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에선 누가 어떻게 일했나
문화일보에서 많은 관심속에 연재하고 있는 박영규의 지식카페에서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에 관한 3편의 기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궁궐은 조선 최고의 직장… 양반서 노비까지 모두 자부심 갖고 일해
▲ 일러스트=김유종 기자
■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① 宮에선 누가 어떻게 일했나
관리·비서·사무·기술·경비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 출퇴근 하는 사람들은 ‘신하 사무실’ 궐내각사에서 근무
양반들 선호하는 곳 기준은 ‘왕과의 거리’… 문관은 자문역할 홍문관, 무관은 왕 경호하는 선전관청 ‘베스트 잡’
흔히 궁궐은 왕과 왕족들이 사는 곳 정도로 인식할 뿐, 조선에서 가장 핫한 직장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궁궐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왕에 관한 것에 한정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궁궐을 직장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궁궐은 나라의 주인인 왕의 업무 공간이자 생활공간이기도 했지만, 뭇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궁궐을 직장으로 둔 사람들을 살펴보면, 신분상으론 최상층인 양반부터 최하층인 노비까지 모든 계층이 있었고, 업무적으론 관리직에서부터 비서직·사무직·전문직·기술직·경비직·잡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들 대부분은 매일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근무하고 어떤 처우를 받았을까?
궁궐은 크게 내전과 외전으로 구분하는데, 내전은 왕과 그 가족들의 생활공간이고, 외전은 왕의 업무공간이다. 그래서 내전은 궁궐 깊숙한 곳에 뒀는데, 이곳엔 임금이 사생활을 하는 침전, 왕비가 머무는 중궁전, 대비가 머무는 대비전, 후궁들과 궁녀들이 머무는 여러 건물이 모여 있다.
한편 외전은 임금이 평소에 업무 공간으로 사용하는 편전(사정전)을 기점으로 바깥쪽으로 배치돼 있는데, 편전 바깥으로는 경복궁의 근정전을 비롯해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등과 같이 공식 행사를 치르는 정전이 있고, 정전의 담 바깥에 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의 사무실인 궐내각사가 있다. 궁궐을 직장으로 삼아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궁궐 속에 있는 관청을 뜻하는 궐내각사에서 근무한다.
그러면 궐내각사는 구체적으로 궁궐 어느 곳에 배치돼 있었을까?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사례로 삼아 한 번 살펴보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 들어서면 정면에는 흥례문이 보이고, 흥례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교서관과 승문원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전연사와 전설사가 있었다. 그리고 흥례문 왼쪽의 용성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내사복시가 있었고, 또 용성문의 반대편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위도총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 관청들의 임무가 무엇인지는 뒤에 논하기로 하고, 경복궁 안으로 계속 들어가 보자. 흥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는 근정문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유화문이 있었다. 대다수의 궐내각사는 유화문을 열고 들어가면 만날 수 있었다.
유화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간원이 맨 앞에 있고, 그 안쪽에는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이 나란히 있었다. 거기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흠경각·내의원·상서원·사옹원·춘추관·관상감·내반원·수정전(집현전)·빈청·경연청·금군청·선전관청·액정서·내수사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흥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근정문이 보이는데, 근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있고, 그 오른쪽에 있는 일화문을 빠져나가면 세자가 머무는 동궁이 나온다.
이렇듯 궁궐 안에는 20여 개의 관청이 있었다. 이곳에는 양반부터 노비에 이르는 계층들이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하며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궁궐에서 근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계약직이거나 월급이 없는 무급직이라도 궁궐에서 근무하는 것을 매우 선호했다. 조선시대 궁궐은 그만큼 핫한 직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궐 속 직장들 중에 ‘베스트 잡(job)’은 어디였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궁궐 속 직장들의 임무와 역할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궁궐 속에 있는 20여 개 기관의 임무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됐다. 첫째는 왕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고, 둘째는 왕과 왕족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 셋째는 사생활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왕의 업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 기관으로는 승정원·홍문관·예문관·사간원·승문원·상서원·교서관·춘추관·빈청·오위도총부 등이 있었다. 이 기관들의 주된 임무는 국정 논의, 자문, 문서 작성, 군무 등이었다. 신변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기관으로는 금군청과 선전관청이 있었다. 그리고 내반원을 비롯해 내의원·사복시·내사복·액정서 등 여타 기관들은 생활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이 기관 중에 조선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고 우러러보는 직장, 즉 베스트 잡은 어디였을까?
