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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조선왕조 임금들의 한글 편지 보물로 지정되어야!

조선왕조 임금들의 한글 편지 보물로 지정되어야!

    - 한글은 조선왕조 왕실의 문자로 계승하여 세계 앞에 한글국호를 표방하였다 - 

 

 

561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정조가 세손일 때 쓴 한글 편지가 화제이다. 흔히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조선왕조가 한글의 대중화에 실패한 것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특히 세종대왕 이후 한글이 서민들이나 아낙네의 언문으로 격하시켜졌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글비문이 국가보물로 지정되었다면 정조를 비롯한 조선왕조 임금들의 한글 편지들도 마땅히 보물로 지정되어야 한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그 후계 왕손들이 한글로 편지를 썼다는 것 그 차체는 조선왕조의 한글왕통의 실체이며 문자왕조의 힘이다.

 

특히 정조 처럼 8살 때 세손으로 책봉된 어린 왕손들에게도 한글을 가르쳤다는 것은 한글은 조선왕조의 지식과 정신을 이어받는 임금 계보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정조대왕이 세손일 때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편지

 

 

▲ 정조가 원손(元孫)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 정조는 8살에 세손(世孫)으로 책봉된다. 왕의 세손으로서 한글을 교육하고 그것을 왕가의 친척들에게 편지로 사용하도록 한 것은 한글과 조선왕조의 왕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자였는지를 알게 한다. 

 

외숙모에게 보낸 어린 정조의 편지 내용음 다음과 같다. 어린 아이로서 당시 문법으로도 틀리거나 글자가 생략되기도 했지만, 한글로 문안하는 깊은 마음을 잘 전달하고 표현을 귀엽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叔母主前

                       (숙모님께)

 


상풍에 긔후 평안하오신 문안 아옵고져 바라오며
                       (가을 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오며)


뵈완디 오래오니 섭~ 그립사와 하옵다니
                       (뵈온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셔 보압고 든~ 반갑사와 하오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한아바님 겨오셔도 평안하오시다 하온니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시오니)

 

깃브와 하압나이다
                       (기쁘옵나이다.)

 

元孫

                        (원손)

 

 
       

 

*훈민정음 언해본 : 서강대 도선관 소장


세종임금이 한글을 창제한 뒤 왕가 내부에서는 한글을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지고 실제로 생활 속에서 써왔으며 그런 전통에서 여러 임금들이 한글로 편지를 쓴 내용들이 남아 있다. 한글로 편지를 쓴 조선왕조 임금들은 선조, 숙종ㅇ, 효종, 인선왕후, 정조 흥선대원군, 효종비의 친필한글 편지 등이 남아 있다. 

선조가 정숙 옹주에게 보

낸 편

2. 선조가 정숙옹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세종대왕으로부터 한 세기 반 정도 후인 1603년(선조 36) 선조가 정숙 옹주에게 보낸 편지이다. 정숙 옹주가 17세 때 그 동생인 정안 옹주(14세)가 마마(천연두)에 걸려 치료 중이었는데 그 병세를 걱정하는 내용으로 언니 정숙 옹주가 보내온 편지에 대하여 선조가 보낸 답장 편지이다. 이 편지 때문인지 그뒤 정안옹주는 병이 다 나아 정숙옹주보다 훨씬 더 장수 하였다고 한다.

 

                                              

글월 보았다. (정안 옹주의 얼굴에) 돋은 것은, 그 방이 어둡고 날씨도 음(陰)하니

햇빛이 돌아서 들면, 내가 친히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과 의녀를 들여 대령하게 하려 한다. 걱정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
만력 31년(선조 36, 1603년) 계묘년 11월 19일 오전 10시경

 

 

3. 숙종임금이 어머니인 명성왕후(현종비)에게 보낸 한글 편지

 

근년에도 다른 사람의 주소 속에 편지를 보낼 경우 아무개 '방'을 쓰듯이 1680년경에 씌여진 이 편지의 봉투에도 수신처가 현종비가 아닌 '명안공주방'(明安公主房)으로 되어 있는 것은 현종비가 혼인한 지 얼마 안된 셋째 딸 명안공주 집에 다니러 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어머니가 누이동생 집에 가서 환궁 기일을 지키지 않자 숙종임금이 환궁을 재촉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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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왕 어필 (수결)

 

밤사이 평안하시옵니까. (대궐을) 나가실 때 “내일 들어오시옵소서” 하였사온데,

해창위(海昌尉, 명안공주의 남편인 오태주(吳泰周))를 만나 떠나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아무리 섭섭하셔도 내일은 부디 들어오시옵소서.

 

 

4. 효종임금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장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1641년(인조 19) 효종이 23세의 왕자시절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었을 때 장모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으로 보낸 한글편지이다. 한자를 쓰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도 한글로 편지를 쓴 조선왕조의 왕족들을 보라. 특히 효종의 한글 편지에서 주격 조사 ‘가’가 사용된 점이 주목된다. 

