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이야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 마곡사

jaunyoung 2024. 6. 28. 09:28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 마곡사

사찰소개

                                                                                         마곡사 전경

    • 마곡사(麻谷寺)는 충청남도 공주시 태화산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다.
      마곡사가 위치한 곳은 예로부터 동방 제일의 복된 땅[福地]이라 일컬어지던 길지이다. 풍수에서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정감록』 등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고 있다. 풍경 또한 매우 아름다워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이다. 절 앞에는 태화천이 잔잔히 흐르는데, 조선시대 문인인 이순인(李純仁)은 골짜기의 풍경을 읊은 시에서 마곡사를 물절[水寺]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 마곡사라는 사찰명의 유래에 대해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서는 보철화상(普徹和尙)이 법을 얻어 오자 사람들이 삼[麻]처럼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여기서 보철은 중국의 마곡(麻谷) 보철인 듯하나, 보철화상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신라 말에 보철스님의 법을 받아온 무염대사(無染大師)가 스승을 기리기 위하여 마곡사라는 절을 개창했다고도 한다. 한편 충청도 내포 지역에서는 청양의 장곡사(長谷寺), 공주의 마곡사, 현재는 소실된 예산의 안곡사(安谷寺)를 ‘삼곡사(三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긴골절’이나 ‘삼골절’ 등의 우리말이 ‘장곡사’나 ‘마곡사’ 같은 한자어로 바뀌게 되었고, 그 이름이 마곡이다 보니 중국의 마곡 보철이 연상되어 그 관계 속에서 창건주를 마곡 보철과 연관시킨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                          
                                                                                마곡사 대광보전 전경
                                                                                      마곡사 삼세불
                                                                                   마곡사 오층석탑
    • 마곡사는 화승(畵僧) 계보로도 유명해 남방화소(南方畵所)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화승을 대대로 배출하였다. 대광보전의 후불벽 뒤편에는 수월백의관음보살도(水月白衣觀音菩薩圖)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많은 화승을 배출한 마곡사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금호(錦湖)-보응(普應)-일섭(日燮)으로 이어지는 화승의 계보를 지니고 있으며, 최근 우리나라 불화의 거장인 송광사의 승려 석정(石鼎,)도 마곡사의 화승 일섭에게 불화를 배웠다고 한다.
      마곡사는 구한말 독립운동가였던 백범(白凡) 김구(金九)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참가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죄로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탈옥하였다. 그 후 마곡사에서 숨어 지내다가 하은당(荷隱堂)을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했다고 한다. 김구가 지냈던 백범당에는 김구의 사진이 있으며, 대광보전 앞에는 김구가 광복 후에 마곡사 시절을 회상하며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다.
    •                                                                                마곡사 전경
  • 마곡사의 산내암자로는 심정암, 부용암, 북가섭암, 토굴암, 백련암, 영은암, 대원암, 은적암 등 8개 암자가 있다.

 

태화산의 자연환경

                                                                             대웅보전 뒤 소나무림

    • 태화산(泰華山)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과 신풍면 및 유구면 사이에 위치한 해발 423m의 산이다. 태화산이라는 지명은 조선 말기에 편찬된『사적입안』에서 처음 사용한 지명으로서, 『동국여지승람』이나『택리지』 등에는 ‘무성산(茂盛山)’을 마곡사의 주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 무성산은 마곡사와 사이에 명가천을 두고 있어 지리적 관련성을 찾기 어렵다. 현재는 마곡사를 분지처럼 둘러싸고 있는 연속적 산지들을 총칭해서 태화산이라 하며, 북쪽의 국사봉(해발 591m), 서쪽의 옥녀봉(해발 362m), 동쪽의 무성산(해발 614m) 등으로 이뤄져 있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동쪽의 무성산, 동남쪽의 계룡산과 공주 시가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멀리 칠갑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산중턱에 위치한 상원폭포와 활인봉 부근의 약수가 유명하다.
    • 태화산의 자연환경은 침엽수림과 참나무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능선을 따라 사찰 주변으로 넓게 분포하는 장령의 소나무림, 태화천 변의 벚나무 행렬, 신록의 옅은 새잎들이 어우러지는 봄을 두고 옛 부터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있다. 특히, 활인봉과 나발봉을 따라 마곡사를 끼고 도는 5㎞의 등산로 주변에는 수백년된 적송이 우거져 장관을 이룬다.
    •  
                                                                                      마곡사 극락교
    • 마곡사의 주요 수목으로는 『백범일지』의 김구선생에 관한 일화를 가진 향나무가 있다. 김구선생이 독립운동 은거 당시, 1898년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 수도하였는데, 이때 백련암에 몸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구선생은 광복 후, 1946년에 마곡사에 들러 무궁화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대광보전과 응진전 사이에 향나무만 남아 있다. 또한 마곡사 대웅보전에는 '싸리나무 기둥'에 관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실제 나무는 느티나무로 지금도 사찰 안팎에는 느티나무 노거수가 많이 자라고 있다. 느티나무는 잘 썩지 않고 오래 사는 생리적 특성 상 우리나라 목조건축에서 기둥재로 자주 쓰이는 나무이다.
    •                                                                       김구선생이 심은 향나무

