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당산 [堂山] 수호신이 있다고 하는 마을 가까이의 산이나 언덕. 장소 : 마을 인근 산 또는 언덕 건립목적 : 마을의 안녕을 비는 민간신앙의 대상 당집은 원시 신앙에서 산신 또는 마을의 수호신 등을 모셔놓은 집이며, 서낭당은 서낭신( 땅과 마을을 지키는 신 )에게 제사하는 제단을 뜻합니다 신당 [神堂] 민간신앙에서 신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집 당집 또는 당이라고도 한다. 각각의 특색에 따라 몇 종류로 구분되는데 서울의 할미당이나 국사당(國師堂)처럼 굿판을 벌이는 굿당, 약수터나 영천(靈泉)에 세워진 용신당(龍神堂), 산신도를 모셔놓은 산신각(山神閣), 무당의 무구(巫具)나 무신도(巫神圖)를 모셔놓은 장소, 촌락공동체의 수호신당이 있다. 이 가운데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호신당의 비중이 가장 커서 신당이라고 하면 흔히 이것을 가리킨다. 수호신당은 8·15광복 이후 동제당(洞祭堂)으로 통칭하였으나 지방마다 차이가 있어 경기·충청지방에서는 산신당 또는 서낭당이라 하며 강원지방은 서낭당, 영호남지방에서는 당산, 서울 한강변 마을에서는 부군당(府君堂)이라고 한다. 동제당은 대개 신목(神木)만 있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나 간혹 신목 옆에 작은 사당을 지어놓은 경우도 있다. 주로 수령이 많은 거대한 소나무나 느티나무가 신목으로 모셔지는데 여기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 나무를 베거나 해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신당에 모셔진 신 가운데에는 남신보다 여신이 월등히 많은데 이는 대지의 풍요로움을 빌던 오래 전 농경사회의 풍요 여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 ||
![]() | ||
![]() | ||
![]() | ||
| ||
서낭당(城隍堂) [정의]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 [이칭] 한자어로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연원] 서낭당은 마을 어귀나 고개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이 서낭신앙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능화(李能和)에 의하면 서낭당은 중국 북제시대(北齊時代)에 출현하여 송대(宋代)에 이르러 크게 전파된 신앙으로 수용(水庸:도랑)을 제사하기 시작한 데서부터 시작된 성지신앙(城池信仰)이라 하였다. 성지는 성읍(城邑)을 수호하기 위하여 성읍 둘레에 파 놓은 못으로, 그 성지의 신이 성읍의 수호신으로 신앙되게 된 것이 서낭이다. [전래] 우리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한다.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은 신역으로서 신앙의 장소이다.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나무•오색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 다녔다. 지금도 서낭당을 지나면서 돌을 세 개 올려놓으면 재앙이 없어진다는 속신이 있다.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지켜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서낭이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농후하다. 고려시대에는 각 주부현(州府縣)마다 서낭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병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를 가봉하였던 일도 있었다. 수호신으로서의 서낭은 조선시대에도 널리 신앙되었다. 조선시대의 서낭은 국행(國行)서낭과 민간에서의 서낭으로 나누어진다. 국행서낭은'호국[護國]'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으며, 태종은 백악(白岳)서낭과 송악(松岳)서낭을 신도(新都)서낭으로 모셨다. 그밖의 조선시대의 이름난 서낭으로는 해주•괴산•현풍•양산•신성(新城)•밀양•전주•고성 서낭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을 기하려 하였다. 한편 서낭을 성황과 분리하여 해석하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낭신앙이 있었는데, 그뒤 중국으로부터 성황신앙이 유입되었다는 설로, 서낭신앙과 성황신앙은 그 신앙의 기능이나 형태가 비슷한 것이었으므로 재래의 우리 서낭과 전래된 성황은 쉽게 습합될 수 있었다 한다. 특히 서낭을 표기할 때, 한자로는'성황[城隍]'으로 밖에 기록할 수 없게 되어 양자는 더욱 쉽게 하나가 되어버렸다. 출처 : 武士內外 (2005-04-03 20:19:19) | ||
![]() | ||
![]() | ||
![]() | ||
서낭당(城隍堂) ● ● ● 개요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나 고개마루 길옆에 잡석을 쌓아놓은 돌무더기. 여기에는 대부분 신수(神樹)가 복합되어 있다. 이와같은 형태의 서낭당은 서낭신이 있는 거처로 믿어, 여기에 마을 사람들이 제를 올리며 밖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와 액을 막아 달라는 내용으로 마을의 평안을 빌고, 여행자가 행로의 안전을 기원하기도 한다. 서낭당은 ① 서낭나무 신수에 돌무더기가 복합되고 이 신수에 백지, 청 · 홍 · 백 · 황 · 녹색 등의 5색 비단 헝겊을 잡아맨 형태가 대체로 많고, ② 돌무더기만 쌓아올린 형태, ③ 서낭나무에 백지, 청 · 홍 · 백 · 황 · 녹색 등 5색의 비단 헝겊을 잡아맨 형태, ④ 서낭나무에 당집이 복합된 형태, ⑤ 입석(立石) 형태의 다섯 가지 형태가 있다. 그리고 중부지역에서는 ① 또는 ② 형태에 솟대나 장승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도 있다. 서낭당의 명칭은 지방에 따라 일정치 않아, 중부지방에서는 ‘서낭당’, ‘선왕당’, 경상도 등지에서는 ‘천왕당’, 경북 동해안지역에서는 ‘골매기서황’, 또는 ‘서황’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국수서낭당’, ‘사신서낭당’, ‘진대서낭당’ 등의 예와 같이 다른 신앙과 복합된 명칭도 있다. 또 관북 · 관서지방에서는 서낭당을 ‘국시당’ · ‘국수당’이라 부르고, 문헌에는 ‘선왕당’(仙王堂) · ‘성황당’(城隍堂)으로 기록되고, 한자에 소양이 있는 층에서는 ‘성황당’(城隍堂)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명칭을 신앙내용과 결부시켜보면 ‘서낭’의 어원은 ‘산왕’-‘선왕’-‘서낭’의 음운변이 과정을 거쳐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낭을 ‘천왕’이라 부르기도 하는 예는 산이 우주적 축(軸)을 상징하는 우주산(宇宙山)으로서 지상에서 천상으로 이어져, 천상에서 천신이 지상의 산정(山頂)에 하강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산신이 천신의 후기적 지상 변이요소로 보이는데, 서낭을 천왕이라 부르는 예는 여기에 연유한 것이라 보인다. 