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역의 효열비
부산지역에 남아 있는 효자, 열녀비는 몇 기가 남아 있을까?
향토문화대전에 기록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유교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부산광역시 |
조선/조선 |
디지털부산문화대전-효열비 |
정의
조선 시대 부산 지역에서 효행과 열행을 기리어 세운 비.
개설
효열비는 부산 지역에 살았던 효자(孝子)·열녀(烈女)·열부(烈婦)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글을 새기어 세워 놓은 비석이다. 이를 ‘정려비’라고도 한다. 효자는 부모를 극진하게 섬기는 아들을 말한다. 효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정성을 다하고, 돌아가신 뒤에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태만히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효는 유교의 핵심적 도덕규범인데, 효에 대한 본질적인 개념은 공자(孔子)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효의 관념은 부모가 죽은 후에는 제사와 결합되어 유교에서는 조상 숭배를 중시하였다. 한대(漢代)의 『효경(孝經)』에서는 도덕의 근원과 우주의 원리로서 명문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효는 고구려의 태학(太學)이나 신라의 국학(國學)에서 교육하였고, 통일 신라 시대에는 『효경』을 기초로 한 효 사상이 지식인들의 기본 교양이 되었다. 고려 말기 권부(權溥)[1262~1346]가 지은 『효행록(孝行錄)』, 조선 시대 세종 때 발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효자도(孝子圖)」는 효행 이야기를 집대성한 것이다.
열녀와 열부는 절개가 곧은 여자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의 최고 미덕으로 한 남자만을 섬기는 절개를 꼽았다. 여성은 남편이 죽은 후 오랜 세월 고난과 싸우며 정절을 지키거나 전쟁 등의 위기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정조를 지켰다. 조선 시대에는 남편이 죽으면 재혼할 수 없도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하였고, 중종 때가 되면 개가(改嫁)를 범죄시하는 사회적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반봉건적인 가치관이 나타나 개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생겨났으며, 동학(東學)은 여성의 수절을 비판하였다. 갑오개혁 때는 여성의 개가를 허용하는 조항이 만들어졌다.
성리학이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 시대에 부산 지역에서도 다수의 효열에 뛰어난 사람들이 표창을 받게 되어 효열비가 세워졌다. 대부분 효열비는 조선 시대에 국가에서 내려질 때 정려비로 내려져 지금 명칭이 그대로 정려비로 불린다.
내용
개항 이후 최근 서구화로 유교 문화와 가치관이 소멸되어 가고 있지만, 전통을 중시하며 옛 것을 보존해 가는 모습도 남아 있다. 부산 지역에서는 효열비가 부산광역시 강서구와 기장군 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도시화가 늦게 진행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잘 보존된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은 1741년(영조 17) 기장군에 세운 열녀 월성 김씨의 정려비[철마면 연구리 598번지]이며, 연대 미상으로 세워진 효자 서홍(徐弘)의 정려비[철마면 연구리 562-1번지]가 있다.
강서구에는 1829년(순조 29)에 세운 효자로 죽은 사인(士人) 김석숭(金碩崇) 정려비[죽림동 740번지], 1892년(고종 29)에 세운 열부(烈婦) 경주 최씨의 정려각[명지동 225-1번지], 1919년에 세운 효자 어경덕(魚敬德)의 정려비[구랑동 압곡 마을], 1942년 세운 자헌대부(資憲大夫) 배신기(裵信己)의 아내 열부 정부인(貞夫人) 성씨의 정려비[범방동 탑동 마을] 등이 있다.
금정구에는 1789년(정조 13)에 세운 열녀 학생(學生) 김효문(金孝文)의 아내 김해 김씨의 정려비, 사상구에는 1842년(헌종 8)에 세워진 효자 구주성(具周星)의 정려비[덕포동 417-5번지]와 연대 미상의 효자 황택룡(黃宅龍)의 정려비[괘법동 산28-6번지] 등이 있다. 수영구에는 1843년(헌종 9)에 세운 효자 정정우(鄭正佑)의 정려비[민락동 23번지], 북구에는 1872년(고종 9)에 세운 효자 천승호(千乘昊)의 정려비[금곡동 100-1번지]와 열녀 경주 이씨의 정려비[금곡동 100-1번지] 등이 있다. 동래구에는 연대 미상의 한량(閑良) 밀성 박춘흥(朴春興)의 아내 열녀 월성 박씨의 정려비[명장동 산92-2번지]도 있다.
참고문헌
- 『동래부지(東萊府誌)』(동래구지편찬위원회, 1995)
- 『기장군지』(기장군지편찬위원회, 2001)
- 『부산 금석문』(부산광역시·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2)
- 김철범, 「부산 지역의 금석문 연구 전망과 활용」(『항도 부산』22, 부산시사편찬위원회, 2006)
관련이미지 7
비석의 크기는 높이 94cm, 폭 40cm, 두께 14cm이며 전면의 비문은 음각으로 세겼으며, 흰색 체인트로 도색되어 되어 있다.
비석 주위로 약 1m 높이의 시멘트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비석받침돌에는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오른쪽 윗면에 작은 깨진 흔적이 있다.
황택용효자비는 창날마을 주민들이 살았던 사상역앞 괘내마을 회산 자락에 있었으나 1970년초 사상공단 조성으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669년 12월(현종顯宗 10년)에 세웠음을 비음에 기록되어 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효열비임을 알 수 있다.하지만 지난 2020년 삼락동의 부산솔빛학교 부지로 지정된 이래 3년간의 시간이 흐른 뒤 2023년 9월경 부지조성 단계에서 안타깝게도 황택용효자비는 유실되고 말았다. 부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비가 관계자들의 무관심속에 사라진셈이다.
부산솔빛학교 이전부지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는 “한국 문화에서 앞으로 인류에 가장 크게 공헌할 게 있다면 바로 효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요즈음 부모와 자식 간의 단절로 불편을 겪을 때 부산시 각 지역에 있는 열녀, 효자비를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