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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1984년 北의 ‘수재물자 지원’ 秘話

 

1984년 北의 ‘水災(수재)물자 지원’ 秘話
김정일이 벌인 ‘동포애를 가장한 정치쇼’에 얽힌 내막

 

金銀星(前 국정원차장)  

[ 2012-09-03, 16:35 ]

 

금번 여름에 한반도를 덮친 태풍을 보면서 1984년도 서울 물난리 때, 북한이 대한민국에 수재물자를 보내겠다며 벌인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이 글이 당시 남한 수재민들을 도우려던 북한 주민들의 따스한 情을 변질시키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수재물자를 보내준 북녁 동포들에게 다시 한번 진정으로 감사 드린다.
 
1984년 9월 초까지 한반도에는 연일 쏟아진 엄청난 폭우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상당했다. 서울의 하루 강우량은 300mm 정도였다. 그 해 8, 9월에는 南北간에 서로 물자를 지원하겠다는 공방전이 치열했다.

8월20일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이 北側(북측)에 생필품을 보내겠다고 제의했으나 북측은 이를 거부했다. 9월8일, 북측으로부터 우리에게 수재물자를 지원하겠다는 제의가 왔다. 당시 안기부는 북측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 우리 측은 9월14일, 韓赤(한적)총재 명의로 ‘수재물자를 가능하면 9월 말까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김정일, 동포애 빙자한 정치쇼로 남측에 된통 물려
 
그런데 북측에서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그들이 8월20일 남측의 제의를 거부했으므로, 남측도 자기들의 제의를 당연히 거부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아무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남한에 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당시 북측이 우리에게 보내겠다는 물자는 쌀 5만 석, 시멘트 10만 톤, 직물 50만 미터, 의약품 등으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재를 입은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수재물자 지원은 북한 후계자인 김정일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동포애를 과시하려고 과도한 정치적 쇼를 벌이다 예기치 않는 남측의 수용으로 된통 물려버린 것이다.
 

김정일, “북한 보위부와 안기부간의 전쟁”이라며 난리
 
당황한 김정일은 全 행정기관과 지방官署(관서)에 “수재물자 인도, 인수는 북한 보위부와 남조선 안기부와의 전쟁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코 최단시간 내에 물품을 징발하라”고 전통을 내리고 공문을 보내는 등 난리를 쳤다. 실제 북측은 수재물자를 전시동원에 준하여 징발함으로써 남북한 간의 동원, 수송, 인도, 인수 능력을 비교, 평가하는 기회로 활용코자 했다. 당시 우리 측은 남산 적십자사 회의실에 20여 관계기관 국과장(局課長)들로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하고 수재물자 인수와 관련한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했다.
 

수재물자 지원을 戰時(전시) 군사작전처럼 전개
 
저들은 물자를 보내겠다고 통보만 해 놓고 인도 일시, 장소, 인도 방법 등 어느 것 하나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매 과정을 戰時 작전처럼 전개하는 등 우리를 골탕 먹이는 데에 몰두했다. 동시에 물자의 인도시기를 늦추려는 底意(저의)도 깔려 있었다. 예를 들어, 폭풍우가 심하던 날 밤중에 판문점 연락사무실에 서울과 평양을 연결하는 팩스를 익일 아침까지 설치하라고 해 폭우 속에서 밤새도록 라인을 깔고 팩스를 설치한 적이 있다.
 

물자 수송할 ‘자유의 다리’ 붕괴 위험으로 고민
 
그런데 우리 측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저들이 물자를 판문점을 통해 모두 보낸다면 판문점에 인수할 수 있는 공간이 몇 백 평에 불과해 인계, 인수작업에 차질이 예상되는데다 이동루트가 자유의 다리 한 곳 뿐이라 다리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붕괴될 위험성이 크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저들에게 알려주고 협조를 요청하면 김정일의 지시로 남북한간 속도전에서 기필코 승리를 해야 하는 저들에게 우리 취약점만 노출시킬 것이 뻔했다. 만약 '자유의 다리'가 무너진다면 수습 불능의 사태가 일어나지만 저들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어도 대안이 나오질 않았다. 우리는 저들의 계획을 떠보려고 수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인도 시점과 방법 등에 대해 전혀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안기부에서 입수하는 정보와 판단에 의존하여 대응 방법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일의 뜻대로 南北 정보기관간 정보전 치열해져
 