또 산정에 자리잡고 있는 신당(神堂)을 ‘국수당’ · ‘국시당’이라 하는데 이것 역시 천신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일부지역에서 서낭당을 ‘국수당’ · ‘국시당’이라 부르는 것도 천신과 산신당 · 국수당(국시당)과의 관계에서 천신의 후기적 산신으로의 변이 요소, 천신의 후기적 국수(국시)신으로서의 변이 요소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낭당은 천신-산신-서낭신 신앙의 변이 전성(轉成)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또 서낭당을 성황당이라 부르는 예는 한자 자의(字意)에 관계 없이 서낭은 산신신앙인 산왕-선왕-서낭의 음운적 전음 변이 현상을 가져온 것이고, 여기에 중국으로부터 후기적으로 들어온 성황신앙과 발음, 신앙내용이 서로 닮은 데서 첨가 복합되었기 때문에 일부 식자(識者) 층에서 한문식으로 성황이라 부르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민간층에서는 한자와 관계없이 여전히 서낭이라 불러 서낭이 이 계통 신앙의 대표적인 기본 명칭이다. 서낭당의 신앙내용:서낭신앙은 천신신앙과 그 연장 변이 형태인 국수(국시)신앙, 산신신앙을 기반으로 여기에 후기적으로 들어온 시베리아, 몽골 등지의 오보(Ovoo) 신앙과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성지(城池)신앙인 성황(城隍)이 복합된 신앙이라 생각된다. 오보신앙 요소는 신수에 5색의 헝겊을 걸어 잡아매고 여기에 돌무더기가 있는 형태가 몽골의 오보를 비롯해 시베리아 등지에도 같은 신앙 형태가 있어서, 이런 형태는 시베리아로부터 몽골 · 만주 ·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연결 띠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성황신앙은 송나라 때 성벽을 방어하기 위해 흙을 파 높은 둑을 쌓고 이 둑과 흙을 파낸 자리에 물이 고인 해자(垓字)를 함께 방호신으로 신앙한 데서 성황신앙이 형성되고, 이것이 고려 문종(文宗) 때 들어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서낭과 성황의 음이 같고 또 마을을 수호하려는 서낭신앙과 중국 성황의 방호 기능이 서로 같아 후기적으로 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이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나 고개마루 길옆에 있기 때문에 행인들이 여행의 안전을 비는 예도 있어서 서낭신이 마을의 수호 기능 외에 노신(路神)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출처: http://www.koreandb.net/ | ||
![]() | ||
![]() | ||
![]() | ||
민속신앙 ※ 민속신앙자료는 [삼척의 역사와 문화유적](삼척시.관동대학교박물관, 1995년) "삼척시의 민속자료"편에서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1. 마을신앙 마을신앙은 마을에서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의례를 다룹니다. 삼척지역에는 서낭제가 어느 마을에서나 전승되고 있고, 그 외 천제(天祭)를 모시는 마을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해안마을에는 성기신앙이 남아있고, 짐대서낭도 삼척지역의 중요한 신앙체라고 하겠습니다. 비가 오지 않을 때 행하는 기우제 역시 집단적 신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외 무당이 주재하는 마을굿이 있으나 이는 별도로 하여 무속신앙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1) 서낭제 서낭제는 서낭제사, 서낭고사, 동네치성 등으로 불립니다. 자연마을마다 서낭당이 있어 행정적으로 구분되는 한 리에 여러 개의 당이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예를 들어 미로면 동산리에는 세 개의 서낭당이 있어 반별로 고사를 모시고 있는데, 서낭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로 남녀를 구분하고 있고, 해안마을에서는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당과 해사를 주로 돌보아주는 해서낭으로 나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서낭제는 마을마다 정해진 달이나 날짜가 있습니다. 달만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따로 날을 받아 모시게 됩니다. 서낭제의 시기는 정월 초나 정월 보름이 가장 많고 단오나 삼월 시월 중에 하는 경우, 또는 칠월 칠석에 지내기도 합니다. 일년에 단 한번 지내는 마을도 있지만 두 번 내지 세 번 지내는 마을도 상당수가 있습니다. 초곡리의 경우를 보면 정월 대보름과 오월 단오날에 서낭제를 지내고, 그 외 동짓달 초사흗날이 성황당 입주 상량한 날이어서 성황님 생일로 정하고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서낭제를 모시기 전에 마을에서는 먼저 제관을 선정합니다. 서낭제는 남자가 중심이 되어 대표를 뽑아 한밤중에 조용히 지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제관은 마을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마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제관은 제물을 장만하는 도가(유사. 당주. 소임이라고 하는 마을도 있다)와 초헌, 아헌, 종헌의 삼제관, 그리고 축관으로 대여섯명이 선출됩니다. 도가가 초헌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고 이외에 바깥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더 뽑기도 합니다. 이중 특히 도가는 생기를 맞추어 선출하지만 마을의 토박이로서 모범적인 동민 가운데 선정되기 마련입니다. 제관들은 제일이 결정되면 일주일에서 적어도 이삼 일 전부터 금기에 들어갑니다. 마을에서는 서낭당과 제관의 집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피워 잡인을 금한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서낭당 근처에 함부로 갈 수 없고 제관들의 집에 가는 것도 삼가합니다. 특히 제관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합니다. 상가(喪家)에 가지 않는 것은 물론 부정한 것을 보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바깥출입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마을에 초상이나 해산이 있으면 날을 물리게 됩니다. 마을을 위하여 일하면서 이처럼 금기가 엄격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주민들이 도가를 맡기를 꺼려 이장이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이장이 부정을 탔을 때에는 도리 없이 다른 사람이 맡게 됩니다. 제물은 마을에 따라 다릅니다. 대개 포와 어물, 육고기, 삼실과와 백설기 등을 쓰고 서낭당에서 메를 지어 올리며 조라술을 담그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낭신의 성격이 비린 것을 싫어하는 素서낭(대개 중서낭이라고도 한다)인 경우에는 육고기를 쓰지 않습니다. 