조선은 신분 사회였으니, 당연히 양반들의 선호도가 가장 높은 직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왕조 사회로서 왕을 정점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구조였다. 왕은 입법, 사법, 행정권을 모두 가진 절대 권력자였다. 그리고 양반은 왕의 명령을 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관리 계층이었다. 따라서 양반의 직장 선호도는 당연히 왕과의 거리와 비례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관리는 권력을 행사하는 계층인 만큼 권력의 정점인 왕과 가까이 있을수록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관직 중에서 왕과 가장 밀접한 기관은 어디였을까? 우선 문관 직을 살펴보면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이 있고, 왕의 자문기관이자 언론 기관인 홍문관, 왕의 글을 짓고 사초를 작성하는 예문관, 그리고 간언을 전담하는 사간원 등 네 부서를 꼽을 수 있다. 이 네 기관의 공통점은 모두 대궐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네 부서의 관원이 된다는 것은 출세가도에 올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특히 이 네 기관 중에 홍문관을 최고의 부서로 꼽았다. 그래서 홍문관은 ‘가장 깨끗한 요직’이라는 뜻의 청요직(淸要職)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홍문관은 예문관과 함께 나라의 학문을 책임질 뿐 아니라 임금의 자문기구이면서 동시에 언론 기관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에 책임도 무겁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과 함께 언론삼사(言論三司)로 불렸지만 사헌부는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고, 사간원은 간쟁을 전담하는 부서인 데 반해 홍문관은 학문과 자문, 언론에만 치중하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적었다. 이것이 홍문관을 사헌부나 사간원보다 선호하는 이유였다. 또한 홍문관의 관리는 예문관의 상위 직책을 겸하기 때문에 왕의 글을 짓는 데도 간여한다. 하지만 예문관 관원들처럼 사초를 작성하는 임무가 없기 때문에 피로도가 덜하고 책임감도 덜하다. 홍문관은 여러모로 문관들이 선호하는 장점들만 모아놓은 기관인 셈이다. 이에 비해 승정원의 주서와 승지들은 항상 격무에 시달리고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도 매우 심했다. 특히 승지들은 육조의 모든 업무와 연관돼 있기 때문에 늘 무거운 책임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왕과 가장 가까운 부서 중에 홍문관을 제일의 직장으로 꼽는 것이다.
이렇듯 홍문관이 문관들이 가장 선호하는 베스트 잡이라면, 무관들이 가장 선호하는 베스트 잡은 어디일까? 바로 무관직 중에서 유일하게 청요직으로 분류됐던 선전관청이다. 선전관청은 무반들의 승정원으로 불리는 곳인데, 홍문관 관보다 왕의 신임이 더 높은 기관이었다. 선전관청의 가장 주된 임무는 병력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는 부신의 출납과 전국 각 군에 왕명을 전달하는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왕의 목숨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전관은 왕이 외부로 나갈 때는 가장 근거리에서 왕을 경호하고, 왕이 잠자리에 들면 목숨을 걸고 침전을 지켰다. 물론 야간에 왕을 가장 가까이서 시중드는 존재는 궁녀와 환관이다. 하지만 그들은 왕의 사생활을 시중드는 역할을 할 뿐이었고, 왕의 목숨을 지키는 역할은 선전관의 몫이었다. 선전관은 왕 주변에서 유일하게 칼을 차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왕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선전관에 임명되는 것은 당연했다.
