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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일제강점기 부산항매축

일제강점기 부산항매축

참고자료:부산항매축 부산시청

http://busan.go.kr/06_intro/02_history/04_07.jsp

 

조선시대구지도

 

 

 

 

1890년 1번숫지가보이는데가 용미산

 

부산해관부지매축


부산해관(釜山海關)은 1883년 6월「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의 체결로 1883년 10월 3일 인천·원산과 더불어 그 개설을 보게 되었다. 이 당시 부산항만 설비시설로는 일본전관거류지 동쪽 용미산(옛 부산광역시청, 현 롯데월드 자리) 아래 간단한 제방에 둘러쌓은 약 7,000평의 선류장 뿐이었다. 부산해관부지매축(釜山海關敷地埋築)은 부산 해관장은 1887년까지 청이 추천하는 영·독·불·이의 외국인이 역임하였고, 리홍장(李鴻章)이 추천한 何文德(Robert Hart)이 해관장으로 부임해오게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구한국정부는 부산해관의 설비·규모에 주목하여 오던 중 해관장(하문덕)은 해관부지 매립 허가를 구 한국정부에 매축허가와 공사비 1,000냥을 받아 청나라 기술자를 초빙하여 설계를 하고 우리나라 일꾼들로써 공사를 착공하여 1888년 4월 완공을 보았다. 매축된 자리에는 1889년 10월 공사비 2,546냥을 구한국정부로부터 교부받아 해관잔교(海關棧橋)와 보세창고를 세웠다.

 

 

1906년 해관부두

 

1906년 해관부두

 

1902년(광무 6)에 이르러 부산매축주식회사(일본인회사)가 설립되어 기존의 선류장에서 부산본역(구 부산역)의 부지에 이르는 일대를 매축하게 되어 1908년(융희 2) 8월 총면적 4만1천3백75평의 매축을 완료하였다. 이로써 종래 부산항의 배면에만 발전한 시가도 항만을 따라 차츰 북쪽으로 발전의 열기가 이어지게 되었다.

 

부산항시가 및 부근지도 1903년

부두 접안시설과 매축계획이 접선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일본이 청일전쟁(1894년)이후 대륙진출의 위한 교두보로

부산항을 개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는 지도이며 1902년 북항부두 확장공사 시작되면서 중앙동 일대는

신시가지로 조성되었다

 

1894년 부산항과 용미산 건너 영도

1936년 용미산자리은 영도다리공사을 하면서 사리지고 

 부산부청사건물로 세위지고 구부산시청으로 지금은 롯데백화점광복점 입니다.

 

 

부산해관부지매축

매축자리은 옛지명으로 논치어장 입니다

 

1909년 매축자리에 건물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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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영도에서 본 옛 부산항

 

 

북빈매축


부산항의 본격적인 매축이 시작되기는 부산 매축주식회사(釜山埋築株式會社 : 日本人 會社)가 설립되어 오늘의 중앙동 옛 부산역과 지금의 부산우체국과 세관부지와 중앙동의 중앙로 일대 북빈매축(北濱埋築)을 1898년 1월 구한국정부에 매축 허가를 요청하여 1900년 12월 8일에 매립을 허가하였다. 이때 허가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부산항 일본조계 동쪽해변을 매축하고, ② 경계는 부산감리와 해관장 및 일본 영사가 심의확정, ③ 許可後 20개월 이내에 기공하고 기공 후 6년내에 준공하여야 하며, 기간내 부득이 기·준공을 못하면 파기한다. 라고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으며, 훗날 이 매축허가 조항은 일본측의 요청으로??海關出張所 기타 특히 공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地所는 조선정부에서 실비로서 매환할 수 있다. 또한 기타는 매립자와 협의한 위에 실비에 다소의 이익을 가하여 매환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양해가 성립되어 그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 공사는 1, 2기공사로 나누어지는데 1기공사는 1902년 7월 19일에 착공하여 1905녀 12월 준공을 보았고, 2기공사는 1907년 4월에서 1909년 8월까지에 이르렀다. 1기 매축공사는 1902년 7월 19일 착공하여 1905년 12월에 준공되었으며, 이 공사는 일본청부업자인 大倉組가 담당하였고 하청부는 일본 下關의 蘇藤組가 인수하였다. 그동안 공사에 필요한 재료 및 기구일체는 조선국정부로부터 무관세의 특전을 받았다. 또 절영도의 토사, 석제 및 일본거류지묘지 토석을 무대가로 채취할 특권을 얻게 되었다. 공사중 소요 인원이 가장 많을 때는 1일 조선인 약 900명, 일본인 약 2,000명이나 되었고, 예선용기선 수척, 준설선 3척, 트럭 수백대가 동원되었다.