제물을 구입할 때는 값을 깍지 않는 것이 상례입니다. 제물구입과 기타 제사에 드는 경비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거나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충당합니다. 즉 동답(서낭답)을 빌려주어 받는 곡식이나 재산의 이식으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해안가 마을에서는 도가바위라고 하여 미역이 나는 바위가 서낭제를 위한 마을 공동재산인 예도 있습니다(초곡리). 또한 마을공동재산은 정월에 주민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하여 모은 돈과 쌀로 만들기도 합니다. 제를 지내는 시간은 대개 사방이 고요한 한밤중입니다. 자정에서 두시 사이에 많이 지내는데 마을의 대표들을 비롯하여 한해동안 집안에 초상이나 해산 등 부정한 일이 없었던 남자들만 올라가 경건하게 지냅니다. 이때 여자들은 올라가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축이 있으면 축을 고하고 없으면, 비손으로 올립니다. 서낭님께 잔을 올린 후에는 마을 가가호호의 소지를 올려주며, 각 가정의 소지가 끝나면 소를 위한 소지도 올려줍니다. 삼척지역의 서낭당은 나무와 당집, 돌무더기나 바위로 된 형태가 가장 많습니다. 당집 안에는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城隍之神 神位라고 쓴 단순한 위패도 있고, 城隍之神, 土地之神, 勵疫之神을 함께 모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함께 흙이나 쇠로 만든 말을 모시는 마을도 많습니다. 말은 한 마리인 경우도 있고 여러 마리를 함께 모시기도 합니다. 대개는 다리 하나가 부러져있는데 서낭을 위해 호랑이와 싸우다가 다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은 서낭님이 타고 다닌다고 믿습니다. 서낭당 옆에는 대개 수부당이 있어 수부신을 위해줍니다. 수부는 서낭님을 모시던 주민들 가운데 돌아가신 분이 되었다고도 하고 서낭신의 부하라고도 합니다. 해안마을의 서낭제는 특별히 해사를 돌보는 신을 따로 모시는 마을이 많습니다. 즉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과 해사를 돌보는 신으로 갈라져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때 해사를 돌보는 서낭은 대부분 여신이지만 남신일 때도 있습니다. 용화리에는 본서낭당이 1리에 있고 바닷가의 해신당은 2리에 있습니다. 본당에서의 제사는 1리와 2리의 주민 모두가 지내고, 해신당은 어민들만 제사를 올립니다. 또한 노곡에는 서낭당 외에 댕두, 또는 댕우서낭이 있어 해사를 보호해줍니다. 댕우서낭은 바닷가 백사장에 약 2m 정도 높이의 작은 바위가 신체로 향나무가 자라 있는 한쪽 면의 아래에 가로 세로 30cm 정도의 단을 시멘트로 발라 만들어놓았습니다. 댕우서낭에는 바닷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잡게 해 달라고 개인적으로 와서 빈다고 합니다. 이제 서낭제의 구체적인 예로써 갈남마을의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갈남에는 두 개의 서낭당이 있는데, 첫째는 호서낭이라고 믿는 마을의 당이고 또 하나는 해서낭입니다. 서낭당은 국도를 질러 마을을 굽어보는 야산 중턱에 있습니다. 서낭당은 기와지붕에 정면은 넉넉한 한 칸으로 3미터쯤 되고, 측면은 두 칸인데 역시 3미터 정도입니다. 안에는 城隍之神이라고 쓴 위패와 촛대하나만이 있습니다. 신격은 할아버지라고 하며 또한 온 몸이 하얀 호랑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서낭님 치성을 모시기 3-4일 전이면 호랑이가 나타나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주민들은 함부로 호랑이란 말을 안하고 큰 짐승이라고 하며 조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위치의 서낭당은 약 40년 전에 옮긴 것입니다. 그전에는 마을 어귀 개울가에 있는 나무를 서낭으로 모셨는데 주위의 나무가 부러져 서낭님이 놀라 달아나셨다고 보고 지금의 서낭당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인가가 들어와 옮겼다는 말도 있습니다.) 서낭나무는 그 후 약 십여 년 동안 죽어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살아났으며, 주민들은 절 받은 나무라고 하여 감히 아무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해서낭은 여서낭, 해당할머니라고도 합니다. 1반 마을 집 사이에 있는데 신체는 오래된 소나무와 아래에 있는 바위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몇 년 전 벼락을 맞아 부러져 왜소해졌습니다. 나무에는 창호지로 예단을 바쳤고 열기머리를 걸어두었습니다. 아래에 시멘트를 발라 제단을 마련하고 지름 50cm 정도의 남근석을 모셨습니다.(이 돌은 위패와 같은 의미로 신앙됩니다.) 여기에 잔을 붓는다고 합니다. 당 주위는 길이 5m, 폭 3m 정도의 돌담을 쌓았는데, 옛날에는 이곳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나 지금은 길을 지나 바다까지 10m 정도 거리가 있습니다. 갈남의 서낭고사는 일년에 두 번 올리는데 치성 드린다고 합니다. 시기는 정월 첫 子일과 10월 첫 午일입니다. 먼저 서낭당에 올라가 자정에 제물을 진설하고 축을 읽고 집집마다 소지를 올려주고, 이어 해당에 가서 어업하는 집의 소지를 올려줍니다. 치성 드리기 약 한 달 전에 삼제관을 선정하는데 이는 그동안 근신하라는 의미입니다. 제물을 장만한 사람이 초헌관을 맡으며, 제물은 과거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이때에는 오직 삼제관만 이 제물을 만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돼지머리, 쇠고기, 어물, 과일, 삼실과를 쓴다. 갈남의 특이한 풍속으로 도가계를 들 수 있습니다. 도가계는 서낭당 고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모임입니다. 계수는 가장 나이 많은 사람 중 건강한 분으로 선정하고, 치성 드리기 한 달 전 제관을 선정하며, 치성이 끝난 다음 날 하기(下記)보면서(결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민 전체가 음복합니다. 도가계는 마을 사람 누구나 참여하게 되어있는데 이 회의에서는 서낭고사 외에 마을의 문제를 의논합니다. 도가계는 마을이 공동으로 소를 키워 만든 돈과 어촌계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자금의 이식으로 고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서낭제를 지내고 난 후에 거리제를 지내는 마을도 있습니다. 다리 위에서 행해지는 거리제는 '객귀제사'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객귀의 침입을 막고 우환을 방지하려는 것이 목적으로 현재 내미로리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천기리에서는 서낭제가 끝나면 용왕제와 거랑제(거리제)를 지냅니다. 남자들만 참가하여 엄숙하게 지내는 서낭제와 달리 용왕제와 거랑제에는 부녀자들도 참가할 수가 있습니다. 