선전관의 숫자는 대개 20명 정도였는데, 정3품 당상관인 선전관 1인이 행수로서 예하를 통령하는 책임을 졌고, 그 밑으로 종6품의 참상관인 선전관이 3인, 종9품의 참하관인 선전관이 17인 있었다. 조선의 왕들은 이들 선전관에게 매일 밤 자신의 목숨을 맡긴 채 잠들었던 것이다. 이렇듯 선전관의 임무가 막중했던 까닭에 선전관 출신들은 고속 승진의 특전을 입어 조선 무관의 중추로 성장했다. 한마디로 출세가 보장된 직책이었으니, 무관들이 가장 선호하는 베스트 잡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 용어설명
청요직(淸要職) : ‘가장 깨끗한 요직’이자 ‘지위가 높고 귀한 관직’을 뜻한다. 조선 문관들이 선호한 언론기관인 ‘홍문관’은 청요직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무관직 가운데 유일하게 청요직으로 분류된 기관은 ‘선전관청’이다. ‘무반들의 승정원’으로 불린 선전관청은 병력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는 부신의 출납, 각 군에 왕명을 전달하는 역할, 왕의 목숨을 지키는 임무 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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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1966년생. 한국외대 독문과·철학과 졸업. 200만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크리미널 조선’ ‘에로틱 조선’ ‘메디컬 조선’ 등 다양한 역사 교양서를 집필했다. 흩어진 사료를 조합해 서사를 구성하는 스토리텔링으로 ‘대중 역사저술’ 분야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궁녀 ‘왕의 여자’ 인식은 잘못… 관리처럼 정식 품계받은 전문직 공무원
▲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박영규의 지식카페 - ③ 궁녀들의 직장생활Ⅰ
조선엔 정5품 제조상궁부터 종9품 나인까지 200명이 ‘궁중 女官’으로 근무… 나머지 500명은 품계 없는 賤婢신분
왕의 性생활을 비롯 신변보호·의·식·주 등 7개로 역할 나눠져… 때로 최고직 제조상궁은 정승들과 의남매 맺기도
궁궐의 직업 세계를 논하자면 궁녀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왕조시대의 궁녀는 그야말로 궁궐을 상징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흔히 궁녀는 궁궐에 한 번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는 가련한 여인들로만 인식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궁녀를 ‘궁궐귀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왕만 바라보는 ‘왕바라기 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직업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그들은 단순히 궁궐에서 왕족을 시중드는 시녀들이 아니라 왕조시대의 전문직 여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궁궐은 궁녀란 존재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궁녀의 역할은 컸다. 그럼에도 궁녀가 그저 왕의 후궁 자리나 넘보는 여인들로만 인식되는 것은 궁녀의 역할과 직분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이다.
우선 궁녀라는 용어의 뜻부터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궁녀(宮女)의 정식 명칭은 ‘궁중여관(宮中女官)’이다. 궁중여관이란 궁궐 안에서 근무하는 여성 관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궁녀들은 여느 관리처럼 일정한 지위를 가지고 봉급을 받는 전문직 여성 공무원이다.
궁중여관은 줄여서 궁관 또는 여관이라고도 불렀다. 원래 궁녀의 범주에는 품계를 받는 여관과 품계를 받지 못하는 천비(賤婢)로 구분돼 있었는데, 좁은 의미의 궁녀는 바로 여성 관원을 의미하는 여관을 지칭한다. 나머지 천비 신분에 해당하는 궁녀를 비자라고 불렀으며, 궁관과 명확히 구분했다.
궁중여관의 품계는 종9품에서 정5품 사이로 정하고, 이들 중 6품 이상은 상궁, 그 아래로는 나인으로 통칭했다. 원래 상궁이라는 명칭은 정5품 여관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6품의 여관까지 아우르는 명칭이 됐다. 그리고 나인은 품계마다 별도의 명칭이 있으나 편의상 종9품에서 정7품에 이르는 여관을 모두 나인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나인은 궁궐 내부 사람을 뜻하는 ‘내인(內人)’을 습관적으로 나인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대개 조선의 궁녀 숫자는 평균 700명 정도 됐으나, 이 숫자에서 비자를 제외하면 여관의 숫자는 200명 정도다. 이들 여관은 대개 열 살 이전에 입궁해 견습나인이 되고, 이후 15년이 지나면 정식나인이 되며, 30년이 지나면 상궁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철저히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여성 관원으로 성장하게 된다.
