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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색을 즐긴 손중산(손문)

 

 

손중산(손문)과 4명의 부인

 

 

 

 

중국 국민당 국부 손중산(손문-)은  '롤리타콤플렉스(Lolita complex)를 가진 인물인데 그의 이런 '롤리타신드롬(Lolita syndrome)'은 그가 어린 여자를 좋아했다는 것, 특히 그의 일본 비밀부인- 11세의 소녀에게 성적충동을 느꼈던 사실을 보면 쉽게 그의  '롤리타증후군'에 대해 알 수 있다.

 

 

 

 

 

18세 때의 손중산

 

  손중산(손문-孫文)은 일생에 몇 명의 아내를 맞았는가? 그의 공개된 전기에는 오직 두 명밖에 승인하지 않았다. 한명은 노부인(노모정)이고 다른 한명은 송부인(송경령)이다. 사실 손중산에게는 진수분이라 불리우는 또 한명의 첩이 있었는데 손중산 가문의 족보에는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본마누라 노모정(1885년 결혼, 1915년 이혼)86세까지 살았고 첩 진수분은 1891년부터 손중산과 동거하다가 1912년 가을에 손중산을 떠났으며 89세까지 살았다. 그리고 후처 송경령은 1915년에 22세의 나이로 49세의 손중산과 결혼했으며 89세까지 살았다.

   손씨 후배들은 손중산의 세 부인을 모두 조모라고 불렀다. 손중산의 후손 손필달에 따르면 손씨 가문에서는 진수분을 《남양부인》이라 불렀고 노모정은 손중산과 이혼 후 마카오에서 살았기 때문에《마카오부인》이라고 불렀으며 손경령에 대해서는 《상해부인》으로 불렀다.  손씨 후배들은 또 노모정을 《대부인》으로, 진수분을 둘째부인》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손경령에 대해선 《셋째부인》으로 부리지 않았다. 손중산의 아들 손과도 아이들이 부르는 대로 따라서 손경령을 영어로 《grandma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 외 손중산에게는 또 한명의 일본적을 가진 비밀부인이 있었는데 손씨 가문의 족보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손중산의 본마누라 노모정부인

 

 

 

 

노모정

 

 

  18661112일 밤, 손중산은 광동성 향산현의 취형촌에서 태어났는데 애명이 제상이고 입학할 때 《孫文》(손문)이란 이름을 지었으며 그가 1897년 일본에 망명하여 도쿄의 한 여관에 투숙했을 때《中山樵》란 가명을 썼는데 후에 혁명당인들이 편리를 위해 《中山》(중산)이라고 불렀다. 손중산의 가문은 할아버지 손경현때부터 토지가 없었으며 아버지 손달성은 마카오의 한 신발점에서 학도로 있었다. 손중산의 아버지 손달성은 32살 때에야 겨우 고향의 양승휘의 딸과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 후 선후로 손미, 손묘천, 손중산, 손추기 등 4명의 아들딸을 보았다. 송경령의 회상에 따르면 손중산의 집은 가난하여 손중산은 15살 때에야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손중산이 5살 때 그의 형님 손미는 단향산에 가서 고용일꾼으로 일하다가 후에 단향산을 발달시켰다. 1883년 가을, 손중산은 북극전의 신상을 훼손시켰는데 마을 사람들이 격분하여 들고일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무서워서 아들을 홍콩에 피신시켜 공부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손중산은 형님 손미가 있는 단향산으로 갔는데 형님의 엄한 단속이 싫어서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났다가 18854월에 다시 고향 취형촌으로 돌아왔다. 그때 동생을 몹시 사랑한 손미는 동생의 성격이 굳센 것을 보고  어떻게 관할할까 생각을 굴리다가 결혼시켜 마누라의 손에 맡기는 것이 상책이겠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집에 목돈을 보내어 동생을 공부시키는 외에 하루 빨리 동생을 결혼시킬 것을 부모에게 부탁했다.     

