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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해 수로왕릉 내 가락유물관

 

김해시 서상동 수로왕릉 내 가락유물관

 

 

수로왕릉 내 왼쪽으로 가면 가락유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유물관에는 가락사 연표, 고서, 고문서, 전향진설도, 제례관복, 가야갑옷, 토기 등이 있으며

김해 가락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락사 연표

 

 

생활토기, 이형토기,  대표적인 가야토기들

 

 

청동제 의기류, 말 갖춤새, 석기류 등

 

 

 

 

대축복

대축복은 제례복시 규정에 따라 대제시 식견이 높은 원로종친중에서 목욕할때 입는 복식이며

집례복은 원로종친중 집례의 소임을 맡아 진행을 총괄하는 분이 입는 복식이다.

 

 

 

 

 

 

 

 

 

 

 

 

 

 

가야의 덧널무덤

2세기 후반경 영남지역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덧널무덤 방형에 가까운 긴 네모꼴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각재나 판재로 덧널을 만들고 널없이 시신과 치례거리를 매장하는 구조였다.

4세기가 되면서부터는 여러가지 부장품과 순장자를 매납하는 딸린덧널이 나타나는데,

이로보아 사회적으로 계급의 발생과 부의 편중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묘지양식인 덧널무덤의 모형과 설명문이 고대 가야인들의 장례문화를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 갑옷과 투구

 

 

가야의 차양있는 투구와 금동장식 투구

 

 

은장환두대두, 삼엽환두여자대두, 용-봉황장식큰칼

 

 

가야의 갑옷

가야의 갑옷은 4세기부터 나타나는데 기다란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판갑과

조그만 철판을 가죽으로 엮어 만든 철갑으로 나누어진다.

철갑은 착용시 판갑보다 몸의 움직임이 쉬워 말을 타기가 편한데

 가야의 철갑 제작 기술은 기마술과 함께 고구려에서 전례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의 신라와 백제에 비해 그출토 예가 많아 가야의 우수한 철기 제작 기술을 짐작할  수 있다.

 

 

김해대성동 고분군 제39호분(1991년 사적 제341호)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토광묘),

덧널무덤(토광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가야의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고,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어,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서역 아유타국에서 수로왕비 허황옥이 가락국에 올때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경상남도 문화재 제227호)

 

 

가락유물관 앞에 조성된 연못

 

 

 

 

 

신라가 성장할 무렵, 낙동강 유역에서는 가야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작은 나라가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가야는 처음에 김수로왕이 세운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뛰어난 철기문화를 일으켰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힘을 잃은 후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힘을 모았으나

하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신라에 정복되었다.

이처럼 가야는 큰 나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발전시켰다.

가야 문화는 신라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일본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출처 : A Bird Of Paradise
글쓴이 : 극락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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