용왕제는 물에 빠지지 말고 조심하라는 뜻에서 올리는 것이고 거랑제는 길에 나가 객사하여 돌아다니는 객귀들을 잘 풀어먹이기 위해서 모신다고 합니다. 2) 천제당 제사 삼척에는 천제(天祭)를 올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신기면의 고무능리,미로면의 내미로리가 대표적입니다. 이중 내미로리의 천제봉 제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0년에 한번씩 모시는 천제봉 제사에는 반드시 왼소 한 마리를 잡아 생고기를 제물로 써야 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재정문제상 소를 잡지 못하다가 35년만인 1993년 7월에 지냈던 제사 때는 소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소를 잡을 때는 살아있는 소를 천제당에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직접 잡습니다. 또한 제주를 빚어 특별히 사용합니다. 천제는 밤 12시를 기해 지내는데 이때는 남자주민들만 참석합니다. 생기를 맞추어 선정한 삼헌관을 중심으로 제사를 모시는데 제주를 올린 후 축문을 읽고 경건하게 합니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음복을 하기 위해 음식을 골고루 돌려 복을 함께 나눕니다. 초곡리에도 상천지신을 모시는 천제당이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지금은 성황당에서 망제로 대신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천제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하월천리는 마을 입구의 숫서낭과 마을 끝에 있는 암서낭 그리고 마을 뒤편화산의 천제당을 모십니다. 천제당 신앙의 의미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제당은 대개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든 형태로 집을 짓지 않습니다. 하늘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기에 막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미로리에서는 소를 위해 천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3) 성기신앙(남근봉헌제) 행정구역상 원덕읍 갈남2리인 신남은 남근을 모시는 것으로 유명한 마을입니다. 지금도 신남의 서낭당에는 나무로 깍은 남근이 수십 개 잘 엮어진 채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근은 서낭제를 올릴 때 깎습니다. 신남의 서낭제는 정월 대보름날과 시월의 첫 오(午)일에 지냅니다. 제사를 午일에 모시는 이유는 처녀의 기가 세다고 하여 가장 기가 센 말날로 잡은 것이라고 합니다. 서낭당은 본당인 해신당이 바닷가에 있고, 큰 당은 산 속에 있는데 큰 당은 최근 산불에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해신당은 처녀가 해물을 따기 위해 장차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 애바위에 데려다 주었는데 거기서 폭풍우를 만나 죽게 되자 죽은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당을 만들어 제를 지내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녀가 죽은 뒤 고기가 안 잡혔는데 한 어부가 술에 취해 해신당 자리에 오줌을 누었더니 그후 만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부터 어부들이 바다에 나가거나 해신당 치성을 드릴 때는 신(남근)을 깎아 해신당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당주와 제관은 서낭제 올리기 2주 전에 정합니다. 제관은 큰 당으로 3명이 가고 해신당으로 2명이 가서 동시에 제사를 주관합니다. 당주는 제사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여 큰 당으로 가게 됩니다. 금줄은 서낭제 지내기 3일전에 당주집과 두 서낭당에 칩니다. 제관은 제사 지내는 날 향나무를 베어다가 저녁에 해신당에 걸어놓을 신을 깎습니다. 신은 세 개나 다섯 개, 일곱 개 등의 홀수로 깎는데, 보통은 다섯 개입니다. 제물은 일반제사와 같은 음식을 씁니다. 육고기는 소고기를 올리고 돼지고기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메는 큰 당과 해신당에 각각 하나씩 올립니다. 또한 시루떡을 양쪽 당에 하나씩 놓습니다. 옛날에 정월 보름 제사 때는 소를 잡아 미역국을 끓여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하였다 합니다. 제사비용은 어민들이 전복이나 해삼 등의 해물을 채취하여 적립한 동네 자금으로 충당합니다. 4) 짐대서낭 원덕읍 임원과 미로면 고천리, 활기리에서는 짐대서낭을 모시고 있습니다. 짐대는 흔히 다른 지역에서 솟대라고 부르는 것으로 긴 나무 위에 새 모양을 깎아 세운 것입니다. 짐대는 대개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막아준다고 믿습니다. 먼저 임원리의 짐대를 보면 3m 정도 높이의 소나무 기둥에 나무로 새를 (이곳에서는 갈매기라고 부릅니다) 세 마리를 깎아 올려놓은 모습이었고 새들은 모두 북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현재 임원2리에 있는 짐대는 나무 위에 올려놓은 오리가 떨어져나가 기둥만 남아있습니다. 짐대의 몸통에는 20cm 너비의 검은 띠와 붉은 띠가 마치 용이나 뱀이 올라가는 나선형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짐대는 바다로부터 오는 재앙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짐대 옆에는 성황당 건물이 있습니다. 남성황이라고 합니다. 1리에는 두 명의 처첩인 여서낭이 있어 굿을 할 때에는 대를 내려다가 모십니다. 풍어제 z하루 전날 무당이 칼을 들고 짐대에 가서 짐대 몸체에 종이를 걸어놓고 칼을 짐대에 던져 꽂히면 '성황님 오셨다'고 합니다. 대방골이라 부르는 미로면 고천리 5반에도 짐대가 있습니다. 짐대 위의 오리는 1983년 이전까지 나무로 깎아 만들어 올렸으나 지금은 슬라브로 바꾸어 달아 놓았습니다. 역시 마을로 들어오는 액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5) 기우제 비가 내리길 기원하는 목적으로 올려진 기우제는 여러 마을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고천리는 대방골에 있는 '용소'에서 기우제를 합니다. 하지가 지나 여름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용소'에서 개를 잡고 그 피를 바위에 칠하면 이를 씻어 내리기 위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믿었습니다. '용소'는 상당히 깊다고 널리 알려진 소(沼)입니다. 과거 이 곳에서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전해져 용소라는 이름이 붙어졌다고 합니다. 용화에서 동력배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의 바다에 용궁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가뭄이 들면 그곳에 도포와 갓을 쓰고 정장을 한 사람들이 개를 가마니에 넣어 제를 지내고 바다에 던졌다고 합니다. 