    《그놈이 다시 젊은 혈기로 말썽을 일으켜 부모님들이 마을사람들 앞에서 욕보는 일이 없도록 하자면 그놈을 하루 빨리 결혼시켜 가정에 마음을 붙이게 해야 합니다.

    손중산의 부모들은 신속히 며느리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양태부인 자매의 시댁이 향산현 상공도외영향(지금의 주해시 금정구 외사향)에 있었는데 그 마을 노요현의 큰딸 노모정이 손중산과 짝이 맞는다고 여겼다. 두 집 가문의 문벌이나 연령, 경제정황 모두가 맞는 혼인이라고 여겼다. 노요현은 공부하다가 후에 바다를 건너 단향산에 가서 손미와 함께 화교로 있으며 장사를 하여 부유해지기 시작했지만 병으로 사망하여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노모정의 집은 손중산의 집과 몇 리밖에 안 떨어져 있었지만 이전에는 노씨와 손씨네 두 집에서 내왕이 없었다. 그때는 부모가 혼인을 주관하고 매파를 보내 혼약을 맺을 때라 노모정과 손중산은 서로 만나 얼굴도 볼수 없었다. 손중산은 청나라를 반대하는 혁명에 나섰기에 생활이 온정되지 않았으므로 잠시 결혼하고싶지 않았다.  

    게다가 소년시절에 단향산에 있으면서 서방의 혼인자유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봉건예교에 대해 매우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부모의 전통적인 세속습관을 접수할 수 없었다. 손중산은 의표가 당당하고 용모가 준수하고 체구가 장대했으며 재주가 뛰어나고 문화수준도 상당했으나 노모정은 체구가 왜소하고 어릴 때부터 종발을 했고 용모도 수수한 내향적인 성격의 구식여자였다. 그러나 손중산은 부모를 존중하고 효도해 온 데다가 또 혼인대사를 청나라를 반대하는 혁명처럼 중하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부모와 형님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1885526, 20살의 손중산은 노모정과 혼인을 정했고 얼마 안되어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손씨네는 부유했기 때문에 혼례식은 아주 굉장했다. 그러나 손중산은 그의 형님 손미의 희망대로 가정의 울타리에 속박되지 않고 결혼 3개월 후인 그해 8월에 집을 떠나 홍콩의 중앙서원에 복학하였다. 결혼 전에 손중산은 홍콩 영국식민지당국이 꾸린 중등학교인 중앙서원(1889년에 역다리서원이라 개명했고 1894년에 또 황인서원이라고 개명함)에서 공부했었다. 1886년 여름, 손중산은 《의술을 배워 사람을 구하리라》는 포부를 품고 벼슬도, 전교사직업도 포기하고 미국 기독교장로회에서 꾸린 광주박제병원 부속 남화의학당(현재의 광주중산의학원부속제2병원)에 들어갔고 1887년에 또 홍콩아려씨병원에서 개설한 서의서원(홍콩대학의학원전신)에 들어갔다. 그는 책 속에 묻혀 있다보니 휴가일에만 집으로 돌아가 결혼 첫날에야 알게 되었던 부인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 부부감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나 현숙하고 사리에 밝고 말수가 적은 노모정은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마다 깍듯이 맞아들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손중산은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근로하고 현숙한 아내에게 감동되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노모정은 큰딸로 홀로된 어머니와 함께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아 오다보니 어려서부터 부지런했고 어른들을 존경해서 동네방네에서 착한 처녀로 소문이 났었다. 비록 손중산은 집에 돌아오는 차수가 적었지만 그가 돌아올 때마다 노모정은 새옷 한 벌과 신발, 양말 등을 직접 정성껏 만들어 남편에게 드리곤 했다. 시어미가 입은 옷도 그녀의 손으로 지은 것이었다. 노모정(1867-1952)과 손중산은 자유혼인이 아니었지만 혼인생활이 원만했으며 손과, 손연, 손완 세 자녀를 낳았다. 노모정은 어려서부터 종발을 한데다가 성격이 내향적이어서 손중산이 각지에 다니며 혁명활동을 할 때 남편을 따라 다닐 수 없었다. 신해혁명전후 8개월간 노모정과 둘째 딸은 모두 빈성에 잠시 거주했다. 혁명이 성공한 후 그들은 배를 타고 귀국했고 노모정은 무심중에 제1부인이 되었다.

