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에 실시한 '가야학아카데미 -한옥의 멋'에서 한옥문화원장 신영훈원장님의 가야학아카데미 "한옥의 멋(건축사) " 강의자료입니다.
한옥의 아름다움
木壽 申 榮 勳
(www.hanok.org)
1.
“이 땅에 살고 있으니 땅을 잘 알 터이고 風土에도 익숙하였으리니 그렇다면 무엇을 아름답다고 하느냐 ?”고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묻는다. 내겐 그런 질문이 참 난감하다. 어디서 아름다움을 함양하느냐의 의문이 함께 풀려야 대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 모인 분들은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함양하였는지--- 모르겠다. 누가 대답할 수 있으려는지.........?
차를 즐기는 분들은 차 마시는 자리의 멋을 감안하면서 아름다움을 분별하는지도 모르겠다. 신선이 차를 끓여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마시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보면 그것이야말로 참 아름다운 광경으로 느껴진다. 잘생긴 山水 속에서 호연한 풍치 속에 다정하게 앉아 새로 볶은 차의 맛을 즐기고 있다면 가서 한 몫 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얼마나 좋으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구태여 다른 시설이 주변에 없어도 그만이다. 천연으로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산에서 태어나 산천정기를 받고 산에 들어가 도를 이루며 죽어서 산으로 들어가 山所에서 긴 잠을 잔다. 그런 산소도 뒷산을 닮았다. 생전의 집이 뒷산을 닮은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니 우리는 산에서 아름다움을 익혀왔고 우리 몸에 잠재의식으로 베어 있어서 무슨 자극이 있어 무엇인가 만들다 보면 저절로 산의 신비와 정취를 닮은 솜씨로 발휘되곤 한다.
다른 그림에서는 소소한 바람이 부는 산곡간에 정자를 짓고 들어앉아 두 신선이 동자가 끓여다 주는 차를 마시고 있다. 山水間에 정자가 천연스럽게 어울려 있어서 거기서 차를 마신다는 일이 전혀 동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집을 짓되 주변의 景槪와 어울려 본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면 집 지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작품을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본래의 천연에 인간이 새로운 것을 더할 까닭은 없지만 한 정자를 조촐하게 들여놓으므로 해서 주변이 더욱 정리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되었다면 그런 정자 지은이를 찬탄하는 일은 지나침이 없다.
2.
은사이신 崔淳雨(작고하시기까지 國立中央博物館長)선생님께서 찬탄하신 건물 중에 창덕궁 후원의 演慶堂이 있다. 규모가 당당하고 격조 있는 궁내의 여러 건축에 비하여 백성들이 사는 집의 한 第宅의 모습으로 간결하게 지었다. 이 집 사랑채의 堂號가 演慶堂이다. 하얀색 화강암으로 다듬은 세 벌 대의 기단 위에 정갈하게 세운 一자형 평면의 조촐한 팔작 기와지붕의 단층집이다. 부엌과 사랑방 2 간에 대청 2간, 그리고 건넌방 자리에 마루 깐 內樓를 들였다.
손님이 와서 즐기다 담소하면서 茶라도 한 잔 나누려면 여름철엔 이 내루가 십상이다. 三面의 창을 활짝 열어 놓으면 밤이면 달빛도, 별님도 초롱하고 바람도 시원하고 물소리도 명랑하여 거칠 것이 없는 지경이다.
![](http://pds14.egloos.com/pds/200901/25/70/a0107670_497bfcba16b3d.jpg)
같은 사랑채 중에는 창경궁 소속의 樂善齋도 있다. 이 사랑채도 다른 궁의 전각에 비하면 조촐한 것인데 연경당과 달리 內樓가 앞으로 한 간 튀어나와서 평면은 ⌐자형이 되었다. 내루는 높은 주초가 기둥처럼 서서 떠받치게 만들어 졌는데 주초석 상단에 기둥뿌리에 끼운 여모가 있고 그것을 받쳐주는 작은 부재에는 피어오르는 구름을 새겼다.