◇7개 부서로 구성된 궁녀 조직 = 궁녀 조직은 근본적으로 왕과 왕실 사람들의 생활을 보조하는 차원에서 형성된 것이기에 그 취지에 맞게 구성됐다. 모두 7개 부서로 이뤄졌으며, 각 부서는 철저히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도록 짜여 있다. 7개의 부서를 나열하자면 지밀(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세수간(洗手間), 생과방(生果房), 소주방(燒廚房), 세답방(洗踏房) 등이다.
지밀은 이름 그대로 궁궐의 가장 비밀스러운 일들을 담당한다. 성생활을 비롯해 왕과 왕비의 신변 보호나 의식주와 관련된 일체의 일이 지밀과 관계돼 있다. 침방은 바늘로 하는 모든 일들, 즉 왕과 왕비는 물론이고 궁궐에서 소용되는 모든 옷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수방은 옷에 수를 놓거나 장식물을 다는 임무를 띠고 있다. 세수간은 세숫물과 목욕물을 담당한다. 옻칠을 한 커다란 함지에 따뜻한 물을 담고, 함지를 씻고, 목욕을 시키는 역할도 이곳 궁녀들의 몫이다. 거기다 내전을 청소하고, 지(요강)나 매우틀(대변기), 타구와 관련된 일들도 모두 이들이 한다. 왕비가 나들이할 때 가마 옆에 서서 시위하는 역할도 이들의 중요 임무 중 하나다. 생과방은 식사 이외의 음료수나 다과를 준비하는 곳이다. 식혜, 다식, 떡, 각종 죽 등도 여기서 만들어진다.
소주방은 음식을 담당하는 곳이다. 소주방은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뉜다. 안소주방은 수라를 담당하는 곳이라 흔히 수라간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선 주식에 올라가는 각종 반찬류를 만든다. 밖소주방은 각종 잔치상이나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궁궐에는 이틀이 멀다 하고 잔치나 제사가 있기 때문에 이곳 궁녀들은 몹시 분주할 수밖에 없다.
세답방은 한마디로 빨래방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빨래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세탁, 다듬이질, 다리미질, 염색 등이 포함된다.
◇상궁들의 핵심 보직 = 이런 궁녀 조직은 내명부(內命婦) 산하에 있다. 내명부 속에서 여관들은 별도의 조직을 갖게 되는데, 그 우두머리는 정5품의 제조상궁이 맡는다. 제조상궁은 큰방상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비록 품계는 정5품이지만 여관들의 재상 격이다. 그녀의 위상은 실제로 조정의 재상들조차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위풍당당했다. 때로는 정승들이 제조상궁과 의남매를 맺을 정도로 위세도 대단했다.
제조상궁 아래로 부제조상궁, 지밀상궁, 감찰상궁, 보모상궁, 시녀상궁 등이 핵심 보직이었고, 이들의 품계는 모두 정5품이었으며, 서열에 따른 위계질서가 매우 엄격했다. 여관 중에 서열 2위인 부제조상궁은 아리고(阿里庫, 아랫고)상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랫고란 하고(下庫), 즉 내전 창고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녀가 내전의 창고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전 창고엔 왕의 사유재산 범주에 드는 각종 보물 및 귀중품이 보관되는데, 아랫고 상궁은 이곳의 물품 출납을 책임진다.
서열 3위는 지밀상궁이다. 지밀상궁은 대명(待命)상궁이라고도 하는데, 항상 왕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늘 어명을 기다리는 처지이기에 붙여진 호칭이다. 감찰상궁은 궁녀들의 행동을 감찰하고 평가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들의 감찰 대상은 주로 일반 상궁과 나인 및 견습나인들이다. 나인들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법도에 어긋한 행동을 했을 때 형벌을 가하는 것도 감찰상궁의 소관이다. 감찰상궁이 내릴 수 있는 형벌은 가볍게는 종아리형에서 크게는 유배형까지 가능하다. 일반 나인들에겐 가장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보모상궁은 왕 자녀의 보모 노릇을 하는 상궁이다. 동궁에게는 두 명의 보모상궁이 있고, 나머지 왕 자녀에게는 한 명씩 붙여진다.