    1915, 손중산은 송경령을 부인으로 맞아드리면서 노모정과 협의이혼을 했다. 노모정은 만년에 마카오에 거주했는데 1949년후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은 매우 적었고 그녀의 사진은 장시기동안 광동성 중산현 취형촌의 고향에 걸려 있지 못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손중산에게 본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독자 손과의 생모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지 못했다.

 

 

 

 

  손중산의 첩 진수분

 

 

 

 

진수분

 

 

 

 

손문과 진수분이 동거하던 홍루

 

 

 

 

 

 손중산의 부인이 송경령이라는 것은 천하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손중산에게 노모정이란 본부인이 있었고 그녀가 바로 손과의 생모라는 것도 후날에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지만 손중산의 첩 진수분(1873-1960)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아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 진수분은 손중산의 혁명전우로서 본적이 복건성 하문시 동안이며 의사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하문상인을 따라 홍콩에 왔기에 그녀의 출생지는 홍콩이었다. 진수분은 1873년에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이 향릉(서분이라 불리우기도 했음)이며 넷째였다. 진수분은 몸매가 매끈하게 잘 빠진데다가 미모가 뛰어났고 고생을 잘 견뎌냈으며 현숙한 여자였다.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일찍 돌아갔기에 공부를 하지 못해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글을 모른다고 한다. 그녀가 일찍 남양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기에 일반적으로 그녀를 남양사람으로 오해하고있다. 마카오적 남양화교로 오랫동안 홍콩에 거주했다고 전해온다.

    1891년의 어느 날, 19살의 진수분은 툰문기독교 교당(미국기신회)에 있었는데 진소백의 소개로 손중산을 알게 되었다. 첫 대면에서 손중산은 그녀에게 홍수전, 석달개를 본받아 청나라를 뒤엎겠다고 표시했다.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난 진수분은 손중산의 호언장담에 매우 감화되었으며 그를 숭배하는 마음으로 혁명에 참가했다. 같은 지향을 가지고 혁명을 하면서 손중산과 진수분은 혁명전우로부터 서로 사랑하는 한 쌍의 부부로 되어 세를 맡은 홍루에서 동거하면서 부패하고 무능한 청정부를 반대하는 계획을 공동히 세웠다. 그해 손중산은 26살이었고 서의서원을 졸업하기 1년 전으로 손과도 그해에 출생했으므로 1891년으로 추산된다.

    그들은 1891년부터 10여년을 함께 생활했는데 진수분은 다년 내 손중산을 따라다니면서 일본. 신마일대에 발자국을 남겼다. 진수분은 손중산선생의 혁명초기의 친밀한 반려였다. 손중산이 일본과 남양에서 혁명활동에 종사할 때 진수분은 줄곧 따라다니며 좌우에서 사업과 생활을 돌보았다. 그녀는 늘 혁명동지들의 옷을 빨아주고 밥을 지어주었으며 비밀편지를 나르기도 했고 심지어 군수물자를 나르는 위험한 지하사업에도 종사했다. 손중산이 일본에 망명해 있는 기간에 그녀는 손중산의 연락원으로 혁명동지들을 엄호하면서 손중산의 곁에서 10여년을 함께 생활하고 사업했는데 후에 폐결핵에 걸려 손중산에게 전염시킬까봐 10 여년 동안 사랑해온 남편을 떠났던 것이다.

    손중산가문의 족보에 진수분은 첩으로 기재돼 있으며 진수분과 노모정은 아주 마음이 잘 맞아 자매지간 같았다고 적혀있다. 진수분은 만년에 중산현에 거주했는데 수양딸 소중영(후에 손중영으로 개명했음)과 사위 손건(손중산의 큰형 손미의 둘째 손자)이 부양했다.

