부식 지음, 신호열 옮김. 동서문화사, 2판1쇄. 2007년 7월 20일
3. 광개토왕릉비 신연구. 이형구. 박노희 공저. 동화출판사. 1986년 1월 4일.
4. 광개토왕비의 연구. 이진희 저. 이기동 역. 일조각. 1982년 5월 20일.
5. 강개토왕비문의 신연구. 이종학외 5인 공저. 서라벌 연구소. 1999년 3월 20일.
6.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 이희진. 책미래. 2014년 3월 25일.
7. 거짓과 오만의 역사. 이희진. 동방미디어. 2001년 12월 10일
8. 또 다른 조선의 역사. 정용석. 동신출판사. 2009년 1월 10일.
9. 풀무간의 쇠망치. 이병도. 1972년.
10.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서희건. 조선일보.1982년)
11. 삼국유사(일연 저. 리상호 옮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 연구소. 까치글방. 1999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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