당시 본인도 안기부 측 요원으로 정부 테스크포스에 나가 있었는데 모든 기관들이 안기부 정보에 의존하여 대책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했다. 우리 측 테스크포스는 물자 인수 문제 외에도 인수 후 배분 방법, 남북 근로자들에 대한 편의지원, 雙方(상방) 인력의 분계선 越線(월선)에 따른 안전 보장, UN司와의 협조 등 산적한 문제를 빈틈 없이 처리해야 했다. 북측 정보기관들의 밤낮없이 물자를 징발하는 활발한 움직임도 포착되었다. 다행히 안기부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북측의 움직임에 대해 정확하고 적시성 있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김정일의 말처럼 남북 정보기관간 바야흐로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해외 출항중인 무역선들을 긴급 회항시킨 北 의도 간파
 
그러던 중 안기부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갑자기 북한 당국에서 해외 출항중인 3~4개의 중형 무역선들에게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신속히 回航(회항)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니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북측이 시멘트를 판문점을 통해 보낼 경우, 9월30일 내로 엄청난 수량의 포대를 만들어 포장할 수 있는 능력과 수송차량에 여유가 있겠는가에 관심을 보였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역선을 回航하라는 것은 포대 제작 및 포장 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해당 선박들을 분석한 결과, 시멘트를 벌크로 이동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대형 수송선이었다. 그렇다면 뻔한 것이다. 가장 걱정했던 시멘트가 육로가 아닌 선박을 통해 온다면 인수에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정보전·속도전 등 모든 면에서 대한민국의 優位(우위) 드러나
 
우리 예측대로 북측에서 시멘트는 선박으로 인도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판문점으로 쌀과 織物(직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인수에 차질을 빚게 하려던 저들의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北의 수송차량이 노후되어 이동 속도가 느린데다 우리가 컨베이어 벨트로 실시간대로 물자를 인수함으로써 오히려 우리 근로자들은 일손을 놓고 저들 수송차량을 기다리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저들은 처음 본 컨베이어 벨트에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우여곡절 끝에 9월29일, 판문점을 시작으로 9월30일, 각각 인천항과 북평항으로 수재물자가 도착하였다.
 

北 동포의 모습에서 동족애 느껴
 
北 근로자들은 똑같은 새 손목시계를 차고 시계를 보라는 듯 왼쪽 팔목만을 모두 걷어 올리고 일을 했다. 우리가 간식으로 사과를 주자 美製(미제)라 크다면서 구태어 자기들이 가져온 사과를 먹었다. 크기가 어린아이 주먹 정도로 조그마했다. '왜 그리 작냐'고 하자 비료를 주지 않고 주체사상으로 키운 것이라 영양분이 우수하다면서 우리들에게도 먹으라고 권했다.
 
우리가 준 빙과류가 가장 인기가 있었는데 꼬깔형으로 된 빙과류는 먹을 줄을 몰라 뾰죽한 아래 꼭지를 뜯어 구멍을 내어 빨았다. 수송선 냉장고에는 소 머리통을 하나씩 냉동 보관해 두었다. 우리들에게 냉장고를 열어 소 머리통을 보여주면서 자기들은 매일 쇠고기를 먹는다고 자랑을 했다. 우리나라 버스에 쓰여진 영문자를 보고는 모두 미국에서 만든 차라고 우겨대기도 했다. 北의 노후된 수송차량들은 모두 페인트가 칠해져 새 차처럼 꾸며져 있었으나 여기저기가 썩고 녹슨 것을 속일 수는 없었다. 
 