제2기 공사는 1904년에서 1909년 8월에 이르는 동안 8,747평을 매축하였고, 제 1·2기 공사에서 매축하여 얻은 토지는 41,374여평이었다. 이곳 북빈매축은 일본거류지를 보다 넓게 보완하여 부산에 있어서의 일제의 근거지를 보다 강고히 해준 사업으로 오늘날의 세관과 구부산역 자리가 여기에 속한다. 오늘날의 중앙동은 이때 바다가 메워져 부산항의 중심지구가 되었는데 현재의 중앙동의 중앙로 동쪽 지역은 매축이 되기 전은 바다였다. 1기공사를 직접 맡은 토건업체는 일본의 청부업(請負業) 조직인 大倉組였다. 이 공사 때 소요된 흙과 돌은 일본 조계지와 절영도(현 영도)에서 조달하였다. 지금의 중구의 용두산과 복병산(부산지방기상청가 있는 산)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 공사 때 깎아내려 중앙동과 부민동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큰길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의 대청로이다.

 

 

 

조그만한언덕이 용미산 왼쪽이 건물이 부산우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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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산 착평공사

 

 

 

영선산착평공사(營繕山鑿平工事) 이전 부산항은 동·북·서가 산으로 둘러싸여 남으로 절영도가 가로막아 천연의 양항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항구를 형성한 주위 산지(山地)로 말미암아 시가지를 형성하는 데는 좋은 편이 못되었다. 부산 매축회사의 공사로 얻어진 땅으로 넓은 지역을 일본인이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항만을 가진 서쪽 지역이 좁아 경부선 철도와의 연계가 불편했다. 따라서 항구의 선박과 철도의 열차 사이를 연결시키면서 육로교통의 원활을 위해 시가지 확장과 그 연결이 필요했다.

 

그 확장 연결로 가장 요긴한 일은 부두는 오늘의 중앙동에 있는데 경부선 종점은 초량에 있어 바다와 육지의 물량 양하역(揚下役)이 원활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일본인 전관거류지 지역인 현재의 중구지역과 동구지역인 초량을 연결되어 일본인 거류지에서 부산진으로 북상(北上)하는 일이 일본인들로 보아서는 요긴했다. 그렇게 북상과 해륙연계를 하려니 현재의 중구지역과 동구지역 사이 영선산(營繕山)과 영국 영사관산(영국이 조차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해발 130척(尺)으로 큰 장애물이 되어 부산항은 두 지역으로 나누어진 꼴이었다. 그래서 이 영선산과 영국 영사관산을 1909년 5월 착공하여 산을 깎아 내려[鑿平] 평지를 만들면서 그 산의 흙과 돌로 바다를 메워 1912년 8월 공사를 완료하여 4만4천7백80평을 얻었다. 공사에 소요된 총 공사비는 예산을 훨씬 초과하여 105만1천5백원이었다.

 

이 공사로 영선산과 영국 영사관산이 없어지고 초량 앞바다와 제1부두 사이 매축지에 호안(護岸)의 돌벽[石垣]과 바다에서 짐을 부리는 물양장이 축조되었다. 이 호안과 물양장 매립에는 영선산과 영사관산에서 나온 바윗돌을 이용했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었을 그때는 초량이 종점이 되어 있었다. 영선산과 영사관산이 가로막아 더 이상 남쪽으로 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산이 없어지자 초량 종점의 경부선 부산 본역이 중앙동의 세관이 있는 제1부두 쪽까지 뻗어나와 부산항의 선박의 물자와 인력이 육지의 경부선 철도에 바로 연계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륙침략의 길은 더욱 확고한 터전을 잡은 셈이었다.

 

이 부산항과 경부선 철도의 연계는 일제로 보아서는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부산에 형성하는 요긴한 일이었다. 그것은 대륙침략의 또 하나의 관문인 신의주의 압록강 가교공사(鴨綠江架橋工事)와 부산의 경부선 종점의 연장을 같은 시기에 획책한 일로서도 알 수 있다. 부산의 경부선 종점을 제1부두까지 연장하는 영선산 착평공사는 1909년 5월에 기공되어 1912년 8월에 준공된 데 대해 신의주의 압록강 가교공사 또한 같은 시기인 1909년 8월에 기공되어 1911년 10월에 준공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일본에서 오는 물자와 인력은 바로 중국대륙까지 나아가고 중국대륙의 물자와 인력은 바로 일본으로 수송하게 되었다. 오늘의 경부선 종점인 부산본역은 1969년 중앙동에서 초량으로 되돌아갔지만 옛 부산 본역이 중앙동에 있을 옛부산역 광장을 새마당이라 한 것은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 새로운 마당이 되었다고 해서 새마당이라고 했다.