아주 질박한 구름이지만 그 구름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 “구름 위에 앉았으니 곧 자네는 神仙인 게야” 한 가닥 작은 구름으로 해서 그 위에 올라앉는 인물은 신선대접 받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그러니 차라도 한 잔 마신다면 그야말로 소슬대문에 크게 써 붙였듯이「長樂門」의 長樂을 누리는 경지에 닿는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다. 인격을 함양한 인물이라면 호연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長壽하기를 비는 인간 속성의 극치인 신선이 되어 보는 安樂을 맛보게 된다.
이런 설정에는 전혀 假飾이나 無理가 없다. 천연의 精髓인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도를 닦으며 인격을 함양하였으니 자연을 즐길 자격이 충분하므로 신선의 칭호를 얻을 수 있고 그런 인격체인 小宇宙가 中宇宙인 집에서 아름다움을 結晶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등의 교묘함이나 호들갑스러움이 발 부치기 어렵다.
중우주인 살림집 지으면서는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지나친 加飾도 없고 아기자기한 재치도 없다. 다른 나라 집과 다른 점이다. 그래도 소소함이 있다. 그리고 덤덤한 산에도 위치에 따라 변화가 있듯이 조금씩의 변화가 있다. 남의 눈에 잘 뜨이지 않을 정도의 솜씨여서 무심코 지나가면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문짝이나 창의 살대를 바꾸어 다는 변화를 추구한다.
기둥마다에 詩句를 써서 달아두고 즐기기도 한다. 실증 나면 바꾸어 달 수 있는 柱聯이 詩集인데 자작시를 써도 좋고 남의 좋은 시를 써도 무방하다. 그러니 기둥마다 글자가 다를 밖에 없다. 이것도 작은 변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3.
內樓를 차 마시는 장소라는 생각에서 茶亭으로 손꼽는 사람도 있다. 우리 한옥에는 일본식의 茶室은 따로 없다. 이미 존재하는 공간을 활용하면 되었지 좀스럽게 한 쪽 귀퉁이에 조촐한 집을 별도로 짓고 의도적으로 거기에서 茶會를 여는 그런 마련은 없었던 것 같다. 다분히 의도적인 별도의 시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는 의미라고 해석된다.
차 마시며 즐길 수 있는 정자들은 많다. 그러나 그 곳은 주변 景槪를 즐기는 취미가 우선이지 茶室이란 별도의 개념은 지니지 아니 하였다.
연경당 가는 길에 愛蓮亭이라는 자그마한 정자가 있다. 반듯한 연당 北岸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 사진작가에게 애련정을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며칠 뒤에 들고 온 사진은 연당 남쪽에서 건너다 보고 찍은 사진이었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사진작가들은 그런 안목이다.
정자 지은 사람이나 거기 정자를 짓도록 부탁한 건축주는 蓮塘 이편에서 건너다 보자고 지은 것이 아니라 정자에 들어가 앉아 내다보려고 지었다. 내다보면서 아름다움을 즐기는데 정자의 건축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만 아름답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나가는 길손의 안목이지 들어가 앉아 즐기는 주인의 인식과는 다르다.
한국인의 아름다움은 주인에게서 비롯된다. 집은 그 襟度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한 예를 들어본다. 대문은 주인이 나가자고 만드느냐? 들어가기 위하여 만드느냐?고 물으면 지금까지의 경우는 대부분 “들어가기 위하여” 아니면 출입하기 위하여“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집 대문의 문빗장은 안쪽에 설치되어 있다. 부엌과 곳간의 문짝말고는 문빗장을 안에 설치한다. 주인이 열고 나가는데 편의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현대인들은 이 점이 쉽지가 않다. 서양식 편리한 문짝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옥의 아름다움의 탐색에서는 서구적인 식견이 오히려 방해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란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내용일 수가 있다. 한옥의 또 하나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이치를 천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다는데 있다. 거기에 한옥은 사는 사람의 정서와 함께 사람 몸이 지닌 체격이 자연스럽게 용납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인체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다 난방과 냉방을 할 수 있는 기능도 구비되어 있다. 물론 예의와 염치를 가릴 수 있는 시설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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