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와 함께 떠난 옛 길
동영상 파일 : 대동여지도와 함께 떠난 옛 길
동영상 파일 : 대동여지도와 함께 떠난 옛 길
1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지도로써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 지도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사용하고자 한다.
땅을 향한 평생의 집념. 그것은 한 장의 위대한 지도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바로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인데요,
가로 3.8미터, 세로 6.7 미터의 거대한 크기의 이 지도에, 그는 평생을 걸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위해 필요했던 목판은 모두 60여 개. 남북을 동서로 끊어 모두 스물 두 책에 나누어 담았습니다. 힘차게 표시된 산줄기와 정밀하게 그려진 도로와 하천,  그리고 한 눈에 들어오는 기호들까지. 대동여지도는 여러 목판본 지도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추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탄생 이후 벌써 145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와 함께 지금부터 옛 길을 따라 여행을 떠나 보려고 합니다. 때는 철종 12년인 1861년.
조선의 모습을 담은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졌다. 대동’이란 조선, 곧 우리나라를 달리 부르는 말이며, 여지’는 ‘수레같이 만물을 싣는 땅’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대동여지도란, 우리나라 땅 덩어리를 그린 지도를 말하는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지리.지식의 보급을 위해 목판본으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여기 동래를 떠나 한양까지 여행을 해야 하는 관리가 있다. 그는 새로 얻은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면서 이번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동래에서 출발하여 문경, 수원을 거쳐 한양에 이르는 것이 그의 계획. 조선 시대 물길은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는데, 지도상에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뱃길이었다. 따라서 동래에서 문경까지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문경 가까이에 이르면, 지도상의 물줄기는 단선으로 바뀐다. 지금은 도로로 변해 버렸지만, 옛날 이곳은 배들이 멈춰야하는 종착지로, 나루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문경에 도착한 관리는 하루를 묵고 한양으로 떠나야 하는데, 이때부터도 대동여지도는 유용하다. 주요 도로 상에 있는 역참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문경 새재를 거쳐 육로를 따라 한양까지 가기로 했다. 이때부터는 지도상에 표시된 직선만 따라가면 되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어떤 형태의 도로이건 모두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흑백으로 인쇄되어야 하기 때문에 곡선으로 표현되는 강줄기와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10리마다 찍힌 방점 때문에 이동 거리를 미리 알 수 있었는데, 문경에서 한양까지 계산된 거리는 약 350여리.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손으로 표시되는 하천과 도로에 구분이 매우 중요하였는데요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하고 하천은 곡선으로 표시하여서 구분을 하였습니다 도로위에는 방점이 찍힌것이 매우 흥미로운데요 방점 하나 하나에 거리는 십리를 나타냅니다 평야지역에서는 그 간격을 넓게 하고 산악 지역에서는 그 간격을 좁게 해서 그 간격의 의미를 알게하였습니다
특히, 험난한 산줄기들로 가득한 문경 새재의 주변 지역을 보면 유난히 굵고 검게 표시된 산줄기들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그 가운데로 직선으로 뻗은 도로가 나있다. 실제 지역과 지도를 비교해 보아도 주변의 험난한 산들 가운데 비교적 완만해 보이는 길이 지도상의 교통로로 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것은 불과 145년 전. 그 동안 당시 있었던 것들이 없어지고, 없었던 것들이 새로 생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지형도 많이 변했습니다. 아마도 고산자 김정호가 있었더라면 새롭게 바뀐 부분을 목판에 수정 작업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텐데요, 동래에서 문경새재까지. 대동여지도와 함께 했던 여정은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음에 어떤 지형이 나타날 지, 어느 정도만 가면 목표 지점이 나오는지 등등  대동여지도에 담겨있는 방대한 양의 정보 때문이죠. 자, 이제 문경 새재를 지나 온 관리는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수원에 도착합니다. 수원에는 우리나라 건축의 백미 화성이 있다.대동여지도 에는, 수원이라는 지명 둘레로 동심원이 두 개 둘러쳐져서 이곳에 성곽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수원 바로 북쪽에는 영화역이 있었다. 역은 전국의 주요한 교통로 곳곳에 설치되어 국가의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오늘날의 지도와 같이 기호를 사용하여 각종 지리 정보를 표현하였다 다양한 기호를 활용함으로써 목판본으로 기획된 대동여지도의 제작을 손쉽게 했을 뿐만아니라 지도를 읽는 사람이 지리정보를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다 대동여지도에는 모두 21종류에 달하는 기호가 사용되었는데 행정과 군사항목에 대한 기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동여지도 에는 제작당시의 지형과 행정구역 뿐아니라 옛날 읍터, 옛 진보, 옛 산성 등 당시에는 이미 사라진 역사적인 흔적들까지 함께 기록하여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이렇게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 수록해 놓은 지명은 모두 13, 000여 개에  이른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지방의 여러 고을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그에 더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군사적인 목적을 띄었다는 것입니다 김정호 선생은 대동여지도의 옛 진보와 산성의 위치를 정확히 표기함으로써 일단 유사시에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계획을 수립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유물 한 조각을 통해서도 선조들의 삶과 생활을 유추해 냅니다. 대동여지도는 145년 전의 우리 국토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거대한 유물입니다. 비록 많은 것들이 변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이 대동여지도만 있으면 전국 어느 곳이든 수월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동래에서 떠나 문경을 거쳐 수원까지 이른 길.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한양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통해 보는 한양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그 마지막 여정이 기대됩니다.