 

영선산 착평공사는 부산 일본거류민단 사업으로 시행되었지만 형성된 토지 소유권은 구한국정부에 귀속되게 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공사비는 일본 거류민단이 일본 제일은행에서 대부하되 원리금 상환은 토지소유자인 구한국정부가 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일본 거류민단의 필요에 의한 이 사업이 한국정부가 관장하는 형식이 되었던 것은 토지의 소유문제와 일본정부의 힘이 작용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공사의 시작은 구한말이었지만 완공은 일제강점기 때로 공사대금의 원리금 상환도 일제강점 이후의 조선총독부가 정리하고 형성된 지역의 시설도 조선총독부 의도대로 이용되었다.

 

 

1910년 옛부산역 영선산

 

 

영선산 착평공사장면 뒤쪽이 있는 건물 옛부산역사

 

 대창정 지금의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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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고개

자료출처:부산중구청 http://tour.bsjunggu.go.kr/cms/cms_page.php?pindex=172

 

 

 

1960년 영선고개

 

 

 

영주동 부산터널 입구 삼거리 ~ 코모도호텔 앞 ~ 메리놀병원 앞 ~ 가톨릭센터 앞 ~ 대청 국제시장 입구 사거리(오늘날 위치) 예전엔 영주동 시장 남쪽 입구 ~ 부원아파트 뒤 ~ 논치시장 ~ 대청로로 이어지는 길을 영선고개라 한다.

그러나 이 고개는 본디 "영선고개"가 아니라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한때 불렸었다. 이 고갯길은 6.25 동란 때 부산에 상륙한 유엔군이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아스팔트 길로 닦아 냄으로써 "부산 아스팔트 도로 제1호"가 됐었다. 그래서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불렸던 것이다.


옛날부터 "영선고개"라고 불렸던 곳은 "유엔도로" 동쪽 밑에 있는 언덕 바로 윗길이 통하고 있는 고개였다.
이 "영선고개" 착평공사(1909~1912)때 헐려 없어진 "영선산" 등성이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산이름을 따서 붙인 고개 이름이다.

 

이와 같은 "영선고개"를 넘나드는 고갯길은 "초량왜관"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대낮에조차 사람이 혼자서는 좀처럼 나다닐 수 없던 소름 끼치는 으스스한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무렵 초량왜관 담장을 함부로 넘어다녔다가 우리나라 번병(番兵)에게 들킨 사람이 참수형을 당했던 곳이 바로 영선산 숲속이었기 대문이다. 게다가 그런 영선상에 우거져 있던 숲은 대낮에도 하늘을 가려 "영선고개"가 아주 어두컴컴해서 이 고갯길을 넘나들 때는 누구나가 으슬으슬 해졌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낮에도 무리를 짓고 "영선고개"를 넘나들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무렵 사람들이 "영선고개" 오솔길을 넘나들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초량왜관 객사(客舍)와 임소(任所)가 있던 영주동에서 초량왜관 사이를 오가는 길목이 바로 이 고갯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영선고개" 오솔길을 사람들 누구나가 마음 놓고 넘나들 수 있게 된 것은 1912년 영선산이 깡그리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신작로가 닦인 뒤부터였다.
소름 끼치도록 음침한 처형장 영선상이 헐리고 나자 "영선고개" 오솔길은 이때부터 우거져 있는 녹음이 오히려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가 하면 전망 탁 튀어 시원한 고갯길로 탈바꿈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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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매축공사


부산진매축공사(釜山鎭埋築工事)는 크게 1, 2, 3기로 나누어서 매축하였다. 제1기 매축은 1913년 6월부터 1917년까지, 2, 3기는 1926년부터 1932년 12월까지이다. 조선기업주식회사(朝鮮企業株式會社, 일본인 회사)가 부산항의 북부인 구관(舊館)에서 부산진(釜山鎭)에 이르는 40만평(실제 측량 때에는 558,150평이었음)을 40만원으로 매입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매축하가를 받아 시행하였다. 제1기 매축공사는 1913년 6월 착공하여 1917년 준공을 보았다. 이 때 매축으로 생겨난 땅이 144,188평이었고, 이 때의 호안공사 그동안의 개펄이 사라진 대신 바다와 육지의 구분이 확연이 들어나게 되었다.
2, 3기의 매축공사는 회사의 형편으로 중단되었다가 부산진매축주식회사(釜山鎭埋築株式會社)가 조선기업주식회사로부터 인수하여 2, 3기에 해당하는 범일동과 우암동 앞바다를 포함한 305,690평(혹은 313,240평, 소요 예정경비 478만원)의 매립허가를 받아 1926년 11월 매축공사를 착공하여 절반에 해당하는 162,050평은 1932년 12월(준공일이 정확하지 않음)에 준공하였다.

