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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 법주사

jaunyoung 2024. 6. 28. 08:34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 법주사

사찰소개

 

                                                                                   법주사 전경

    • 법주사(法住寺)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에 위치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의신조사(義信祖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떠났다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와서 머물렀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法]이 머무는[住] 절’이라는 뜻이 법주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도 같은 내용이 전하고 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길상사(吉祥寺), 속리사(俗離寺) 등으로도 불렸던 듯하다.
      절이 위치한 속리산(俗離山)은 예로부터 조선8경으로 꼽히던 산인데, 산세의 아름다움도 있었지만 법주사가 자리한 산이었기 때문에 명산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이라 불리어 왔었다고 하는데, 속리산이라는 산 이름 또한 법주사와 연관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766년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의 계시로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던 중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진표율사 앞에서 우는 소들을 보고 달구지를 탄 사람이 신심을 얻어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俗]을 떠난[離] 산이라는 뜻의 속리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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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대웅보전
                                                                                 법주사 마애불의상
                                                                                법주사 세존사리탑
    • 기록에 의하면 그 후 진표율사는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다가 다시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方)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 때 진표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하자 영심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길상사가 법주사의 전신이라 생각되며 이후 고려 인종(仁宗) 때의 기록이나 조선 전기 1478년에 지어진 『동문선(東文選)』등의 기록에는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법주사 팔상전 전경
  • 현재 법주사는 금동미륵대불로 유명한 미륵신앙의 요람으로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속리산 법주사 일원 또한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내암자로는 복천암, 동암, 중사자암, 상고암, 탈골암, 수정암, 여적암, 관음암, 상환암, 봉곡암, 법기암, 보은포교원 등 12개 암자가 있다.
 

속리산의 자연환경

  • 속리산(俗離山)은 태백산맥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고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분기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충청북도 보은군, 괴산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이 일대는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한국 팔경 중 하나로 이름나 있으며, 1970년 3월 국립공원(Korea National Park)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1964년 6월 사적 및 명승지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12월 법주사와 분리되어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의 23대 왕인 순조의 태실을 봉안한 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였으며, 세심정으로 가는 길에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산림의 벌목을 금하는 금표(禁標)도 남아 있어 사찰 및 왕실의 비보 아래 한국 고유의 산림이 보전되어오고 있다.
  •                                                                       미륵대불(용화보전)과 수정봉
  •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203호)
  • 주요 봉우리로는 법주사를 중심으로 해발 1,057m로 최고봉인 천왕봉을 비롯한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 등과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수정봉과 관음봉은 각각 용화보전(미륵신앙)과 대웅보전(화엄신앙)의 배경이 되어 법주사 특유의 가람배치와 맞물려 지형과 교리적 해석이 일치하도록 결합되어 있다.

    이밖에도 은폭동계곡, 만수계곡, 화양동계곡, 선유동계곡, 쌍곡계곡, 장각폭포, 오송폭포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사계절 특색이 뚜렷하여 계절마다 장관을 이룬다. 주요 동·식물로는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 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 1,055종의 식물과 까막딱다구리(천연기념물 제242호),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328호) 등 희귀동물을 포함하여 1,831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자원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 속리산은 오래전부터 광명산(光明山)·지명산(智明山)·미지산(彌智山)·구봉산(九峯山)·형제산(兄弟山)·소금강산(小金剛山)·자하산(紫霞山)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는데, ‘속리(俗離)’라는 지명은 ‘속세를 떠난다’는 뜻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진표율사와 관련된 일화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을 구봉산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 불렀다고 되어 있고, 『문헌비고』에는 이명(異名)으로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른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최치원은 헌강왕 12년(886)에 속리산의 경치를 구경한 뒤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라며 산 이름의 속뜻을 시로 풀기도 하였다.
  • 속리산은 법주사를 중심으로 주변 해발 300~800m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위에 소나무림이 분포하고 있으며, 계곡부의 졸참나무림, 해발 800m 이상의 산정부의 신갈나무림이 주된 산림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사내리마을에서 법주사까지 이르는 길은 그 길이가 5리(약 2㎞)라서 ‘오리숲’이라 불리는데, 오래된 전통 숲으로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가 일품이다. 오리숲길은 오래된 소나무와 느티나무, 참나무를 중심으로 고로쇠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돌배나무, 조릿대 등 다양한 수종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일주문에서 금강문에 이르는 구간은 사찰의 비보아래 나이가 100년도 훌쩍 넘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이루는 직선과 곡선의 숲길이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다.
    주요 수목으로는 대웅보전 앞 쌍사자석등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찰피나무가 있다. 찰피 나무는 통일신라 때 스님들이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 위해 처음 들여온 나무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인도보리수와 닮아 사찰에서는 아직도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르기도 하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나무이다. 또한 천왕문 앞에는 높이가 27m, 흉고둘레가 2.5m에 달하는 전나무 두 그루가 대웅보전에서 금강문에 이르는 사찰의 중심축과 어우러져 웅장함을 더한다.
  •                                                                                     법주사 오리숲길
    •                                                                         대웅보전 앞 찰피나무
    •                                                                            천왕문 앞 전나무