 

효종은 함께 잡혀 와 있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유명한 김상헌(金尙憲)의 고생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끌려 온 김상헌은 이 때 이미 72세의 나이였다. 편지 끝의 ‘호’는 효종의 이름인데, 후대에 와서 임금의 이름을 가리기 위해 휘지(諱紙)를 붙여 놓았다. 국제적인 상황에서도 나라의 위태로움과 신하를 걱정하는 왕의 마음을 한글에 담아 보냈다는 것은 조선왕조의 정신이 한글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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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장모에게 보낸 편지
           
답상장(答上狀)
             장정승(張政丞) 댁(宅) (手決)


새해에 기운이나 평안하신지 궁금합니다. 사신(使臣) 행차가 (심양으로) 들어올 때

(장모님이) 쓰신 편지 보고 (장모님을) 친히 뵙는 듯, 아무렇다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의 호)은 저리 늙으신 분이 (심양에) 들어와 어렵게 지내시니

그런 (딱한) 일이 없사옵니다. 행차 바쁘고 하여 잠깐 적사옵니다. 신사(辛巳, 인조 19년,

1641년) 정월(正月) 초팔일 호(淏)

 

5. 인선왕후(효종비)가 둘째 딸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

 

숙경공주(淑敬公主)는 효종과 인선왕후 사이의 막내딸이다. 효종 10년(1659)에 원몽린(元夢麟)에게 시집갔다. 이 편지를 보낸 시기는 효종 10년(1659년)~현종 12년(1671년) 사이인 1659년 즈음으로 추정되고 있다.

 

17세기 중반 인선왕후의 한글 편지는 70여 편이 남아 있다. 문장이나 서체를 정성들여 쓴 것을 보면 한글은 그저 수단이 아니라 정신적 의사 교류문자로서 그 위치를 확실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폰트가 전형적인 궁서체를 보여주고 있다.

 

이 편지는 막내딸 숙경 공주가 혼인한 후, 궁에 들어왔다가 나가게 되었을 때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편지 사연 중간의 가로획(一字)이 들어가는 곳은 문단이 바뀜을 표시하고 있다.

인선 왕후가 숙명 공주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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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쓴) 편지 보고, 아무 탈 없이 있으니 기뻐하며, (너를) 보는 듯 반가워한다.

사연도 보고 못내 웃었다. 그만큼 하여 두면 아무리 쓰려고 한들 임자 없는 일에

뉘라서 애써 할 사람이 있겠느냐. 옷감도 지금까지 못 얻었으니 그것이 완성되기

어려울까 싶다. 너무 조르지나 마라.

/ 숙경(淑敬)이는 내일 나가게 되었다.

그것(=숙경)조차 마저 나가면 더욱 적막할까 싶으니 가지가지 마음을 진정치 못할까 싶다.

언제 너희나 들어올까, 눈이 감기도록 기다리고 있다.

 

6. 흥선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왕족들이 부부간에도 한글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한자는 이미 조선왕조의 글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단지 여성에게 배려하기 위한 차원 이상 임금들 자신들마저 한글을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국문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청나라에 가 있던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한글이었다는 것은 한글은 우리나라 문자라는 것을 은연중 국제사회에 드러내놓고 있는 배경을 읽을 수 있다.

 

임오군란(1882년 6월) 이후 잠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 대원군은 다음 달인 7월 청나라에 4년 동안 연금되었던 때인 같은 해 10월에 보정부(保定府)에서 쓴 편지이다. 실권에서 밀려남 심정을 구구절절이 한글로 표현하고 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부인에게 '마누라'라고 표현한 것은 '마누라'가 요즈음과는 달리 경칭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한문으로서 표현할 수 없는 조선의 한글로 표현한 대원군의 편지는 그래서 상대를 위한 편지이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위한 문자로 쓰여진 것이다. 대원군의 서화체는 유명하지만, 한글체의 조형미도 뛰어나다. 한글은 왕족들에게서 적당히 씌여진 문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죽음이 다가올 것 같은 상황을 묘사하면서 한글로 부인에게 쓴 대원군의 한글편지는 한글이 조선왕족들의 피와 뼈의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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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누라(=부인) 앞

그사이 망극(罔極)한 일을 어찌 만리(萬里) 밖에서 눈앞의 짧은 편지로 말하오리까.

마누라(=부인)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조선으로) 돌아가셨거니와 나야 어찌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오리까. (떨어져 지낸) 날이 오래되니, 옥도(玉度)가 엄정하시고(?)