3기는 나머지 151,190평 매축을 1938년 8월에 준공할 예정이었으나, 부산항 매축공사에서 가장 큰 공사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준공일자를 알 수 없으며, 공사 진행에 관한 제반사항에 대하여도 알 수 없으니 대단히 유감스러울 뿐이다. 2, 3기에 매축된 범일동지구는 철도연락이 편리하여 공장지대로 유리한 자리였다. 그러나 매축이 완료되어도 중일전쟁 등으로 수요자가 나타나지 않아 빈터로 남아 각종행사가 이곳에서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정월 대보름의 부산진 사람들의 줄다리기가 매축지 공터에서 행해진 것도 그러한 보기였다.

 

 

100년 전 子城臺 주변의 옛 모습들

-부산광역시 중구 발행 「기록사진으로 보는 부산·부산항 130년」- 도록에서

자료출처:http://www.heritagekorea.com/cgi-bin/technote/read.cgi?board=news&y_number=42

 

子城臺 주변의 옛 모습들
<1905년경 경부선 철도가 관통하고 있는 釜山鎭 전경>
100년전인 1905년경 경부선철로가 개통되던 당시 그대로의 동천하구(왼쪽 중앙 부산진성 넘어)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해신제를 지냈던 영가대(중앙 숲이 보이는 부근)의 옛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1885년 子城臺 주변 釜山鎭 주민마을>
좌측 숲이 무성한 곳이 자성대로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성문(西門)에는 금루관(金壘關)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좌성대의 성벽과 서문(西門)이 보이는 유일한 사진으로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우암포이다. William Nelson Lovatt 해관장이 촬영한 것으로 원본은 그의 친척 후손인 미국 Alizona주 Scottsdale시 거주 Dorothy Shaw Gillette 여사 소장.


 

<1905년경 釜山鎭城 아래의 釜山鎭 주민 초가 마을>
사진 오른쪽에 영가대(永嘉臺) 의 일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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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자료들은 (부산 과거현재 비교 사진집 -억수로 보고 싶데이 / 한국의 여행.5 경상남도편-삼중당 1973 등)에서 이용했습니다.  어쟀든 동구를 대표하는 초량동이나 수정동 특히 수정동의 경우 조선시대 동래부 동평면 두모포라 불렀습니다.  1608년 이 지역에 왜관이 설치되어 도모포 왜관 .고관 등으로 불리워 졌습니다.  수정동이란 이름은 수정산 정상에 분지가 있었는데  그 일대를 조금만 파도 크고 작은 수정이 나와 수정산이라 부르고 산 아래 마을도 수정동이라 불렀다 합니다. 

 

부산진시장옛날모습

 

마을 뒷쪽 산비탈은 억새와 띠밭이었다 합니다. 그래서 초량이란 명칭은 풀()이 우거진 ()등성이 란 뜻입니다.

 

초량해안입니다. 철로가 보이고 마을이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데, 

해정리 (海丁里)라는 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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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대풍포매립공사


대풍포(大風浦)는 원래 대풍(待風)이란 말과 같이 방파제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어선이나 그 밖의 선박들이 세찬 바람과 풍랑을 피하는데 알맞은 곳이다. 부산항이 1876년 개항되면서 일본 선박왕래는 그 수가 증가함에 따라 지금의 중앙동 부산데파트 부근에 있었던 초량왜관의 선창으로는 자리가 비좁았다. 대풍포매립공사(大風浦埋立工事)가 본격화 된 것은 일본의 소형선 특히 어선들은 왜관 맞은편인 지금의 영도구 대풍포에 정박해서 그 해변에서 급수, 피난, 어선의 건조, 수리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즈음에 구한국정부의 고관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와 부산에 머물고 있었다. 부산주재 일본영사가 대풍포일대 사용을 구한국정부 고관에게 간청했다. 그러자 그 고관은 토지의 소유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구두로 사용을 허가하였다. 이에 한국인 소유주자는 그곳이 자기 소유라 밝혀도 정부 고관이 한 일리라고 동래부에서는 발뺌을 했다 한다. 토지 소유자는 동래부에서 대풍포일대의 토지소유 증명서를 발급받아 한양으로 올라가 정부당국에 소원하였으나 정부에서는 모두가 모른다는 핑계로 일관 했다. 결국 대풍포 일대의 개인소유 토지는 일본인 전관거류지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 뒤 일본인 志村이란 사람이 대풍포를 매립하려고 일본 거류민단의 승낙을 얻어 매립권을 최초로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志村이란 사람이 매립을 못하고 있는 사이 일본인 大澤이라는 사람이 일본인 거류민단에서 매립권을 양도받았다. 대풍포 매립공사는 1916년 착공하여 40,200여평을 매립하여 1926년 6월 준공하였다.