법주사의 역사

553년 의신조사(義信組師)에 의해 세워진 법주사는 720년(성덕왕 19)에 중건되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의 기록을 들어 760년경 진표율사(眞表律師)와 그의 제자인 영심(永深)에 의해 다시 한 번 중창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길상사(吉祥寺)로 불린 것으로 추측되며, 이 시기 길상사는 진표율사의 가르침에 따라 미륵신앙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짐작된다. 또한 9세기 무렵에 와서는 경내에 여러 전각들이 들어서고 많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속리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는 현재 법주사 경내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이나, 석련지(국보 제64호)와 같은 석물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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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 일제강점기 때 전경
    • 고려시대 법주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더욱 발전해 나갔는데, 『법주사사적기(俗離山大法住寺事蹟記)』에서는 여러 가지 내용을 열거해 놓고 있다. 사적기는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과 일치하는 점이 많아서 법주사의 역사를 살피는데 빼놓을 수 없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고려사』에서는 일관되게 절 이름을 속리사도 기록하고 있어 고려시대에 법주사는 속리사로 불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적기의 내용에 따르면 법주사 철당간이 처음 생긴 것은 1006년(고려 목종 9)의 일이라고 하는데, 지금 있는 당간은 조선 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명으로 철거되었다가 후에 다시 세워진 것이며 당간지주만이 고려시대 것으로 전한다. 고려시대 법주사는 특히 문종의 5째 아들이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동생이기도 한 도생승통(導生僧統)이 법주사에 머물던 시기에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성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후기에는 충렬왕(忠烈王), 충숙왕(忠肅王), 공민왕(恭愍王) 등 여러 왕들이 절에 행차하기도 하였고, 특히 공민왕 때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불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 사리탑이 현재 능인전 뒤쪽에 남아있는 탑이라 전해진다.
    •                                                                             법주사 쌍사자석등
    • 법주사는 조선시대 들어서도 세조(世祖)의 후원을 받는 등 왕실과 관계를 맺으며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대부분 전각이 불에 타버리는 화마를 겪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26년(인조 4) 사명대사(四溟大師)에 의해 주요 전각이 재건되었고, 1630년에 『법주사사적기』가 편찬되었다.

      그 후 영조(英祖) 때는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원당이 들어서는 등 지속적인 왕실과의 관계를 보이며, 1851년(철종 2)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872년(고종 9)에는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리고,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중단되었다가 후에 재착수 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고, 2002년 개금불사를 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가람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표연대내 용
553년 의신조사 창건
760년경 진표율사와 그 제자 영심 등에 의해 중창
고려 숙종 때 도생승통(導生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냄
고려 인종 때 왕이 법주사에서 점찰법회를 열고, 김부식에게 「속리사점찰법회소(俗離寺占察法會疏」를 짓게 함
고려 원종 때 자정미수(慈淨彌授)대사가 절에 주석
1281년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감
1363년 왕이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l과를 법주사에 봉안토록 함
조선 세조 때 신미대사(信眉大師)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
1592년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전각이 소실
1605~26년 사명대사가 중건
1630년 「법주사사적기」를 편찬
1636~40년 벽암 각성선사(碧巖覺性禪師)가 황폐화된 절을 중창
1851년 권돈인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
1872년 2충 규모의 용화보전을 헐음(지금의 금동청동미록대불 자리)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 법주사 주지승 장석장(張石箱)이 발원하고 전라북도 태인에 살던 김영곤(金永坤) 거사가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金復鎭)이 요절하면서 중단
1963년 3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미륵불상 조성 재착수하여 1년 후 완공
2002년 미륵대불 개금불사

 

법주사의 가람배치

* 주요전각 클릭 시 관련설명이 나옵니다.