 

마곡사의 역사

마곡사의 관련 기록으로는 크게 19세기 지어진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과 연대와 필자미상의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禪敎兩宗大本山麻谷寺緣起略抄)』를 들 수 있다.

마곡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기록의 내용이 다른데,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마곡사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 후 선덕여왕의 후원을 받아 세운 7대 가람 중 세 번째 사찰이며, 창건 이후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의 중수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연기략초(禪敎兩宗大本山麻谷寺緣起略抄)』에서는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에 의해 마곡사가 창건되었고, 그 후 범일(梵日), 도선(道詵)에 의한 확장, 중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마곡사 일제강점기 때 전경

    •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는 창건 이후에 대해 1199년에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가 왕명에 의해 도적을 물리치고 마곡사를 중수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후 12세기 말부터 15세기 후반 사이에 건립되었던 3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려 후반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마곡사가 상당히 번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의 남원과 북원으로 이루어진 마곡사의 기본적인 배치가 이 무렵에 이미 그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대광보전 앞에 위치한 5층 석탑은 고려 말에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고려 말기에 마곡사가 번영했음을 보여준다.
    •                                                                             
    •                                                                            마곡사 5층석탑
    • 또한『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따르면 마곡사는 조선 전기 세조(世祖)가 마곡사에 들러 ‘만세토록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亡之地]’이라며 감탄하고, 영산전 편액과 잡역의 부담을 면해주는 수패(手牌)를 내렸다는 내용으로 보았을 때, 고려 때만큼의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다른 여타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폐허가 되었다가, 1650년부터 승려 각순(覺淳)에 의한 중창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다. 각순에 의한 중창부터의 내용이 이전의 기록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이며 사실적이다. 각순은 공주 목사로 내려온 이태연(李泰淵)의 시주를 받아 10년 동안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다.

      그 후 마곡사는 1782년(정조 6)에 대규모 화재로 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이 소실되었으나, 곧바로 화주(化主) 체규(體奎)를 중심으로 중창이 시작되었다. 특히 1790년(정조 14)에 정순왕후의 발원과 체규의 기도 덕분에 왕실 원자(元子)가 태어났다 전하는데, 이가 곧 순조(純祖)이다. 이때부터 마곡사는 조선왕실의 후원을 입어 지속적인 중창불사를 통해 지금과 같은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19~20세도 많은 건물에 대한 중창과 중수가 행해졌다.
연표

        연대                        내  용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함
1199년 불일보조국사가 왕명에 의해 도적을 물리치고 중수함
1650년 각순에 의해 중창, 선당과 약사전 건립함
1682년 영산전 건립함
1782년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이 소실됨
1785년 대광보전 중창함
1791년 나한전 중창함
1795년 태실로 봉해지고 도내수사찰의 직인까지 받게 되면서 사세 확장함
1844년 흥성루 중수함
1846년 해탈문 중수함
1879년 대웅전 현판 조성함
1910년 해탈문, 천왕문 중수함
1923년 대웅전 중수함
1939년 명부전 창건함

 

마곡사의 가람배치

* 주요전각 클릭 시 관련설명이 나옵니다.