시녀상궁은 지밀에 속하는 상궁으로서 서적이나 문서에 관계된 일을 맡고 있으며, 때론 세자나 세자빈을 시위하는 일도 한다. 또 종실이나 외척의 집에 내리는 하사품을 전달하거나 왕비나 왕대비의 친정집에 특사로 가기도 한다. 흔히 어명을 받고 행차하는 봉명(奉命)상궁도 대개 시녀상궁이 맡는다. 특별한 보직을 맡지 못한 상궁들을 흔히 일반 상궁이라고 한다. 이들은 각 처소에 배치돼 나인들을 통솔하고 보직 상궁들의 지시를 받아 업무를 처리한다. 보직을 가진 상궁은 대개 5품 벼슬을 받은 고참 상궁이지만, 일반 상궁은 그 아래 6품 벼슬을 받은 상궁이다. 나인들은 이들을 그저 ‘마마님’이라고만 부른다.
이들 외에 특별상궁이라는 것이 있다. 다른 말로 승은상궁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임금의 승은을 입은 궁녀다. 특별상궁이 아이를 낳으면 대개는 후궁의 작위를 받는다. 하지만 특별상궁은 보직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일반 여관에게는 업무와 직위가 주어지지만 후궁에게는 특별한 업무가 없다. 특별상궁은 아무 업무도 하지 않기 때문에 상궁이긴 하지만 후궁으로 취급하는 게 옳다.
상궁은 이렇듯 5품과 6품으로 이뤄져 있고, 그 아래 나인들은 7, 8, 9품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일반적으로 품계는 나인이 된 순서에 따라 주어지고, 품계보다는 서열 위주의 위계가 이뤄진다. 간혹 권력을 등에 업고 서열을 깨고 선배보다 먼저 상궁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관들 사회에선 그런 상궁을 입상궁이라 하여 그다지 대우하지 않는다.
내명부 품계에 따른 직책 명칭은 크게 상(尙), 전(典), 주(奏) 세 가지로 구분된다. 상은 5, 6품의 직책에 붙고, 전은 7, 8품에 붙으며, 주는 9품에만 붙는다. 그러나 대개 5, 6품의 직책을 가진 여관을 통칭해 상궁이라 하고, 그 아래 7, 8, 9품의 직책을 가진 여관을 나인이라 한다.
■ 용어설명
궁중여관(宮中女官) : ‘궁녀’의 정식 명칙으로 궁궐 안에서 근무하는 여성 관원을 뜻한다. 품계를 받는 궁녀 가운데 6품 이상은 ‘상궁’, 그 밑으로는 ‘나인’이라 통칭했다. 여성 관원은 대략 200명이었으며 궁녀 조직은 지밀·침방·수방·세수간·생과방·소주방·세답방 등 7개 조직으로 구성됐다.
‘야간당번’ 지밀궁녀, 2교대 근무… 월급은 최고 980만원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박영규의 지식카페 - ④ 궁녀들의 직장생활Ⅱ
궁녀들에겐 월봉 이외에 명절· 생일 때마다 따로 쌀·비단 제공… 상궁들에겐 ‘하녀 격’ 방자 쓸 수 있는 비용 별도 지급
월봉 상당액 주로 궁 바깥나들이때 기생·악사 고용 ‘유흥비’로 써… 대부분은 富축적하지만 직계자손없어 혈족들이 재산 차지
그렇다면 궁녀들은 어떤 방식으로 근무할까? 궁녀는 대개 격일제 근무이고, 야간 당번을 서야 하는 지밀 같은 경우만 하루를 주야로 나눠서 2교대로 근무한다. 흔히 이를 번(番)살이라고 한다. 번살이는 이미 견습나인 시절부터 시작되지만, 견습 시절엔 야간 근무는 하지 않고 낮에만 나인들의 보조자로서 근무한다. 일종의 예비 훈련인 셈이다.