법주사는 미륵신앙과 화엄신앙이 복합된 이중적 신앙 체계를 지니면서 이를 가람배치에 구현했다. 법주사는 화엄신앙의 대웅보전과 미륵신앙의 용화전을 건축 중심으로 동시에 설정해야 했으며 각각의 중심축은 직각으로 교차하면서 교차점에 5층탑인 팔상전을 세웠다. 2개 구성축은 각기 수정봉과 관음봉을 향하고 있어 지형과 교리적 해석이 탁월하게 일치한다. 법주사의 가람배치는 두 봉우리가 직교하는 지형에 따른 구성으로 미륵 신앙과 화엄 신앙의 결합이라는 교리적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지리적으로는 8개 봉우리가 연꽃잎처럼 사찰을 감싼 불국토의 형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용화전, 원통보전, 명부전, 능인전, 조사각, 진영각, 삼성각 등 8개의 전각과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종고루, 부도전 등 5개의 부속건축물, 그리고 선원, 강원, 염불원 등 3개의 원과 또한 염화당, 용화당, 미룡당, 응주전, 사리각, 종무소를 포함한 10여 채의 요사채들이 남아 있어 약 30여동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

팔상전(捌相殿)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오층목탑으로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에 사명대사가 복원했다고 한다.

각 면마다 한가운데 계단을 둔 정사각형 월대를 두 단으로 쌓고 그 위에 목탑을 올렸는데 아래층 월대는 땅 속에 묻혀 있다. 월대와 계단은 불전을 초창한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1층은 사방 5칸이며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양 끝이 반 칸씩 줄어서 5층은 사방 한 칸이 된다. 지붕은 사모지붕이며 지붕 위에 상륜부는 조선시대 것이다. 1층의 한 변이 11m이며 상륜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22.7m인데 올라갈수록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감 있는 모습이다.

바닥 한가운데에 심초석이 있고 그 위에 꼭대기까지 닿는 기둥인 심주를 세웠으며 그 둘레에 4층까지 닿는 네 개의 기둥을 세웠고 다시 그 둘레에 3층까지 닿는 높은 기둥 열두 개를 세웠다. 그 후 1층의 바깥기둥과 높은 기둥을 잇는 퇴보 위에 2층의 바깥기둥을 세웠고 3층은 높은 기둥을 그대로 바깥기둥으로 삼았으며 높은 기둥과 하늘기둥을 잇는 퇴보 위에 4층 변주를 세웠다. 또 기둥들 사이를 사각으로 다듬은 보로 연결하여 튼튼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짜임은 목탑을 올리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보이며 3층 법당인 금산사 미륵전에서도 같은 방식을 볼 수 있다.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1층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식이고 2층에서 4층까지는 공포가 기둥 위에 놓이기는 했지만 다포집 양식으로 구성되었으며 5층은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놓은 완전한 다포식이다. 이처럼 층마다 다른 공포구조는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이 불전의 특징이다. 또 2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사이에 창을 달아서 빛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를 봉안한 건물이다. 3층까지 한 통으로 트인 팔상전 안에는 가운데 네 기둥 사이를 막아 벽을 만들고, 한 면에 두 점의 팔상도를 배치하였다. 팔상도 앞의 불단에는 각각 불상을 모시고 앞쪽에 오백나한상을 세 줄로 배치했다.

이 불전은 1968년에서 1969년 사이에 완전 해체 수리를 거쳤다. 이때 심초석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대리석 합에 든 조그만 은제사리합이 발견되었다. 사리공의 네 벽과 위쪽을 덮은 동판 다섯 장에는 팔상전의 건립 경위를 밝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고 대리석 합을 싼 비단보자기에도 한글이 섞인 축원문이 먹으로 적혀 있었다. 이 팔상전 사리장엄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법주사의 문화유산

현재 법주사는 사적 제503호,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주사의 지정문화재로는 국보 3건, 보물 13건, 시도유형문화재 20건, 문화재자료 2건이 전해지고 있다.
 