마곡사는 개울을 경계로 남원과 북원으로 구분된다. 남원은 영산전, 북원은 대광보전을 중심건물로 하는데, 두 중심 영역이 합쳐지기에는 공간이 협소하다. 따라서 지형의 면적과 지세의 흐름에 맞추어 북원의 대광보전은 서남향으로, 남원의 영산전은 동남향으로 배치하여 두 영역이 직교가 되도록 구성하였다. 이렇게 나누어진 두 영역을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에 배치한 해탈문과 천왕문은 적절하게 방향이 단계적으로 틀어져 무리하게 단선축으로 진입하여 건물들을 비스듬하게 바라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광보전의 뒤쪽, 산 위에 위치하고 있는 중층불전으로 하층 전면 5칸, 측면 4칸, 상층 전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비탈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넓은 대지를 확보할 수 없었고, 축대 위에 만들어진 앞마당은 매우 좁은 편이다. 대광보전 앞마당에서 보았을 때, 규모가 크고 수평적인 느낌이 강한 대광보전 뒤편으로 대웅보전이 수직적인 느낌을 더한다. 또한 대웅보전의 상층 부분만이 보여 중첩된 처마로 인한 건축적 공간감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처럼 두 개의 전각이 높낮이를 달리 하면서 하나의 시야 속에 들어오도록 앞뒤에 겹쳐서 배치된 예는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곡사만의 특징이다.

대광보전의 하층과 상층의 공포는 모두 내외3출목(내외7포)의 다포식으로 동일한 구조이다. 기둥 위에 창방을 짜고, 그 위에 평방을 올려 공포대를 받도록 하였다. 바닥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고, 천장에도 우물천장을 들였다. 대웅보전이 지닌 건축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하나 조선후기의 전형적 특성이 발현되기 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므로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지화산마곡사이층대장전단청기」에는 건물명이 대장전(大藏殿)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분명하게 2층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내부 고주에 시주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등 고주를 비롯한 포벽 등 곳곳에 많은 묵서가 적혀 있다. 불전에서는 흔하지 않은 것으로 이 건물이 원래 불전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웅보전이 위치한 터가 매우 협소하며, 상층의 벽이 판벽으로 구성된 점 역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마곡사는 1650년부터 각순에 의한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사격(寺格)을 갖추었고, 1782년 대화재로 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의 건물이 소실되어 1785~1788년에 걸쳐 법당, 즉 현재의 대광보전이 중건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장전은 1650년 각순에 의한 중창 불사로 조영된 후 1782년의 화재 때 대장전은 소실되지 않았고 임시로 법당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1985년 해체 공사 중에 ‘康熙二年 癸丑 五月’(1663년), ‘康熙三十四年 乙亥’((1695년), ‘乾隆二十七年 壬午’(1762년) 등의 명문이 적힌 기와가 확인된 점 역시 이 건물이 1782년 대화재에 소실되지 않고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준다. 언제부터 대웅보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79년의 「충청우도공주태화산마곡사대웅전현판」에 따르면 적어도 이때부터는 대웅보전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내부에 삼세불(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보물 제8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곡사의 국가유산

마곡사의 지정문화재는 현재 보물 5건, 시도유형문화재 7건, 시도민속문화재 1건, 문화재자료 5건 등이 있다.연번종목명칭시대
1 보물 제799호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고려시대
2 보물 제800호 공주 마곡사 영산전 조선시대
3 보물 제801호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조선시대
4 보물 제802호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조선시대
5 보물 제1260호 마곡사석가모니불괘불탱 조선시대
6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0호 마곡사동제은입사향로 고려시대
7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62호 마곡사동종 조선시대 (1654년)
8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5호 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 조선시대
9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81호 공주 마곡사 포교당 범종 조선시대 (1741년)
10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85호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 조선시대
11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91호 공주 마곡사 영산회상도 조선시대 (1788년)
12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23호 공주 청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시대
13 충청남도 시도민속문화재 제14호 세조대왕연 조선시대
14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2호 마곡사천왕문 일제강점기
15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3호 마곡사국사당 조선시대
16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4호 마곡사명부전 조선시대
17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5호 마곡사응진전 조선시대
18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마곡사해탈문 조선시대

*2015년 6월 기준마곡사 문화재 자세히 보기

 

마곡사의 인물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년)
  •                                                                            보조국사 지눌 진영
  • 고려의 승려로 지눌은 법명이고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고려 중기 마곡사를 중창하고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눌은 8세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闍崛山派)에 속했던 종휘(宗暉)를 은사로 승려가 되었다. 이 시기는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극심하고 무신정변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기였다. 지눌은 1182년에 승과(僧科)에 급제한 후,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모인 승려들과 함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어 참선과 교학을 함께 수행할 것을 기약하였다.