    진수분은 손중산과 정식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손미와 노부인은 그녀를 첩으로 승인했다. 1960년 가을, 연로하고 허약한 진수분은 홍콩에서 사망했는데 향년 87세였다. 모종의 원인으로 장례식은 간단하게 행해졌는데 신문에 내지 않고 부고도 내지 않은 채 총망히 전만의 화인묘지에 묻혔다.

    1986년 말, 진수분의 사위 손건이 홍콩에 돌아와 장모 진수분과 아내의 유물을 수습하고 장모의 유골을 중산현 취형촌 손씨 가족의 묘지에 옮겨다 모셨다. 비석에는 《손진수분부인지묘 사위 손건이 외손 필승, 필흥, 필달, 필성, 필립을 인솔하여 건립》이라고 썼다. 이러한 사실은 가까운 사람들은 알고있었지만 이전에 손중산의 전기를 쓸 때에는 누구도 감히 진수분에 대해 쓰려고 하지 못했다. 그것은 국부 손중산의 형상에 영향이 있을까봐 회피하였던 것이다.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수분은 손중산의 혁명전우였고 그 당시에는 처첩제도가 합법적이었으므로 손중산의 좋지 못한 행위라고 할수 없었던 것이다. 손중산의 형님 손미도 진수분을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그녀를 위해 마카오에 집을 사주었던 것이다. 진수분은 중국혁명에도 한몫을 담당했고 손씨가족에도 공로가 있었다. 이러한 인물에 대해서 역사학가들도 점차 장애를 물리치고 진수분의 혁명에 대한 공헌과 손중산과의 진정한 부부관계 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여 그녀에게 역사적인 공정한 평가를 해주려고 나섰다.

    그럼 1912, 진수분이 무엇 때문에 손중산과 헤어졌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근년에 의논이 제일 많았는데 《폐결핵설》외에 많은 사람들이 진수분은 공부를 얼마 하지 못하여 문화지식에 결핍한 데다가 자신의 출신 등으로 자비감을 가졌을 것으로 분석 추측하고 있다. 다른 하나의 원인은 진수분은 손중산과 10여년을 함께 동거생활을 하였지만 명확한 신분을 가지고있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그러한 정황에서 일정한 압력을 느꼈을 것이다. 후에 송경령이 나타났고 또 송경령이 1915년에 손중산과 결혼하였는데 이것이 후날 진수분이 줄곧 손중산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였을 것이다.

    1912년 가을, 진수분은 마카오 풍순당 4호 손미의 집에 거주했다. 진수분은 손중산이 임시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도리어 공로를 감추고 은퇴하여 죽는 날까지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활이 매우 소박했으며 민국초기 여학생의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하고있었다. 진수분은 《나는 중산을 따라 반청혁명을 하고 중화민국을 건립했으니 이는 나의 구국구민의 소원을 이룩한 것입니다. 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지식이 짧습니다. 중산과 헤여진 건 내가 자원적으로 그를 떠난 것이지 그가 나를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를 잘 대해주었습니다.》하고 말하고 친우들과 고별하고 홀몸으로 말레이시아반도에 가서 은거했다. 1915, 손중산과 송경령이 결혼한 소식을 듣고 진수분은 《중산이 송부인을 맞은 후 지식 있고 현숙한 부인이 안에서 도와주게 됐으니 사업이 순리로울 것입니다. 응당 그들을 축복해야지요.》하고 말했다. 그녀는 부귀영화를 뜬구름처럼 가볍게 생각했지만 당지의 화교계인사들은 그녀의 특수한 신분을 알고 그녀를 《손부인》,손마님》하고 부르며 존중했다. 1915, 손중산과 송경령이 결혼했을 때 진수분은 42살이었는데 신변이 외로워서 한 소씨 화교의 여자아기를 양딸로 부양했다. 수양딸은 이름을 손용(일명 중영이라고도 함)이라 불렀는데 모녀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다. 얼마후 손과가 처음 출국고찰을 할 때 특별히 그녀를 방문하여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마카오에 와 거주할 것을 요구했다.   