지밀의 번살이가 본격화되는 것은 관례를 올린 뒤부터다. 번은 2명이 한 조가 되는데, 2명씩 4명이 낮과 밤으로 교체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낮 근무와 밤 근무가 서로 교대한다. 근무 교대 시간은 오후 3∼4시와 새벽이다. 교대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소 달라진다.
지밀 외의 다른 부서는 격일제로 근무한다. 비번일 때는 자신의 처소에서 개인 생활을 영위한다. 이렇게 근무 규정이 명백한 만큼 당연히 이들에게도 급여가 지급된다. 하지만 일반 관리들이 녹봉을 받는 것에 비해 이들은 월봉을 받는다. 녹봉(祿俸)은 녹과 봉을 결합한 용어로 녹은 나라에서 받는 토지를 말하며 봉은 곡식으로 주어지며 계절마다 곡식이 지급되는 데 비해 월봉은 매월 곡식 또는 돈으로 지급된다.
‘속대전’에 따르면 궁녀 중 최고위직인 제조상궁의 월급은 쌀 25말 5승, 콩 5말, 북어 110마리였다. 이는 정3품 당상관의 월급 수준이었다. 그리고 부제조상궁은 쌀 19말 5승, 콩 5말, 북어 90마리였다. 그 외의 상궁들은 쌀이 10말에서 16말 사이, 콩은 5말, 북어는 50마리에서 80마리 사이로 지급됐다. 또 고종 3년의 월급 명세서에 따르면 무수리 같은 비자들에게는 쌀 6말, 콩 3말, 대구어 4미가 지급됐다.
이를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려면 다소 복잡하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인 1925년의 월봉 기록을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
1925년 당시 여관과 비자들의 월급 명세표를 보면 지밀이 가장 많은 보수를 받고, 나머지 부서의 월급은 거의 비슷했다. 지밀은 가장 적게 받는 궁녀가 50원이고, 가장 많이 받는 궁녀가 196원이었다. 다른 부서는 최하 40원에서 최고 80원 사이였다. 그리고 비자들은 거의 일률적으로 18원이었고, 비자 중에 가장 우두머리만 20원이었다.
이를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자면 1925년 당시 1원의 가치가 대개 5만 원 정도였음을 고려할 때, 지밀 궁녀의 월급은 최저 250만 원에서 최고 980만 원 사이였고, 다른 부서는 200만 원에서 400만 원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여관들의 월급이다. 그리고 그 아래의 비자들은 대개 90만 원 정도 받았고, 비자의 우두머리만 100만 원 정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정적인 월봉 이외에 명절이나 혼인, 생신 등을 치를 때마다 궁녀들에겐 따로 쌀이나 비단, 옷감 등이 내려졌고, 특히 상궁들에겐 월급 이외에 하녀 격인 방자를 쓸 수 있는 비용을 별도로 지급했다. 거기다 궁녀들에겐 거처까지 제공했음을 감안할 때, 당시 궁녀들의 월급은 결코 낮은 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 혼자 사는 궁녀가 월급을 받아 어디에 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궁궐에서 평생 지내는 궁녀에게 무슨 돈이 필요했을까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궁녀도 돈 쓸 곳이 많았던 모양이다.
대개의 궁녀는 아기나인과 견습나인 시절에 받은 월봉을 모두 부모가 대신 받았다. 아기나인도 월봉을 받는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일단 궁녀로 발탁돼 입궁하면 나라에서 반드시 월봉을 지급했다. 심지어 4살 된 아기나인의 월봉을 지급한 기록도 있다. 물론 부모에게 곡식으로 지급된다.
견습나인 시절을 마치고 정식나인이 된 궁녀들은 대개 자신이 월봉을 관리한다. 그렇다면 이들 궁녀는 받은 월봉으로 무엇을 했을까?