 

 

 부산항과 영도 1905년 용두산 용미산

 

 영도다리 건설당시 방파제공사 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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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항매축공사


일제강점기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 일대에는 2천여 개의 어장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 걸 맞는 기능을 충실하게 발휘할 수 있는 어항(漁港)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실정에 따라 남항을 전용어항으로 하는 추진체가 조직되어 1915년에 남항 건설을 위해「남항수축기성회」가 설립되면서 남항매축공사(南港埋築工事)가 대두되었다. 기성회 설립과 함께 일본인 하시마(迫間房太郞)에 의해 남항 건설의 필요성을 조선총독부에 진정하였으나, 10년이 지나도록 성과가 없었다.
부산상업회의소 회두인 카시이(香稚源太郞)가「남항수축기성회」회장이 되어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후 매축왕이라는 이케다(池田佐忠)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케다는 인천·목포·통영 등 여러 항만지역에서 매축공사를 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케다는 민간차원에서 남항을 매축하려고 1925년 5월 현장조사에 들어감으로서 시작되었다. 1926년 에는 설계를 완성하여, 동년 10월에는 부산남항 건설허가를 조선총독부에 신청하여 1928년 2월 9일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1928년「부산항합자회사」를 설립하였고 11월 9일에는 공사를 해도 좋다는 실행허가를 받았다. 이 공사는 대한해협의 거센 파도가 밀어닥치는 곳이어서 방파제를 쌓는 일이 난공사였다. 남항 건설공사에는 총공사비 5백50만원이 들어갔는데 공사진행 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5년 5월 부산 남항 실지 현장조사를 착수한 이후 1928년 2월 남항 건설공사 허가 신청인가를 받아 부산축항합자회사(자본금 5백만원)를 설립하였다. 1930년 5월 남항방파제, 남포동 해안 매축을 시작하여 1931년 4월 방파제, 1931년 8월 방파해벽, 1932년 12월 해안매축 1기공사를 준공하였다. 당시 매축된 부지는 44,860평(유효부지 30,898평)으로 평당 62원에 거래되었다.

남항매축 2기공사는 1934년 2월에 옛 충무초등학교(현 서구청)~충무동 5가 앞바다 매축을 시작하여 이 공사는 예정보다 늦은 1940경에야 준공을 보았다. 매축된 부지는 34,000평(유호부지 22,340평) 이었다. 남항의 매축은 우리나라 최대 어항·어업전진기지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두말할 나이도 없었다. 이와 같이 새로 마련된 호안의 길이는 약 1,026m로서 그 중에서 호안 석축이 약 286m였고, 하역장은 길이가 약 450m, 보수천 기슭의 호안의 길이가 약 230m였다. 새로 마련된 물양장은 남항의 이용가치를 높여 주었으며, 물양장의 넓이는 약 12m의 해안도로를 따라 넓이 약 6m로 비탈지게 간지석(間支石)을 깔아 하역작업이 편리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남포동 자갈치시장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남항은 우리나라 어업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1903년 자갈치의노인

 

1903년 북어장수

 

1903년 자갈치의 일꾼

 

1904년 영도에서 본 부산항

 

1906년 해관부두 뒷산이 용미산

 

1910년 남변해안 현재 남포동자리

 

1910년 부산어시장

 

1910년 부산어항 전경

 

1910년 영도에서 본 부산항

 

1910년 중구 전경

 

1920년 국제시장인근

 

1910년말 서부시가모습

 

1930년 자갈치연안

 

1930년 부산어시장

 

1930년 부산항과 용두산

 

1930년 서부시가모습

 

1930년 용두산에서 본 천마

 

1934년 영도대교

출처 : 부산촛불방송
글쓴이 : 부산촛불방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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