    진수분은 손중산과 헤여진후 손중산의 큰형 손미의 집에서 얼마간 생활했고 손미가 사망한 후 손중산의 아들 손과의 도움으로 광주에 옮겨왔다. 1925312, 손중산이 서거하자 멀리에서 비보를 들은 진수분은 대성통곡했다. 그녀는《나는 중산과 헤어졌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이한테 가 있었어요. 그이가 북경에서 병이 위급하단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매일 밤 꿈에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그이를 만났어요.》하고 말했다. 그녀는 상복을 입고 7일동안 손중산을 추모했다.

    1931, 9.18사변》후 진수분은 손과(그 당시 행정원장)의 요청에 의해 양딸 손용을 데리고 귀국하여 광주에 거주했다. 거기서 5년간 손과의 가무일을 도왔고 손과의 아들 손치평, 손치강 형제와 자신의 양딸 손용의 뒷바라지를 착실히 하여 그들 셋이 선후로 대학에 입학하는데 공헌했다. 1936, 장개석은 남하하여 광주에 왔는데 그는 진수분이 일본에서 있을 때 자신을 도와준데 대해 보답하기 위해서 친히 편지를 써서 당시 사법원장이였던 거정에게 부탁해 진수분을 방문하게 했으며 거금 10만원을 보내여 그녀가 집을 짓고 양로하는데 쓰도록 했다. 1937, 진수분의 양딸 손용과 손미의 둘째 손자 손건이 사랑하게 되었는데 고모와 조카지간(손용은 손중산의 양딸인 셈임으로 손미의 자녀들과 한 항렬인 남매인데 손건은 손미의 손자이니까 손용의 조카인 셈이다)이라는데서 친척노인들의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서로 혈연관계가 없다는데서 손과가 찬성해 나섰다. 손용은 원래의 성씨를 회복하여 이름을 소중영이라 고치고 이딸리아에 가서 손건과 결혼하였다.  진수분은 비록 후에 손중산과 함께 생활하지 않았지만 선후로 손미, 손과 및 손건 등 손씨 집안의 사람들에게 부양되었다. 진수분의 양딸 소중영은 암으로 진수분보다 2, 3년전인 1958년에 사망했지만 손씨네는 진수분이 슬픔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소중영의 사망소식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

    손중산의 일본 비밀부인

      1984년 일본통신사의 보도에 따르면 한 일본교수가 요코하마에서 손중산박사의 78세의 딸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학자의 이름은 쿠보타인데 일본여자대학의 교수이다. 그는 이 연구를 책임졌는데 그가 밝힌 이 여자의 이름은 미야가와 후미코로서 요코하마에 거주한다고 한다. 쿠보타의 연구에 따르면 손중산이 1898년에 요코하마의 중국성에 갔을 때 처음 미야가와 후미코의 어머니를 만났는데 당시 손중산은 예쁘장한 11세의 소녀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그 소녀를 잊지 못하고있던 손중산은 1901년에 그 소녀의 아버지에게 딸을 달라고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 그 당시 그 소녀는 14살이었고 손중산은 36살이였다. 소녀의 어버지가 성을 내며 거절한 이유는 딸이 아직 너무 어리고 손중산이 나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후 손중산은 직접 그 소녀에게 청혼하여 요코하마에서 간단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손중산은 혼자서 동남아, 미국에 갔다가 1905년에 일본에 돌아와 어린 부인을 다시 만났고 1906년에 그들 사이에 딸이 출생했다. 딸의 이름을 미야가와 후미코라고 지었는데 후미코의 《후미》는 손중산의 이름《문》자로 표기할 수도 있는데 이는 손중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런 이름을 달아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중산은 딸이 태어나기 전에 일이 있어 일본을 떠났고 다시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다. 미야가와 후미코의 어머니는 후에 두 번이나 재혼했지만 손중산과 서신거래가 있었다. 이 일본 비밀부인 오오츠키 카오루는 1970년에 사망했는데 향년 82세였다. 미야가와 후미코는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다른 집에서 부양했다.

