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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출신 東山 김형기선생...이념에 할퀸 '민족해방仁術'

부산출신 東山 김형기선생...이념에 할퀸 '민족해방仁術'

김기진 기자 icon다른기사보기

1997-08-15 [00:00:00] | 수정시간: 2009-02-14 [18:02:48] | 30면

 

 

3.1운동때 시위를 주도하고 또 인술을 펴는 의사이면서 부산.경남지역의 항일거점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부산의 한 애국지사가 광복 52주년을 맞도록 이름 석자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다.

1896년 현재의 부산 북구 삼락동 인근인 유두리(.당시 주소는 양산군 좌이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동산 김형기선생.

그는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지만 문중의 재실에 있는 그의 추모비에는 아직 비문조차 없고 양산에 있는 그의 무덤 역시 시신이 없는 가묘일 뿐이다.

동산의 항일투쟁은 1919년 3.1운동때부터 본격화됐다.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으로 재경유학생회 회장을 맡고있던 그는 민족대표 33인과 연결,학생들을 규합하게 됐고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대를 이끌다 현장에서 일경에 연행됐다.

1년간의 혹독한 옥고끝에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이후 부산으로 귀향,지금의 중구 영주동에 있던 3층 목조건물을 빌려 동산병원이라는 간판을 내건뒤 그 수입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며 부산.경남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애타게 그리던 광복후 이데올로기의 회오리에 휩싸이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친일세력이 해방후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민족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해 나갔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그를 북한의 김두봉과 외사촌간이라는 터무니 없는 이유를 붙여 연행,그후 생사를 알 수 모른다고 유족들은 전하고 있다.

당시 함께 연행됐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독립투사 최천택선생이 이후 "빨갱이임을 자백하라고 강요당하던 동산이 잔혹한 고문에 못이겨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말을 유족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같은 동산의 항일투쟁 사실은 불과 10여년전 우연히 발굴되었다.

지난 89년께 서울에 살고 있는 동산의 증손녀(당시 20세)가 독립기념관에서 자신과 같은 본적을 가진 독립투사이름을 발견하면서 부터.

이후 조카 김덕규씨(59.대명건설기술단 대표.부산 연제구 연산8동)가 동산의 항일투쟁자료 수집에 나서면서 그의 항일투쟁 사실이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김덕규씨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애국지사를 지금껏 방치해 왔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말했다.<김기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