제사가 잘 올려졌을 때에는 돌아오는 길에 바로 비를 만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임원에는 용왕굴이라고 하여 바다로 뻗어나간 능선에 굴이 있는데 가뭄이 들면 이곳에 배를 타고 들어가 산 개를 바치는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2. 가정신앙 우리조상들은 집안의 평안과 가족들의 건강, 생업의 번영을 위해 각 가정에서 갖가지 의례를 행해왔습니다. 삼척지역에도 많은 의례가 전승되어 왔으며, 산간마을과 해안마을의 생업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보이지만 목적과 기능은 같다고 하겠습니다. 1) 안택고사 안택은 집안이 일년동안 평안하고 가족들이 건강하기를 빌기 위해 행하는 가신신앙의 대표적 의례입니다. 대개 정월이나 10월중에 날을 받아 지냅니다. 날을 받을 때는 대주, 또는 부부의 생기를 맞추어 정합니다. 안택하기 3-4일쯤 전에 대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피워 잡인의 출입을 삼가게 합니다.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안택날이 되면 먼저 당에 올라가 서낭에게 안택을 한다는 사실을 고하고 내려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당에까지 가지 않고 문 앞에서 서낭당을 향해 절하고 술을 올리는 망제로 대신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안택의 순서는 마을마다, 집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먼저 마루에서 성주를 모십니다. 성주의 신체는 대들보에 한지와 실을 매단 것으로 그 아래에 상을 차린 후 제를 올립니다. 가족들은 모두 절한 뒤 식구수대로 소지를 올립니다. 성주를 모신 후에는 안방으로 가서 조상에게 비는데, 이때에는 큰 양푼에 메를 담고 숟가락을 조상의 수대로 꽂아 놓습니다. 이어 다시 상을 보아 부엌에서 조왕에게 빕니다. 부엌에서 군웅을 함께 모시는 곳도 있습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마지막에 바다로 나가 용왕을 모시기도 합니다. 2) 산메기 산메기는 문자 그대로 산에게 무엇인가를 먹이는 신앙입니다. 즉 산을 대접하는 의례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발음이 불분명하여 산매기라고도 들립니다. 그 경우에는 동해안지역의 골매기 신이 고을을 막아주는 것으로 이해하듯 산을 막기 위한 신앙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영동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특히 삼척지역에서 전승이 활발합니다. 해안지역에서도 아직 산메기를 하지만 지금은 역시 산간마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산메기 터는 마을마다, 집안마다 정해진 산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로 태백산 줄기의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메기 터가 마을뒷산인 경우도 있지만 쉰음산이나 두타산, 태백산까지 굳이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산메기는 삼월삼짓날이나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등 주로 봄에 하지만 가을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산메기를 '조상 화전놀이 시키는 놀이'라고도 하는데 무당이나 경을 읽는 복자(卜者) 등 전문가를 데리고 가서 조상을 대접하고 자손들의 발복(發福)을 빕니다. 산메기를 갈 때에는 한 집안의 여러 가족이나 한 마을에 사는 서너 집이 모여서 단체로 가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지역에 따라 여자만 가기도 하고 부부가 함께 가기도 하지만 딸은 데려가지 않습니다. 대신 집안을 이어갈 며느리를 데리고 갑니다. 산메기를 갈 때는 이른 아침에 출발하고 산에 가서 직접 메를 짓는 수가 많습니다. 이때 메는 산신메와 조상메로 두 그릇입니다. 산메기 터는 대개 마을단위로 지정된 장소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나무입니다. 집안마다 정해진 나무가 있어 그 나무 앞에 상을 차립니다. 그리고는 나무 밑동에 한지나 베조각, 실 등으로 폐백을 겁니다. 무당이나 복자는 그 앞에서 징을 치면서 산신, 제석, 삼신 등을 축원한 뒤 베조각을 들고 춤추면서 칼로 찢어 길게 갈라나갑니다. 이는 조상의 길을 갈라주는 의미가 있다고 믿고 나무에 걸어놓습니다. 그리고는 소를 위하여 축원하고 소지를 올립니다. 이러한 산메기는 소와 연관이 깊다고 한다. 산메기를 다니는 집에서는 평소 집안에 '산'이라는 신체를 모십니다. '산'은 베조각이나 한지, 또는 왼새끼를 꼰 것으로 예로부터 부엌에 있는 소 여물통 위의 기둥에 모셨습니다. 삼척지방의 부엌은 원래 외양간과 붙어, 부엌에서 쇠죽을 끓여 여물통에 부으면 반대편에 있는 외양간에서 소들이 먹을 수 있게 된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소는 '산'에 매인다고 하여 소가 아프거나 새끼를 낳을 때면 으레 산 앞에 가서 물이라도 한 그릇 떠놓고 비는 것이 상례였다는 것입니다. 산메기를 다녀온 후 '산'은 새 것으로 갈게 됩니다. 산메기의 기원이나 목적은 상당히 복합적이어서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기원을 보면 '산'이란 이 지역에서 호랑이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호환을 막기 위한 신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 예국( 國)에서는 호랑이를 제사지낸다고 되어있어 남다른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비린 것을 먹을 때마다 산에 거는 행위 역시 호랑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소가 산에 메여있다는 말도 호랑이가 물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데서 나왔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산메기는 조상을 대접하고 자손의 발복을 기원하려는 신앙이 지배적입니다. 소 역시 민간신앙에서 조상으로 모시기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산신과 삼신, 그리고 조상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라 하겠습니다. 3) 산제당 삼척에서는 가정신앙의 하나로 산제당을 모시는 집이 적지 않습니다. 산제당에 갈 때는 그 집안의 가장인 남자 혼자서 길을 나서고 여자는 따라 갈 수 없는데 이는 부정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좋은 날을 택하여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산에 오르게 되는데 길을 가는 도중에 짐승이 지나간다거나 뱀이 길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일이 생기면 다른 길을 택하여 산제당을 찾아가야 합니다. 산제당에 도착하면 메를 지어 산신님께 올립니다. 