    손중산의 미국 친우들도 손중산이 일본에 딸이 있으나 이름은 모르며 일본적의 부인의 소생이라고 하였다. 이 동양부인의 이름은 오오츠키 카오루인데 사망하기 전에 녹음테프와 구술기록을 남겨놓았다. 오오츠키 카오루의 부친은 중국과 무역왕래가 있은 상인이었는데 손문(손중산)이 그의 집에 숨어있을 때 11세의 오오츠키에게 반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움텄는데 4년 후에 그녀한테 청혼하여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오오츠키 카오루는 15세의 요코하마 여자중학교의 학생이었다. 손중산과 오오츠키 카오루 사이의 딸 미야가와 후미코는 명치 395월에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즉시 다른 집에 양녀로 들어갔다. 미야가와 후미코는 소화 30년에 당시 도찌기에서 살고있던 생모 오오츠키 카오루에게서 듣고 자신의 진정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비밀은 쿠보타교수에 의해 증실되었는데 쿠보타교수는 고베의 화교역사박물관 등에서 연구할 때 녹음테프를 발견했다. 녹음테프에는 온병신》이란 이름이 나왔는데 오직 중국근대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만이 온병신이 손문(손중산)의 동지라는것을 알고있으며 손문의 요코하마에서의 행적을 알고있는 소수인들만이 녹음테프에는 오오츠키 카오루와 손문의 관계가 녹음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1984년의 《독매신문》보도에 따르면 당시 78세의 은발의 미야가와 후미코는 아들며느리와 함께 요코하마 서구에 거주하고있는데 기자의 취재를 접수했을 때 《나는 어머니한테서 듣고 내가 손문선생의 딸이라는것을 알았는데 손씨가족의 입장을 고려하여 공개하지 않았습니다.》하고 말했다. 

 

 

 

 

   손총리의 부인 송경령

 

 

 

 

손문과 송경령의 결혼사진

 

 

 

 

젊은 시절의 송경령

 

 

  재주가 출중했던 송씨 3자매 중 맏이 송애령은 공상희한테 시집갔고 둘째 송경령은 손중산한테 시집갔으며 막내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시집갔는데 송경령과 손중산의 결합이 없었다면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합도 없고 장, , , 4대가족의 결합도 없었을 것이며 20세기중국의 역사는 다시 씌어졌을 것이다.

    송경령은 일명 경림이라고도 하는데 상해에서 태어났으며 부모가 모두 교사이고 기독교신자인 서구식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송가수, 어머니는 예계진, 언니는 송애령, 동생은 송자문, 여동생은 송미령 그리고 동생 송자안과 송자량이 있다. 1908년에 송씨자매는 배를 타고 미국유학을 떠났는데 1913년에 미국 죠지아 여자대학철학계를 졸업했다. 송경령은 졸업 후 1913829일에 일본 요코하마로 갔는데 이튿날 아버지와 언니와 함께 손중산을 방문했다. 송경령은 처음 자신이 숭배하는 혁명가를 만났던 것이다. 비록 19년전, 아기포대기에 싸여있을 때 손중산을 만난적이 있었지만 손중산의 생김생김을 기억할 수 없었다. 손중산을 만난 송경령은 매우 흥분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언니의 행렬에 가입하여 손중산을 도와 영문문서를 정리하고 처리했다. 19149월에 송애령이 상해에 돌아가서 공상희와 결혼하면서 송경령은 언니를 대신해 손중산의 비서가 되었다. 송경령은 손중산의 영문비서로 사업하면서 아버지의 친구인 혁명가에게 까닥 모를 감정이 움텄는데 그녀의 부모들은  그 사실을 안후 그들의 혼인을 견결히 반대했다. 나이 차가 아버지벌이 되고 또 손중산에게 처와 3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그들의 사랑에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서행만기》로 유명한 미국기자 스노가 30년대에 송경령에게 《어떻게 되어 손선생을 사랑하게 되었는가》고 물었을 때 그녀는《당시 나는 그이를 사랑한것이 아니라 존경하고 흠모했어요. 내가 그이의 사업을 협조할 때 소녀의 낭만적인 소망으로 시작했지만 이는 아주 소중한 소망이었지요.》하고 대답했다. 송경령은 손중산과 함께 사업하면서 그때까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은 송미령에게 연속 편지를 썼는데 편지에는 손중산과의 사업의 유쾌함과 기대에 대해 열정적으로 서술했다. 19156, 송경령이 손중산과의 혼사문제로 상해에 돌아가 부모의 허락을 요구했을 때 송씨가문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놀랐다. 부모들은 성이 나서 손중산을 욕했고 어머니 예계진은 눈물을 흘리면서《손씨에게는 본처가 있고 아들 손과도 너보다 이상인데 너 정신 있냐?》하고 딸의 마음을 돌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래도 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자 아버지는 딸을 집에 가둬 두기로 결정했다. 이에 손중산의 친구들도 손중산에게 일을 더 수습할수 없게 되기전에 그만두라고 제기했지만 손중산은 《내가 만약 경령이와 결혼한다면 이튿날로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소!》하고 잘라 말했다.