태조 이성계의 천도 후 6백여 년 동안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 대동여지도에는 일종의 서울지도인  경조오부도와 도성도’가 실려 있어 조선의 수도인 한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먼저, ‘도성도’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한성의 중심부를 그린 지도로 궁궐, 관청, 도로 등 성곽 내부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에 비해, 표시 범위가 보다 넓은 ‘경조5부도’에는 도성을 포함한 한성부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도성도와 달리 산줄기와 물줄기 등의 지형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경조5부’란 태조 3년인 1394년, 수도 한성에 설치한 행정 구역과 그 관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성을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어 관청을 설치하고, 그 부내의 도로, 택지 등을 관리하도록 한 것. ‘경조5부도’에는 도성을 중심으로, 북쪽 삼각산에서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행정과 지형에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 있다. 후세 사람들은 대동여지도를 가리켜‘우리 민족 전통 지도의 금자탑’이라 말하는데요,
그 평가에 어울리게 대동여지도에는 기존까지 제작되었던 각종 지도들의 모든 장점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한 인간의 집념과 노력, 그리고 우리 국토의 생생한 모습과 살아있는 역사 등이 담긴 대동여지도. 그것은 곧 조선 후기의 국토 모습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을 향한 평생의 집념. 그것은 한 장의 위대한 지도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바로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인데요,
가로 3.8미터, 세로 6.7 미터의 거대한 크기의 이 지도에, 그는 평생을 걸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위해 필요했던 목판은 모두 60여 개. 남북을 동서로 끊어 모두 스물 두 책에 나누어 담았습니다. 힘차게 표시된 산줄기와 정밀하게 그려진 도로와 하천,  그리고 한 눈에 들어오는 기호들까지. 대동여지도는 여러 목판본 지도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추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탄생 이후 벌써 145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와 함께 지금부터 옛 길을 따라 여행을 떠나 보려고 합니다. 때는 철종 12년인 1861년.
조선의 모습을 담은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졌다. 대동’이란 조선, 곧 우리나라를 달리 부르는 말이며, 여지’는 ‘수레같이 만물을 싣는 땅’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대동여지도란, 우리나라 땅 덩어리를 그린 지도를 말하는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지리.지식의 보급을 위해 목판본으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여기 동래를 떠나 한양까지 여행을 해야 하는 관리가 있다. 그는 새로 얻은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면서 이번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동래에서 출발하여 문경, 수원을 거쳐 한양에 이르는 것이 그의 계획. 조선 시대 물길은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는데, 지도상에 쌍선으로 표시된 물길은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뱃길이었다. 따라서 동래에서 문경까지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문경 가까이에 이르면, 지도상의 물줄기는 단선으로 바뀐다. 지금은 도로로 변해 버렸지만, 옛날 이곳은 배들이 멈춰야하는 종착지로, 나루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문경에 도착한 관리는 하루를 묵고 한양으로 떠나야 하는데, 이때부터도 대동여지도는 유용하다. 주요 도로 상에 있는 역참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문경 새재를 거쳐 육로를 따라 한양까지 가기로 했다. 이때부터는 지도상에 표시된 직선만 따라가면 되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어떤 형태의 도로이건 모두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흑백으로 인쇄되어야 하기 때문에 곡선으로 표현되는 강줄기와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10리마다 찍힌 방점 때문에 이동 거리를 미리 알 수 있었는데, 문경에서 한양까지 계산된 거리는 약 350여리.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손으로 표시되는 하천과 도로에 구분이 매우 중요하였는데요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하고 하천은 곡선으로 표시하여서 구분을 하였습니다 도로위에는 방점이 찍힌것이 매우 흥미로운데요 방점 하나 하나에 거리는 십리를 나타냅니다 평야지역에서는 그 간격을 넓게 하고 산악 지역에서는 그 간격을 좁게 해서 그 간격의 의미를 알게하였습니다