이 메를 생우메, 새우메라고도 하는데 밥이 다 되기 전에 솥뚜껑을 열어본다거나 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산신이 드시기 전에 잡귀가 솥 안에 들어가 먼저 먹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솥과 수저도 집에서 쓰던 것이 아닌 산신님을 위한 것들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가 사용합니다. 메가 다 되면 생우메 위에 산신님의 수저를 꽂고 촛불을 켜서 불을 밝힙니다. 제를 올리는 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소지를 올리면서 집안의 무사평안과 행복을 빕니다. 산제당은 행여 중단하면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다니던 사람들은 대개 해를 거르지 않고 매년 산제당을 찾는다고 합니다. 산당과 산메기는 집안의 자손발복이 목적이라는 점과 산을 신앙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약간 성격이 다릅니다. 즉 산메기는 마을이나 집안을 단위로 해서 부모 대부터 선대 조상을 위해서 빌어오는 것을 계승하는 경우가 많지만 산당에 가는 것은 개인자격입니다. 그래서 산메기 장소는 보통 집집마다 비슷하지만 산당은 개인마다 가는 곳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또한 산메기 할 때는 우마를 잘 봐달라는 뜻으로 소지를 올리는데, 산당에가서는 우마를위해 비는 경우는 없고 치성만 드림. 4) 뱃고사 뱃고사는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처음 배를 진수시킬 때나 고기가 안 잡힐 때, 또는 집에서 안택을 한 후에 지내는 의례입니다. 배에는 의례히 배를 지켜주는 신인 성주를 모시고 있는데 여성주인 경우에는 종이에 색실을 걸고 남성주는 종이만 걸어 모십니다. 뱃고사를 지낼 때는 대개 무당을 불러 간단히 비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선주들 가족과 선원들이 모두 모여 절하고 배성주를 위합니다. 근덕면 덕산에서 뱃고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먼저 당에서 빌고 난 후 봉할머니한데 가서 제사를 지내고 배에 가서 제사를 지냅니다. 봉할머니는 바다에서 떠들어왔다는 덕봉산에 있습니다. 3. 무속신앙 삼척은 전통적으로 세습무권입니다. 즉 신들림의 경험 없이 집안으로 내려온 무당들이 굿을 해왔던 것입니다. 굿은 마을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서낭굿, 또는 어업하는 사람들의 풍어를 위한 별신굿이 많이 행해졌고, 개인적으로는 바다에서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한 넋건지기굿과 혼인 전에 죽은 영혼을 결혼시키는 영혼혼사굿, 그리고 재수굿 등이 있습니다. 삼척지역 대부분의 어촌마을은 근덕의 큰무당 이금옥의 당골판이었습니다. 흔히 '뚱뚱이 무당', '째보 며느리'라고 불린 이금옥은 현재 부산의 무속관계 인간문화재인 김석출의 형수로 뿌리깊은 세습무 집안에서 굿을 배워 삼척을 비롯한 강원도 영동지역 전역을 당골판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금옥이 노쇠하여 굿을 하지 못하게 된 90년대 이후부터는 신들린 무당이 마을의 서낭굿을 맡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신들린 사람들은 오랫동안 점복(占卜)으로 생업을 삼아왔고 굿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굿을 배워 참여하는데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삼척의 어촌에서는 정기적으로 서낭굿, 또는 어룡제라고 부르는 마을굿을 해왔습니다. 삼척굿의 특징은 어업도 중시하지만 마을전체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의도가 강하게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즉 별신굿의 성격보다 마을서낭굿의 요소가 많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비용의 과다지출과 신앙심이 줄어들면서 차차 중단되는 추세에 있습니다. 현재까지 굿을 하고 있는 마을들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추천에서는 격년으로(3년마다 라고 한다) 음력 3월중에 날을 받아서 무당을 청해 굿을 하는데 이를 어룡제라고 부릅니다. 어룡제의 비용은 추렴없이 어촌계가 부담하는데 공동어장의 이익금에서 냅니다. 당골무당은 이 마을에 살다가 근덕으로 이사간 이금옥(별호 뚱뚱이 무당, 1991년 겨울에 사망)이었는데 노쇠하여 굿을 못하게 된 88년부터 신들린 무당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들은 세습무당보다 값이 싸고 주민들의 흥을 돋구어주어 평이 좋다고 합니다. 그후부터는 당골무당을 따로 정하지 않고 해마다 무당을 바꾸어 부릅니다. 이유는 두어 번 쓰다가 보면 당골로 굳어져 마을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90년에는 삼척의 꼬마무당이 왔었고, 92년에는 묵호에서 데려왔다고 합니다. 무당은 어촌계 임원회의를 소집하여 의사를 종합, 청하게 됩니다. 굿은 아침 11시경 시작하여 밤을 새고 다음날 오전에 끝납니다. 제물은 특이한 것이 없고 돼지머리, 대구포 외에 일반적인 제물이 오릅니다. 어룡제를 지낼 때 여유있는 선주들은 만신을 청하여 배 안에 제물을 차려놓고 따로 용왕제를 지냅니다. 초곡의 마을굿은 단오 때 한해 걸러서 하는데 어룡제라고 부릅니다. 예전에는 날을 받아서 굿을 했었습니다. 굿은 5월 4일 초저녁에 원당에서 시작하여 6일 아침에 마칩니다. 굿에는 주민들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구경을 옵니다. 일단 서낭굿이 끝난 후 선주들은 바닷가에 있는 해서낭(해랑)에 가서 용왕제를 합니다. 당골무당이 죽은 후 무당의 선정은 4월 중에 마을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예전에는 소를 잡아 통째로 올렸었는데, 지금은 돼지를 잡습니다. 임원은 3년에 한번씩 굿을 하는데 모든 가구가 돈을 추렴하여 경비를 마련합니다. 굿은 9월에 하고 정씨서낭과 고씨서낭인 두 여서낭의 대를 내려 남서낭을 모신 큰 서낭당으로 모셔와 굿을 합니다. 이곳에서 이틀간 굿을 한 뒤 삼일째 되는 날은 바닷가로 나와 용왕제를 지냅니다. 굿을 할 때는 소 한 마리를 잡아 제물로 올립니다. 행정구역상으로 삼척시 교동에 속하는 후진에서도 굿을 합니다. 굿은 예전에 2년에 한번씩 하던 것을 1993년까지는 3년에 한 번, 1993년부터는 5년에 한 번씩 굿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굿의 이름은 서낭굿이라고 하고 동짓달에 하는데, 전속 무당으로는 근덕 뚱띠이 무당(이금옥), 묵호 용칠이 무당들이 해오다가 현재는 그 후손들이 합니다. 삼척시 오분동의 풍어제는 4-5월과 11월에 하며 계원의 생년월일, 지역의 텃세를 고려하여 날짜를 정하고 굿은 용골무당을 계속하여 불러 간략하게 합니다. 제당은 산너머에 있으며 부정을 타지 않은 선주들은 돈을 놓고 절을 하며 안전과 풍어를 기원합니다. 마을 제사는 통장이 관장하지만 풍어제는 어촌계가 중심이 됩니다. 이제 삼척에서 행해지는 마을굿의 내용을 주로 해안마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정굿 : 굿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정과 굿청의 부정을 가시기 위해서 하는 굿으로, 무녀는 물과 불로 부정을 가셔냅니다. 