북한 동포들에게 미안한 마음
 
저들이 보낸 쌀은 米質(미질)은 괜찮다는 평이었으나 직물과 의약품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지도자들의 정치쇼에 휘말려 굶주림에 지치고 못 입는 동포들에게 너무도 큰 부담을 안겨 준 것이다. 우리는 시멘트도 남아도는 형편이라 시골 도로 포장용으로 사용했다. 당시 북한 근로자들에게는 약 50만원 규모로 여러 가지 家電(가전)제품 등을 큰 백에 넣어 모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으나 北 당국에서 모두 회수한 것으로 알고 있다.
 

北 지도자여, 주민들이 받는 고통을 아는가?
 
북한 당국은 며칠 전 우리 사회단체들이 보내겠다는 수재물자를 선별적으로 받겠다고 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고위 간부들이야 물난리와 상관 없이 잘 먹고 잘 입으니 상관 없겠지만 굶주림에 고통 받는 불쌍한 주민들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주민 편에서 통 큰 정치를 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1984년 남북간 물자 원조 攻防戰에서 당신들의 알량한 자존심이 불러 일으킨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반성하길 바란다. 흔쾌히 수재물자를 받아들였던 남측 당국과 같은 배포가 필요하다. 입만 열면 ‘같은 동족,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그래서야 되겠는가? 이번 물난리를 통해 28년 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출처: 조갑제닷컴

http://www.chogabje.com/board/column/view.asp?cpage=1&C_IDX=46880&C_CC=BC

 

 

[관련기사]

[어제의 오늘]1984년 북한의 대남 쌀 지원 

서의동기자 phil21@kyunghyang.com
 
ㆍ첫 물자교류… 남북 해빙 ‘물꼬’

1984년 8월31일부터 4일간 서울·경기·충청 일원에 내린 집중호우로 서울지역이 최악의 홍수사태를 겪었다. 한강이 위험수위인 10.5m를 넘어서면서 한강대교 등 4개의 차량통행이 전면통제됐고, 161개 지역 2만2500가구에서 9만38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저지대인 강동구 풍납동과 성내동 등은 주택들이 물에 잠기며 ‘수중고도’가 돼 버렸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지는 대형 수재였다. 전국적으로는 사망및 실종 189명, 이재민 35만1000명, 부상 153명에 피해액은 1333억원에 달했다.

남한의 수해소식을 전해들은 북한은 9월8일 방송을 통해 수해지역 이재민들에게 쌀 5만석,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남측은 이 제의를 수용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했다. ‘정치공세’에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내부에서 적지 않았다. 국제 적십자사의 구호물자 제공제의조차 사양한 터였고, 한해 전인 83년 10월9일 버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테러의 앙금도 가라앉지 않았던 시점이다.
 

하지만 정부는 대남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로서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개최를 앞두고, 한반도의 평화분위기 조성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사는 북한의 제의가 온 지 6일 만인 9월14일 수락성명을 발표했고, 이어 18일 대한적십자사 이영덕 부총재와 북한적십자사 한웅식 부위원장 등이 판문점에서 실무접촉을 가졌다. 북측은 처음에 자동차와 배편으로 서울·속초·부산에 구호물자를 수송하고 북한기자들이 수해지역을 직접 방문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결국 판문점과 인천·북평(동해)항으로 최종 타결됐다. 이에 따라 9월29일부터 10월4일까지 육·해로를 통해 북한 적십자의 수해물자가 전달됐고, 남측은 담요, 카세트 라디오·손목시계·양복지 등 18개 품목이 든 선물가방 848개를 북한 대표들에게 답례품으로 증정했다.

북한쌀은 수해지역 주민들에게 33㎏에서 66㎏까지 분배됐다. 쌀이 좋지 않다고 떡을 해먹는 이들도 있었지만 북녘 쌀로 제사를 지내겠다는 실향민들도 있는 등 반응은 다양했다. 북한물자가 인도되던 마지막 날 일간지들은 ‘위장술책 속게 되면 남북대화 공전한다’는 대공표어를 싣기도 했다.

북한 적십자사의 수해물자 지원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간 물자교류로 기록됐고,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구실을 했다. 물자가 인도된 지 8일 만인 10월12일 남측은 신병현 당시 부총리가 남북경제회담 개최를 제의하며 화답했다. 이듬해인 85년에는 73년이후 중단됐던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12년 만에 재개됐으며 9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