연번        종목                                                               명칭                                                                               시대

 

1 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통일신라시대
2 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 조선시대
3 국보 제64호 보은 법주사 석련지 통일신라시대
4 보물 제15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통일신라시대
5 보물 제216호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고려시대
6 보물 제848호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 조선시대
7 보물 제915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조선시대
8 보물 제916호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조선시대
9 보물 제1259호 법주사괘불탱 조선시대 (1766년)
10 보물 제1360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조선시대 (1626년)
11 보물 제1361호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시대 (1655년)
12 보물 제1413호 보은 법주사 철솥 통일신라시대
13 보물 제1416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조선시대(1480년)
14 보물 제1417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통일신라시대
15 보물 제1418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 조선시대 (1514년)
16 보물 제1858호 보은 법주사 동종 조선시대 (1636년)
17 사적 제503호 보은 법주사 -
18 명승 제61호 속리산 법주사 일원 -
19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6호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고려시대 (1362년)
0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6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 조선시대
21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70호 보은 법주사 석조 통일신라시대
22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71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조선시대(1664년)
23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79호 보은 법주사 자정국존비 조선시대 (1342년)
24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67호 보은 속리산사실기비 조선시대(1665년)
25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제204호 보은 법주사 석옹 통일신라시대
26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32호 보은 법주사 능인전 조선시대
27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33호 보은 법주사 선희궁 원당 조선시대
28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34호 보은 법주사 궁현당 조선시대
29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36호 보은 법주사 가경구년명 철종 조선시대 (1804년)
30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37호 보은 중사자암 동종 조선시대 (1636년)
31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38호 보은 법주사 선조대왕 어필 병풍 조선시대
32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39호 보은 법주사 주서무일편 병풍 조선시대 (1758년 추정)
33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6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 조선시대
34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7호 보은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 고려시대
35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8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 조선시대 (1803년)
36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05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조선시대 (1737년)
37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06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신중도 조선시대 (1795년)
38 충청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07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삼세불도 조선시대(1909년)
39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 보은 법주사 수정암 석조여래좌상 조선시대
40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보은 법주사 상고암 마애불상군 조선시대
                                                                                                                                                        *2015년 6월 기준
 

법주사의 인물

진표율사 (眞表律師, 미상~미상)
  •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로 법명은 진표이고, 속성은 정씨(井氏)이다. 완산주(지금의 전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또는 진나마)이며,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다. 11세 때 사냥을 나갔다가 밭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두었다. 다음 해 봄 30여 마리의 개구리가 꿰미에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참회하며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12세에 금산사(金山寺) 순제(順濟)를 스승으로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순제는 『공양차제법(供養次第法)』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주면서, 미륵과 지장전에 참회하여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할 것을 부탁하였다. 760년(경덕왕19)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간절한 참회 끝에, 762년 4월 27일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본(戒本)과 두개의 목간자(木簡子)를 받았다. 두 보살을 친견한 뒤 산을 내려와 금산사를 중창하고, 속리산·강릉·금강산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경덕왕과 왕실 종친들은 그로부터 계품(戒品)을 받고 많은 보시를 했는데, 진표율사는 시주받은 것을 여러 사찰에 나누어 주었다. 그 뒤 금강산에 들어가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7년간 머물면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으며, 흉년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발연사에서 다시 부사의방에 들렀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찾았다.

    이 무렵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이 속리산으로부터 찾아와 계법을 구하였다. 그들에게 의발과 『점찰선악업보경』 및 『공양차제법』, 그리고 189개의 간자와 미륵보살이 준 두 간자를 전해 주면서 이 교법의 유포를 부탁하였다.

    속리산으로 돌아간 영심 등은,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서 중생을 제도하라는 스승의 부탁에 따라 길상사(吉祥寺, 현재 법주사)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이들 외에도 보종(寶宗)·신방(信芳)·체진(體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등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어 모두 산문의 개조가 되었다. 말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발연사에서 함께 도를 닦았으며,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하였다.
도생승통 (導生僧統, 미상~미상)
  • 고려 문종(文宗)의 다섯째 아들로, 넷째 아들인 의천(義天)의 아우이다. 1070년(문종 24) 개성 북쪽에 있는 현화사(玄化寺)의 소현(韶顯)을 스승으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법상종의 대가였던 소현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의 신앙 역시 법상종이었다 할 수 있다.

    도생은 후에 법주사 주지로 있으면서 승통(僧統)의 직위를 받았는데, 1096년(숙종 1) 스승 소현이 입적하자 금산사(金山寺)의 주지를 겸직하여 퇴락해가는 금산사를 중수하였다. 그의 행적이나 만년에 대하여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1112년(예종 7) 정치적 혼란기에 “무장 김택신(金澤臣), 형부상서(刑部尙書) 신행임(申幸任) 등과 함께 거제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고만 전하고 있다

벽암대사 각성 (碧巖大師 覺性, 1575~1660년)
  •                                                            법주사 벽암대사비(충북유형문화재 제71호)
  • 조선시대의 승려로 승군을 이끌던 승군장(僧軍將)이기도 하다. 충청북도 보은 출신으로 법명은 각성이고, 벽암은 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황폐화 된 절들을 중수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는 법주사 또한 속한다.