당맞이굿 : 서낭신을 맞이하는 굿으로, 굿청은 대개 바닷가에 임시로 만들기 때문에 서낭당에 가서 당을 내려 신을 모셔오게 되며, 서낭당이 둘이면 두 군데, 셋이면 세 군 데를 돌아 마을을 수호하는 신들을 모셔옵니다. 하회동참굿 : 숫서낭과 암서낭, 그리고 그 외 무속에서 신앙하는 모든 신들이 함께 동참하여 굿청에 좌정하기를 기원하는 굿입니다. 조상굿 : 조상신을 청하여 자손들을 돌보아주기를 빕니다. 세존굿 : 시준굿, 당금애기, 또는 제석굿이라고도 하며, 세존은 인간에게 복을 주는 생산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존굿에서는 규중처녀 당금애기가 부모 형제가 모두 집을 비운 사이에 세존이라는 신적 존재와 결합하여 아들 셋을 낳은 후 함께 세존을 찾아가 아들들은 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당금애기는 삼신으로 좌정하기까지의 긴 서사무가가 불려집니다. 또한 제주에게 고깔을 씌우고 염주를 걸어준 후 동냥을 하게 하는 '중잡이놀이'도 있습니다. 성주굿 : 성주는 가신입니다. 가정에서 대주를 대표하는 중요한 신이어서 특별히 모십니다. 성주굿에서는 집을 짓는 과정과 집안의 살림을 차리는 무가가 불리어집니다. 논동우굿 : 일명 군웅굿, 장수굿이라고도 하며, 각도의 장수를 불러 모시는 굿입니다. 장수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무녀는 놋동이를 입에 무는 묘기를 부립니다. 지신굿 : 터를 관장하는 신을 모시는 굿입니다. 심청굿 : 천하의 효녀 심청이 넋을 불러주는 굿이라고 합니다. 눈총이 맑게 하기 위해서 굿을 한다고도 하며 심청가의 내용을 무녀가 부릅니다. 천왕굿 : 일명 원님굿이라고도 하는데, 천왕은 불교적 신의 이름으로 굿의 내용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굿이 끝나면 원님놀이라는 굿놀이가 행해집니다. 손 님굿 : 손님은 마마와 홍역의 신입니다. 천연두는 옛날에 가장 무서운 병이었으므로 곱게 앓도록 해달라는 기원으로 이 굿을 해왔습니다. 무가의 내용은 욕심 많은 철룡이 아버지가 손님을 잘못 대접하여 아들을 잃고 패가망신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제면굿 : 제면은 무당의 담당구역을 의미합니다. 내용은 제면할머니가 당골네들을 찾아다니면서 걸립하는 것입니다. 무녀는 각도의 무당흉내를 내어 관중들을 웃기고, 굿의 마지막에는 제면떡을 골고루 나누어 줍니다. 꽃노래, 뱃노래, 등노래굿 : 굿이 끝나감에 따라 여러 무녀가 다 함께 꽃을 들고 신을 즐겁게 하는 춤을 추고, 다시 굿청에 매어놓았던 배를 젓는 흉내를 내면 사람들은 배 안에 돈을 넣습니다. 이어 등을 들고 춤을 추는데 이 모든 것은 신이 돌아가시는 길을 밝혀주고 편안히 해주는 것입니다. 용왕굿 : 용왕은 물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용왕굿은 집집마다 바닷가에 제물을 장만하여 차려놓고 뱃기를 꽂아놓은 후 행해집니다. 무녀는 물동이 위에 올라가 모든 어민들에게 풍어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거리굿 : 굿에 따라온 잡귀들을 풀어먹이는 굿으로, 이 굿은 반드시 양중들인 남자가 합니다. 여러 잡귀들을 흉내내어 사람들을 웃기는 유흥적인 굿입니다. 4.독경신앙 삼척의 산간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형태는 독경입니다. 정초에 안택을 할 때도 경객(경쟁이, 독경쟁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청하여 빌었고 산메기를 갈 때도 대개는 경객을 데리고 갔습니다. 특히 병이 나도 약을 구하거나 병원이 멀어 갈 수 없었던 산간지역에서는 거의 독경으로 잡귀를 물림으로써 병을 낫게하는 방법에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병굿을 거의 볼 수 없고 안택이 남아있습니다. 원래 독경은 전국적으로 장님들이 하던 것이었습니다. 장님들이 호구지책으로 독경을 했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이들은 나라에서 만든 맹승단체에 속해있어 국가에서는 가뭄이 들거나 질병이 돌면 그들에게 기도하도록 시켰습니다. 이들은 실제 중은 아니었으나 모두 삭발하고 있어 맹승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후 불교가 탄압을 받자 선사로 겉모습을 바꾸었습니다. 또한 일반인 가운데서도 안택과 독경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생겨나 이들을 경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삼척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독경은 원래 기복의례와 축귀의례가 모두 있었으나 지금은 미친 사람이 있을 때 독경을 하고 산메기에 따라가는 정도입니다. 독경의례의 종류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액막이 : 토정비결등을 통해 그 해 액이 나쁘다고 하면 행하는 간단한 의례로, 대개 정월 대보름에 합니다. 열두달 액을 막아주고 도액경을 외웁니다. 삼재풀이 : 삼재가 든 사람을 위한 의례로 삼재경을 외우고 삼재부적을 문지방위에 생년월일을 적어 붙입니다. 산치성 : 봄이나 또는 사월 초파일에 산에 가서 자손발복을 비는 의례로, 산신경, 산령경, 산왕경등을 외웁니다. 살풀이 : 부모 자식간이나 부부간에 살이 끼었을 때 풀어주기 위한 의례입니다. 살풀이를 하려면 먼저 쑥대궁으로 활을 만들고 메밀(또는 수수팥떡)을 반죽하여 화살촉을 만들어 살이 낀 사람을 계속 쏘면서 살을 푸는데, 해살경을 외웁니다. 안택 : 집안의 안과태평과 건강, 생업의 풍요를 위하여 해마다 하는 의례로, 먼저 부정을 풀고 부엌에서 조왕, 장독대에서 토주, 안방에서 성주와 제석으로 모시고 조상굿을 하기도 합니다. 안택을 할 때에는 성조대신, 당산신령, 조왕대신, 칠원성군, 호구별성, 삼불제석, 명산신령, 사해용왕, 누대영가 등의 위목을 붙이고 부정경, 명당경, 성주경, 조왕경, 지신경, 제석경, 고사덕담과 조상해원경을 외웁니다. 퇴송 : 병의 원인이 출입하다가 잡귀가 범접한 것으로 판명되면 밤에 마당에서 잡귀를 풀어먹이는 퇴송을 합니다. 이때는 간단히 상을 차리고 축귀경을 외웁니다. 상나세 : 퇴송으로 낫지 않거나 조상에 탈이 있어 병이 든 것으로 생각되면 상나세를 합니다. 상나세는 상을 차려 조상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독경 : 조상에게 빌어도 낫지 않으면 이번에는 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잡아없앰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례를 행하게 되는데 이를 송경, 또는 독경, 병굿이라고 부릅니다. 무속이 신을 청하여 위무하고 달래어 신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면 독경은 주로 잡귀를 물리치는 적극성을 띠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당은 춤과 노래로 신을 즐겁게 하는데 치중하지만 독경은 경문을 외워 잡귀를 협박하고 결박하여 영원히 나올 수 없게 가두는데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또한 신격도 무속이 신앙하는 신보다 도교나 불교의 위경의 신들을 주로 모셔 성격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독경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있었으나 요즈음은 충청도나 전라도에서는 안택이 남아있고 강원도는 아직 병을 고치는 독경이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5.민간요법 눈에 삼이 났을 때에는 삼을 잘 잡는 할머니를 모시고 와서 삼을 잡습니다. 팥을 가지고 이마의 가운데서부터 떨구어 그 아래에 놓아둔 물그릇에 떨어뜨리는데 팥에 방울이 생길 때까지 계속합니다. 또는 해가 오를 때 아카시아 나무가시를 자신의 나이수대로 세어 올라가거나 만약 모자라면 되짚어 내려와 나이에 맞는 가시를 뽑아 거꾸로 붙여두고 '햇님, 삼을 잡아주시오' 합니다. 나이수대로 처마의 기둥을 세기도 합니다. 두드러기가 났을 때에는 부엌에 세워놓고 소금으로 문지르고 빗자루로 쓸어내리면 낫는다고 합니다. 또는 지붕에서 썩은 짚을 몇 오라기 뽑아 태워서 그 연기를 쐬게 한 뒤 '두드레기 씨자, 두드레기 씨자'하고 외우면서 빗자루로 몸을 쓸어내립니다 출처: http://www.scm.go.kr/his/his03_1.jsp | ||