태평(泰平) 태평하시고, 상감과 자전(慈殿)의 안부 모두 태평하시고, 동궁마마 내외(內外)

편안히 지내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또 비옵니다. 나는 다시 살아 돌아가지는 못하고

만리 밖 고혼(孤魂)이 되니, 우리 집안 대(代) 잇는 일이야 양전(兩殿, 임금과 왕비)에서

어련히 보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뵙지도 못하고 (살아갈) 세상이

오래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으니 지필(紙筆, 종이와 붓)을 대하여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7. 명성황후가 오빠 민승호에게 보낸 한글편지

 

대원군의 실각으로 1874년 명성황후(1851~1895)가 24살 되던때 오빠에게 보낸 한글 문안 편지 2통 중 하나다. 편지는 청나라에서 만든 색지(色紙)를 사용하였고 꽃과 나비 그림에 “(오빠의) 편지에서 밤 사이 탈이 없다 하니 다행이다. 주상과 동궁(훗날 순종)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니 좋지만,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8. 순명효 황후(순종비)가 김상덕에게 보낸 편지

 

1904년 1월 순종의 왕후였던 순명효황후가 황태자비 시절에 위관(韋觀) 김상덕(金商悳, 1852~1924)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상덕은 세자(나중의 순종)의 스승이었다. 이 편지는 안부와 황실의 근황을 염려하고 자신의 신병을 토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꽃병 그림의 붉은 편지 봉투와 국화꽃이 인쇄된 화려한 시전지(詩箋紙)가 화려하다. 순명효 황후는 병세 악화로 그해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병상에서도 그 아픈 마음을 한글로 표현한 한글은 조선왕조의 궁실 문자로 최대의 심미적 위치에서 다루어지고 있었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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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소식 들은 후 궁금하여 매양 얘기하고 있었는데, 설 쇠기를 태평히 하셨는가 싶으니

       기뻐하옵니다. 여기서는 (옛날) 지내던 생각이 지난 때에 미치면 이 몸이 없어지고자

       하는 말씀을 한 붓으로 다하기 어렵사옵니다. 요사이는 상감께서 두루 평안하시고,

       세자도 걸음걸이는 끝내 불편하시나 그 외는 모두 평안하시니 축하드리옵니다.

       나는 신병(身病)이 성한 날 없사오며 (병세가) 내내 (잘 낫지 않고)

       오래 끌어 대강만 적사옵니다. 정월(正月) 이십삼일
 

한글을 창제한 왕조답게 세종의 후계 조선왕조의 임금들 가운데는 한글로 편지를 쓴 임금들이 여럿 있었다. 왕비나 왕후들도 한글편지를 통하여 왕가의 인척들과 중요한 나라의 사안들을 다루었다. 그만큼 한글은 왕계 계승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한글로 편지를 쓴 임금들이 편지를 받는 상대가 단지 여성 왕족 친척들이기 때문에 한글을 쓴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한글이 여성들이 사용하고 한자보다 쉬운 문자라는 면을 고려했다기 보다는 왕통을 계승하는 정신적 계보가 한자가 아닌 한글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볼 수도 있다. 국가적으로 유교를 표방했으나 왕통계승에서는 음양도가사상을 바탕으로 명당과 왕실의 번성을 꾀한 것에서 한글은 조선왕실의 번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한글은 조선왕조의 국가적 문자가 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는 점이다. 조선왕조 임금들의 한글정신의 연면한 계승정신은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 세계박람회에서 그 진정한 한글창제 왕조의 그 자랑스러운 위엄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임금들의 한글편지는 단순한 유물이기 이전에 한글국호를 세계에 표방한 왕실 내부적인 연면한 힘으로 이어져 왔다는 면에서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야 한다. 사대부의 한글비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면 왕실의 임금들의 한글편지는 더욱 큰 의미가 있다.

 

놀랍게도 코리아가 최초로 참가한 국제행사였던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 세계 박람회에서 고종임금은 특별어사 정경원을 보내 국호를 한글로 '대조선'으로 사용하게 했다. 이것은 조선왕조 임금들의 한글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 박람회 때 처음으로 국제행사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국호를 세계에 처음 알릴 때 한글로 '대조선'으로 사용한 것이 필자가 찾아낸 박람회 당시 코리아 주최 메뉴판에서 확인되었다.

* 1893 한국전시관복원기념사업회 김성규 회장이 최근 발견한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 박람회 당시 연회에서 사용된 메뉴. 태극기와 성조기 사이에 한글로 '대조선' 이라고 찍혀있다. 고종임금은 특별어사 정경원을 보내 국호를 한글로 '대조선'으로 사용하게 했다는 것은 조선왕조 임금들의 한글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찾아내 2007년 5월 18일 연합뉴스 )

 

연합뉴스에서 보도하여 동아일보 및 각종 포털사이트 뉴스에서도 보도된 바 있는 1893년 9월 5일 시카고 콜롬비아 세계박람회 당시 코리아 주최로 오디토리움 호텔 뱅큇(현재 시카고 루즈벨트대학교 7층 루돌프 갠즈 홀에서 개최)때 사용한 메뉴판의 표지. 한글로 '대조선'이라고 쓰고 있다. 최초로 세계 앞에 우리나라 국호를 한글로 표기한 자료이다. 이에 관한 필자의 글은 다음 주소에서 볼 수 있다.

 

한글국호 '대조선' 1893 시카고 박람회 때 공식사용, 연합뉴스, 동아일보 등 보도

http://cafe.chosun.com/club.menu.bbs.read.screen?page_num=1&p_club_id=dreamview&p_menu_id=55&message_id=415198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

 

출처 : 초선대 (招 仙 臺)
글쓴이 : 가락국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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