    19156, 손중산은 송경령과 결혼하기 위해 본부인 노모정을 마카오로부터 일본에 데리고 와서 이혼수속을 했다. 그해 10월의 어느 날 밤, 집에 갇혀있던 송경령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024일 점심, 손중산은 일본 도쿄에서 송경령을 영접했고 이튿날 결혼수속을 밟았다. 49살의 손중산과 22살의 송경령은 그날 오후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축하하러 온 중국인은 몇명 밖에 안되었다. 손중산의 혁명전우 호한민도 혼인을 그만두라고 권고했지만 손중산은 사생활을 간섭하는 것을 거절한다고 했다. 송경령의 부모는 딸이 도망친 것을 알고 배를 타고 일본까지 쫓아와서 딸의 혼인을 막으려고 했다. 30년대 스노가 이 일에 대해 물었을 때 송경령은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까지 쫓아와서 크게 화를 내면서 중산을 마구 욕하면서 혼약을 폐지하라고 요구했다가 중산이 들어주지 않자 중산과 절교하고 나와 부녀관계를 단절하겠다고 했어요.》하고 말했다. 

    그 당시 송가수는 손중산의 거처까지 찾아와서 대문 앞에서 《난 내 딸을 빼앗아간 총리를 만나보겠다!》하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손중산은 문을 열고 나와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하고 물었다. 그러자 격노한 송가수는 뜻밖에도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아직 셈이 못든 내 딸을 자네에게 부탁하네.》하고 머리를 조아리더니 가버렸다.

    송경령은 만년에 부모의 명을 거역하고 손중산과 결혼하던 일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난 아버지도 사랑하고 손문도 사랑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가슴 아파요.

    송씨부부는 딸과 손중산의 결혼을 막지 못했지만 송경령이 시집갈 때 가구와 백자비단 등을 보내주었다. 송가수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며 동년배인 손중산의 장인이 되어 달갑지 않고 난처했지만 손중산의 오랜 친구로서 정치상에서는 계속 사업을 함께 했다.

    19151026, 손중산은 노모정과 협의이혼을 한 후 일본 도쿄에서 송경령과 결혼했다. 1922, 진형명이 손중산을 배반하여 도망할 때 송경령은 불행하게 유산했는데 그후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1925312, 손중산은 간암으로 사망했는데 향년 59세였다. 송경령은 남편의 사업을 계속해나갔는데 국민당은 그녀를 《국모》라고 불렀다.   

      

                         

 

 

 

 

 

만년의 송경령

 

 

출처 : 김희수의 둥글둥글 세상 사는 이야기
글쓴이 : 이렇게 살수 없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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