특히, 험난한 산줄기들로 가득한 문경 새재의 주변 지역을 보면 유난히 굵고 검게 표시된 산줄기들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그 가운데로 직선으로 뻗은 도로가 나있다. 실제 지역과 지도를 비교해 보아도 주변의 험난한 산들 가운데 비교적 완만해 보이는 길이 지도상의 교통로로 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것은 불과 145년 전. 그 동안 당시 있었던 것들이 없어지고, 없었던 것들이 새로 생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지형도 많이 변했습니다. 아마도 고산자 김정호가 있었더라면 새롭게 바뀐 부분을 목판에 수정 작업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텐데요, 동래에서 문경새재까지. 대동여지도와 함께 했던 여정은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음에 어떤 지형이 나타날 지, 어느 정도만 가면 목표 지점이 나오는지 등등  대동여지도에 담겨있는 방대한 양의 정보 때문이죠. 자, 이제 문경 새재를 지나 온 관리는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수원에 도착합니다. 수원에는 우리나라 건축의 백미 화성이 있다.대동여지도 에는, 수원이라는 지명 둘레로 동심원이 두 개 둘러쳐져서 이곳에 성곽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수원 바로 북쪽에는 영화역이 있었다. 역은 전국의 주요한 교통로 곳곳에 설치되어 국가의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오늘날의 지도와 같이 기호를 사용하여 각종 지리 정보를 표현하였다 다양한 기호를 활용함으로써 목판본으로 기획된 대동여지도의 제작을 손쉽게 했을 뿐만아니라 지도를 읽는 사람이 지리정보를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다 대동여지도에는 모두 21종류에 달하는 기호가 사용되었는데 행정과 군사항목에 대한 기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동여지도 에는 제작당시의 지형과 행정구역 뿐아니라 옛날 읍터, 옛 진보, 옛 산성 등 당시에는 이미 사라진 역사적인 흔적들까지 함께 기록하여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이렇게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 수록해 놓은 지명은 모두 13, 000여 개에  이른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지방의 여러 고을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그에 더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군사적인 목적을 띄었다는 것입니다 김정호 선생은 대동여지도의 옛 진보와 산성의 위치를 정확히 표기함으로써 일단 유사시에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계획을 수립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유물 한 조각을 통해서도 선조들의 삶과 생활을 유추해 냅니다. 대동여지도는 145년 전의 우리 국토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거대한 유물입니다. 비록 많은 것들이 변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이 대동여지도만 있으면 전국 어느 곳이든 수월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동래에서 떠나 문경을 거쳐 수원까지 이른 길. 이제 마지막 목적지인 한양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통해 보는 한양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그 마지막 여정이 기대됩니다.
태조 이성계의 천도 후 6백여 년 동안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 대동여지도에는 일종의 서울지도인  경조오부도와 도성도’가 실려 있어 조선의 수도인 한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먼저, ‘도성도’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한성의 중심부를 그린 지도로 궁궐, 관청, 도로 등 성곽 내부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에 비해, 표시 범위가 보다 넓은 ‘경조5부도’에는 도성을 포함한 한성부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도성도와 달리 산줄기와 물줄기 등의 지형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경조5부’란 태조 3년인 1394년, 수도 한성에 설치한 행정 구역과 그 관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성을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어 관청을 설치하고, 그 부내의 도로, 택지 등을 관리하도록 한 것. ‘경조5부도’에는 도성을 중심으로, 북쪽 삼각산에서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행정과 지형에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 있다. 후세 사람들은 대동여지도를 가리켜‘우리 민족 전통 지도의 금자탑’이라 말하는데요,
그 평가에 어울리게 대동여지도에는 기존까지 제작되었던 각종 지도들의 모든 장점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한 인간의 집념과 노력, 그리고 우리 국토의 생생한 모습과 살아있는 역사 등이 담긴 대동여지도. 그것은 곧 조선 후기의 국토 모습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