    10세에 설묵(雪默)에게서 출가하였으며,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뒤 선수(善修)의 제자가 되어 속리산·덕유산·가야산·금강산 등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해전에 참여하였고, 그 뒤 지리산에서 충휘(冲徽)·태능(太能)·응상(應祥) 등과 함께 수행하면서 많은 불교적 시[詩偈]를 남겼다. 1600년에는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강의를 하였다. 1612년(광해군4)에 스승인 선수가 무고로 투옥되자 그도 연루되어 옥에 갇혔지만, 광해군이 그의 덕에 감복하여 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에 임명하여 봉은사에 머물게 하였다. 그곳에서 신익성(申翊聖)을 비롯한 많은 사대부와 사귀었다.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키자, 조정으로부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하사받았다. 1632년 화엄사(華嚴寺)를 중수하였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는 의승군 3,000명을 모아서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적들을 무찌르며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전쟁이 끝나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 1640년 쌍계사(雙磎寺)를 중수하였고,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이 되어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1641년 6월 해인사에서 머물 때, 조정에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서울로 가던 중 병으로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백운산 상선암(上仙庵)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1642년 보개산에 들어가 불법을 강의할 때, 왕자였던 효종(孝宗)이 화엄종지(華嚴宗旨)를 배웠다.

    1646년 희언(熙彦)과 속리산 법주사에 은거하다가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86세, 법랍 73세였다. 제자로는 수초(守初)와 처능(處能)이 있으며, 문하의 제자들이 취미파(翠微派)·백곡파(白谷派)·침허파(枕虛派)·고운파(孤雲派)·동림파(東林派)·연화파(蓮花派)·벽천파(碧川派) 등 7파를 세워서 그의 선법을 크게 전파하였다. 저서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간화결의看話決疑』,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가 있으며, 스승의 시문집인 『부휴당집(浮休堂集)』 5권을 편찬하였다.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법주사의 인물

진표율사와 법주사

  • 『삼국유사』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는 진표율사의 행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출신으로 12세에 금산사에서 출가를 하였다. 이 후 변산 선계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서 각고의 참회고행 끝에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금산사를 새롭게 중창하며 미륵장륙상을 모시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속리산을 찾아가 미륵불을 세우라’는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진표율사는 곧 바로 금산사를 나와 속리산으로 향하는 도중 소달구지를 타고 오는 사람을 만났다. 그때 달구지를 끌던 소들이 진표율사 앞에 무릎을 꿇고 울어 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달구지를 타고 있던 사람이 진표율사에게 물었다.
  • “이 소들은 어찌하여 울며, 스님은 어디에서 오는시는 길입니까?”

    진표율사가 답하기를,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사람이오. 나는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법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오는 중이었소. 이 소들은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에 경배하는 마음에 꿇어앉아 우는 것이오.”

    달구지 주인이 진표율사의 말을 듣고 다시 말하기를,

    “축생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에게 어찌 신심이 없겠습니까” 하고, 곧 스스로 낫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잘랐다.
    진표율사는 그를 다시 삭발해주고 제자로 삼았다. 이 때문에 속리산은 ‘속세를 떠나는 산’이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마애여래의상 옆 선각화-진표율사를 보고 꿇어앉은 소
    •                                           마애여래의상 옆 선각화-말에 불경을 싣고 오는 의신조사
  • 진표스님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골짜기에서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를 해두고 강원도 명주를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가 발연수라는 절을 세웠다. 진표율사는 발연수사에서 점찰법회를 열고 7년 동안 머물며 대중을 교화하다가 다시 불사의방으로 돌아왔다. 그 때 속리산 대덕인 영심, 융종, 불타 세 사람이 찾아와서 계법을 구했다. 진표율사는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에게서 직접 받은 의발과 경전, 법구를 그들에게 주며 속리산으로 돌아가서 길상초 있는 곳에 절을 짓고 길상사라 이름 지을 것을 전했다. 영심은 그 말대로 길상초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점찰법회를 크게 열었다. 그때 지어진 길상사가 오늘날의 법주사라 한다.

법주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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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락처 043-543-3615(8655)
  • 홈페이지http://beopjusa.org/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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