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목(廣木)
광목(廣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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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징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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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목廣木은 기계에서 만든 방적사를 사용하여 평직으로 직조한 면직물이며, 19세기에 수입된 직물이다. 역직기力織機 등의 개량직기에서 직조하여 수직기에서 제직된 소폭의 무명에 비해 포폭이 90cm 이상으로 넓었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하여 가격도 저렴하였다. 광목은 희게 표백하여 이불, 의복 등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광목은 질기고 흡습성, 보온성이 좋아 점차 수요가 증가하여 1920년에는 수입 직물 가운데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즐겨 사용하던 직물이었다. 청일전쟁 전후에는 영국산이 주로 수입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수입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순수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에서 1923년 4월에 첫 광목제품인 ‘삼성三星’표를 필두로 ‘삼각산三角山’표도 생산하였는데, 삼성표는 고운 상등품이고 삼각산표는 보급형으로 일반제품이었다. 그런데 삼각산표가 이미 다른 회사에서 사용 등록을 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고 ‘태극성太極星’이라는 새로운 상표로 등록하여 광목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태극성표 광목은 국산을 대표하는 광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태극성 상표는 태극기의 태극문양에 전국 팔도를 의미하는 여덟 개의 별을 배치한 것으로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경성방적을 비롯하여 대규모의 직물공장에서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을 하였으나 일부 가내 직조 지역에서는 베틀에서 작업하던 사람들이 개량직기인 밧탄직기나 족답기를 구입하여 방적사로 직조하기도 했다.
광목은 품질에 따라 구분이 있었는데, 표면이 다소 거칠고 누런빛이 도는 것을 광목이라고 하고 광목보다 품질이 더 떨어지는 것을 차광목次廣木이라 했으며, 비교적 가는 실로 곱게 짠 고급은 ‘당목唐木’이라고 했다. 『조선어사전』에는 무명의 일종인 금건[金巾, かなきん]과 유사하나 품질이 좋지 않은 직물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당시 통용되던 무명에 비해 품질이 뒤떨어지는 직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징 및 의의
참고문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folkency.nfm.go.kr
<<관련 사진>>

1920년대 솜저고리, 겉감은 광목, 안감은 목면을 사용하여 만든 솜저고리다. 뒷길이:37.5cm, 앞길이:39cm, 화장:64cm, 품:45cm, 진동:18cm 단국대학교 석주선 박물관 소장 단국대학교석주선박물관,『석주선박사의 우리옷 나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96쪽
<< 관련 글>>
광목
광목(廣木, sheeting)은 문헌에 따라 시칭그, 조포(粗布), 생조포(生粗布)로 불리며, 조선인의 기호에 맞게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성이 있어 서민들의 옷감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1] 소폭목면(小幅木綿)과 금건(金巾)의 중간에 위치하는 품질과 내구력을 가지고 도시시장을 중심으로 소비지역을 넓혀갔다.[2] 경위사 모두 24번수의 단연사를 이용하여 직조한 평직의 조포로 폭36촌 1필의 길이 40마이다.[3]일본 도요보(東洋紡)에서 생산한 삼에이(3A)표 광목은 1910년대에 이미 수입이 시작되어 당시 우리나라 시장 중 삼남지방(충청도,전라도, 경상도)을 독점한 상태에서 조선산으로는 경성방직회사(경성방직주식회사)에서 1923년에 처음으로 직조한 광목 브랜드인 삼성표와 삼각산이 생산된다. 그 이후 불로초, 천도, 산삼, 태극성 등 여러 상표의 광목이 생산되게 된다.우리나라 농가에서 수직기로 제직된 소폭의 무명에 대비되는 명칭으로, 수입하였거나 우리나라에서 기계직으로 제직한 넓은 폭의 조포(粗布)를 일컫는 말로 홑이불, 속옷, 버선등에 많이 사용되었다.[4]『궁중발기』중 1917년 「뎡ᄉᆞ츄(秋)졍화당 의복ᄎᆞᄇᆞᆯ긔」에서 '광목2필'이 기록되고 있다.평직의 면직물이다.
광목 - DH 교육용 위키
dh.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