![]() | ||
![]() | ||
![]() | ||
| ||
작품/자료명 : 울산일산동당제(별신굿) 지정여부 :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27호(2001년 12월 20일 지정) 전승지역 : 울산시 일산동 구분 : 무속의례 개요 일산동의 굿은 울산·울주지역에서는 물론, 넓게는 동해안지역에서도 가장 유서깊고 큰굿 가운데 하나로 인근에 널리 알려져 있고, 최소한 200년 이상의 전통을 갖고 있다. 굿은 2년마다 음력 10월 초하루부터 동해안 세습무 집단의 주재로 거행된다. 일산동은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울산시 동구 일산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굿으로, 일산동은 현대중공업주식회사와 방어진의 중간쯤 위치한다. 이곳은 좋은 어장이 있어 주로 어업에 종사하는 가정이 많고, 어패류나 미역과 같은 해초류가 풍부해서 해녀도 상당수 남아 있다. 흐름 일산 별신굿은 2년마다 음력 10월 초하루부터 약 4일간 치루어진다. 첫날은 제주, 마을 어촌계장, 마을 임원들이 주관하는 유교식 제의이고, 둘째날 아침부터 이 지역의 세습무집단이 주관하는 별신굿거리로 구성된다. ① 제주 : 첫날 치루어지는 유교식 제의는 제주가 제물과 같은 모든 준비를 담당하고 제관역할도 하는데, 제주는 고정되어 있다. 이곳도 다른 마을제의와 같이 제주는 제일이 다가오면 제물 준비를 하고, 찬물에 목욕하고, 부부간의 잠자리도 삼가며, 부정한 일을 하지 않도록 재계(齋戒)한다. ② 경비 : 일산동 별신굿의 경비는 일산동 어촌계(漁村契)가 부담하고, 마을 주민들이 기부하고, 외지에 나간 마을 출신 인사들이 기부한 금액으로 경비를 조달한다. 이러한 경비조달 형태는 마을 주민의 대다수가 어업에 종사하여 어촌계의 회원이고, 따라서 굿의 내용은 풍어, 안전한 어업활동 등과 같이 어업에 관련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③ 무굿 : 무당이 담당하는 굿인 별신굿은 22거리~24거리로 구성되고, 각 거리는 담당 무녀가 주관하며, 남자잽이들은 무악을 연주하고 마지막 거리인 대거리와 중간중간의 몇몇 놀이부분을 진행한다. 잽이들의 무악 반주악기는 주로 장고, 꽹과리, 징, 바라 등이 사용된다. ④ 굿당 : 굿당은 바닷가 모래사장위에 천막을 치고 설치되는데, 제물을 진설하기 위해 만든 대는 후면이 바다에 접하도록 바닷가쪽으로 설치한다. 제물은 제물대의 오른쪽 아래부분부터 시루떡 시루, 중앙 위쪽 좌우와 중앙에 지화, 그 사이에 소주, 밀가루로 만든 용, 소머리가 위치한다. 중앙 아래쪽에는 생선, 밤, 대추, 엿, 과일, 전이 진설되고, 제물대 정면 앞에 돗자리 한장을 깔고 그 위에 촛대 2개, 술잔 2개, 향합을 놓은 상을 차려 놓는다. 제물대의 사방 나무기둥 가운데 정면쪽으로 두 개의 기둥에는 신대(神竿)와 장식용 깃발을 각각 묶어 놓는다. 장식용 깃발은 큰 대나무의 꼭대기에 태극기를 달고 그 아래 흑애등을 단다. ⑤ 진행 : 굿마당에서 굿은 대개 아침 9시~10시 사이에 시작하여 식사시간도 없이 계속 진행되는데, 경우에 따라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계속되는 경우가 있다. 무녀들은 교대로 굿을 맡아서 진행하기 때문에 자신이 굿을 하지 않는 시간에 식사와 휴식을 취한다. 무녀와 관중들은 마을에서 준비하는 식사를 한다. 내용 ⑴ 신격 경상도 지방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을 ‘골매기’, ‘골매기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 신이 남자일 때는 ‘골매기 할배’, 여자일 때는 ‘골매기 할매’가 된다. 일산동의 신은 ‘골매기 할배’와 ‘골매기 할매’가 모두 좌정해 있는데, 이들은 부부신이며 ‘입거시조신(入居始祖神)’이다. 그런데 그 입거시조 부부신이 한 쌍의 부부가 아니라 한 할아버지에 두 할머니이며, 그 두 할머니가 처첩간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현재 ‘신당’에 모셔진 골매기신은 입거시조 부부신이고, 그 후 혼자사는 할머니가 이 마을에 들어와 현재의 아랫당 자리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고, 할머니가 나중에 입거시조 할아버지의 작은 부인이 되었기 때문에 세 신을 다 모신다고 한다. 그 세 신의 격(格)은 다르기 때문에 ‘아랫당’은 신당도 따로 없고 제물도 ‘웃당’과 다르게 준비한다. ⑵ 제일(祭日)과 제의(祭儀) 일산동 당제는 제일과 제의가 이원화되어 있다. 매년 정월 보름날에는 당신에게 제물을 진설하고 제를 지내고, 그 외 2년마다 음력 10월 초하루부터 별신굿을 할 때에 이 별신굿과는 별도로 당신에 대한 제의가 또한번 이루어진다. 별신굿 기간에 행하는 제의는 음력 10월 초하루 자시(子時)에 유교식으로 신당에서 제주와 마을 임원들이 치룬다. 즉, 제주와 마을임원들이 유교식 제의를 먼저 치루고 난 다음 장소를 옮겨 무당이 주재하는 별신굿이 치루어진다. ① 유교식 제의 제주가 몇 일전부터 제물을 준비한다. 제물은 떡, 생선, 과일 외 삶은 소머리, 엿, 밀가루로 만든 용(龍)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엿을 제물로 쓰는 것은 이 지역에서 미역 양식을 많이 하고 또 자연산 ...... 전승자 정보 동해안 일원에서 별신굿을 하고 있는 무격 가운데 대표적인 조직은 김석출(金石出, 일명 金京南) 일행을 꼽는다. 김석출가(家)의 내력을 보면 조부·김천득, 조모·이옥분, 부친·김성수, 모친·이선옥, 형·김호출이 모두 무업에 종사한 것이 대략 150년 가까이 되었다. 집단의 규모는 현재 약 80여명에 이르는데, 강원도 강릉에서부터 부산 동래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해안선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지역적 근거를 두고 지역의 단골되어 지역이나 마을의 굿을 담당한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5세 이래로 무악반주, 어정(무가), 꽃일(지화)등 전반을 익혔다. 사위 김동열, 딸 김동연, 김동언 외, 여러 제자들이 지화 제작을 돕고 있다. 이들은 1985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82-가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는 사람은 무악(巫樂)부문에 김석출, 무가(巫歌)부문은 그의 아내 김유선(金有善)으로 현재 부산직할시 동래구에 거주하고 있다. |
출처 : 여수지기
글쓴이 : 여수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