    승과에 급제한 직후 나주 청량사(淸涼寺)에 머물면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첫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육조단경』은 중국 선종(禪宗)의 제6대 조사인 혜능(慧能)의 저서로 지눌은 그 뒤 평생 동안 혜능(慧能)을 스승으로 여겼다. 1185년 다시 경상북도 예천의 보문사(普門寺)로 옮겨 경전을 공부하던 중 『화엄경(華嚴經)』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과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에서 “선과 교가 다르지 않다[禪敎一元]”는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였고, 실천의 방면에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제시하였다.

    1190년 그는 공산(公山, 지금의 팔공산) 거조사(居祖寺)로 가서, 이전의 담선법회에서 결사를 약속했던 동지를 모은 뒤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반포하였다. 1197년, 몇년만에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를 하게 되었으나 결사정신이 잘 지켜지지 않자 거조암을 떠나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은둔하여 홀로 수행하였다.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현실참여적인 보살행에 대한 세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1205년(희종 1)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 현재 송광사)를 중창한 뒤,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이름을 고치고 새롭게 결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수선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나이 53세, 법랍 36세에 입적하였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이다.

    제자로는 천진(天眞), 확연(廓然), 수우, 인민(仁敏), 가혜(可慧), 혜심(慧諶) 등 수백 명이 있다. 저서로는 『권수정혜결사문』 1권, 『수심결(修心訣)』 1권, 『진심직설(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 1권,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3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권,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1권, 『염불요문(念佛要門)』 1권, 『상당록(上堂錄)』 1권, 『법어가송(法語歌頌)』 1권 등이 있다.
※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마곡사의 설화

삿자리를 짠 앉은뱅이
  • 백의수월관음도가 벽화가 모셔진 대광보전에는 바닥에는 장판을 걷어 올리면 참나무로 만든 삿자리가 깔려 있는데 여기에는 한 앉은뱅이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 한 앉은뱅이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앉은뱅이로 태어난 것이 전생의 업보가 많아서라고 생각하여 비로자나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리며 틈틈이 정성을 다해 삿자리를 짰다.
    기도가 끝난 100일이 지나 삿자리가 완성되던 날 그는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법당 문을 걸어 나갔다.
    군데군데 새로 보수한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가 짰다는 삿자리가 대광보전 바닥에 깔려있다.
  •                                                                       대광보전에 깔린 삿자리
세조와 마곡사
  • ‘靈山殿’이라 쓴 현판 한쪽에는 ‘세조대왕어필’이라 쓴 방서가 있다. 이는 조선시대 세조임금이 마곡사에 왔을 때 하사한 것이라 한다. 이 외에도 마곡사에는 세조가 마곡사에 올 때 타고 왔던 세조대왕연(시도민속자료 14호)이 보관되고 있는데, 이 연은 세조가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고자 마곡사에 왔다가 매월당이 없자 ‘김시습이 나를 버렸으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고 하여 두고 간 것이라 한다.
  •                                                                                 세조대왕 연

 

마곡사 안내
  • 주소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 연락처041-841-6220~3
  • 홈페이지http://www.magoksa.or.kr
오시는길

 

  • 고속도로 이용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정안I.C. → 23번 국도(공주 방면) → 32번 국도(유구 방면) → 사곡면에서 우회전 → 604번 지방도 → 마곡사
  • 대중교통 이용공주터미널 → 마곡사, 종점까지 운행. 시내버스 이용, 06:00~20:30 (한 시간 간격, 40분 소요)
  • 입장료
    개인단체
    어른 2,000 1,600
    청소년, 군인 1,500 1,200
    어린이 1,000 800
  • 주차료무료

춯처; http://www.koreansansa.net/ktp/sansa/sansa_020401.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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