궁녀들은 월봉으로 받은 돈의 상당액을 주로 바깥나들이에 쓴 것으로 보인다. 기생을 동원하고 궁궐의 별감이나 하인들도 동행해 한바탕 놀고 오는 것이 궁녀들에겐 최고의 낙이었다. 그런데 이런 놀이 한 번에 드는 비용이 꽤 컸다. 기생을 동원하면 음악이 뒤따르기 마련이고, 음악이 있는 곳에는 악사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을 노는 자리에 동원하려면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궁녀들은 돌아가면서 이런 바깥놀이를 즐기는 것을 오랜 전통으로 여겼다. 그 때문에 그들이 받은 월봉의 상당 부분은 이를 위해 썼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녀들이 월봉을 먹고 노는 데만 쓴 것은 아니었다. 궁녀 중 상당수는 월봉을 차곡차곡 모아 재테크에 사용했다. 특히 상궁쯤 되면 궁궐 바깥에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고, 토지를 사들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이렇게 축적된 궁녀들의 재산은 대개 양자로 들인 조카들에게 상속됐다. 궁녀들은 비록 월봉과 여타의 일로 생기는 돈으로 부를 축적하긴 하지만 유산을 물려줄 직계 자손이 없기 때문에 결국 혈족들이 재산을 차지했다. 대다수의 궁녀가 월봉을 주로 먹고 노는 데 쓴 이유도 그들의 이런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궁녀는 궁궐에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실 궁녀는 절대로 궁궐 안에서 죽으면 안 된다. 혹 궁녀 중에 궁궐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을 거두면 측문으로 몰래 업어다 밖으로 내보내곤 했다. 그런 궁녀를 제외한 모든 궁녀는 산 채로 궁 밖에 나온다.
궁녀가 궁궐에서 내보내지는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크게 보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궁녀가 병들거나 늙어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이고, 둘째는 나라에 큰 재난이나 우환이 있을 때이며, 셋째는 궁녀가 죄를 지었을 때다.
궁녀는 원래 종신제이기에 죽을 때까지 궁 안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대개 나이가 60살이 넘으면 야간근무는 없어지고 주간에만 근무한다. 그런데 너무 늙어 주간근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출궁한다. 또 젊은 상궁이나 나인이라도 병이 너무 깊어 근무할 처지가 되지 않으면 역시 출궁한다.
출궁한 궁녀는 대개 본가로 보내진다. 이럴 경우 본가의 동생이나 오빠, 또는 조카가 출궁할 궁녀를 데려가기 위해 궁 안으로 들어온다.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이를테면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된다거나 궁궐에 우환이 지속될 때도 궁녀들을 내보낸다. 이 경우엔 대개 젊은 나인들이 출궁하는데, 그 이유는 나라의 재난이 시집을 가지 못한 여자들의 원한이 뭉친 결과라는 속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설은 오래전에 중국에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실제 중국에선 오제시대 이후로 줄곧 가뭄이 생기면 궁녀들을 방출하곤 했다. 또 당 태종 이세민은 가뭄이 너무 심해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자신이 직접 메뚜기를 잡아 씹어먹으며 백성들을 독려했고, 이어 궁녀 3000명을 해방하기도 했다. 이런 중국의 풍습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나라에 변고나 재난이 생기면 궁녀를 내보내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궁녀는 출궁했다고 해서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궁녀는 입궁할 때에 이미 임금의 여자가 된 것으로 간주되기에 다시 시집을 갈 수 없도록 했다. 궁녀를 해방시키는 원래 의도가 결혼하지 못한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또 결혼하지 못한 총각들에게 짝을 내어준다는 의미인데, 실제는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죄를 지은 궁녀를 출궁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죄지은 궁녀들은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
영조 10년 9월 27일에 어기(御器)를 훔친 궁녀를 특별히 사형에서 감형한 기록이 있다. 이때 감형된 궁녀는 섬으로 귀양 갔다. 귀양 간 궁녀는 대개 관비로 지내며 노역을 해야 했는데, 절대 결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출궁한 궁녀들은 죽은 뒤에는 대개 화장됐다. 하지만 모든 궁녀가 화장된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 일부는 화장되지 않고 무덤이 마련됐다. 그들의 무덤은 대개 한성 주변에 있는데, 경기도 고양시엔 최근까지 궁녀들의 무덤이 남아있었다.
■ 용어설명
번(番)살이 : 궁녀들의 근무 방식을 일컫는 용어. 궁녀들은 보통 격일제로 근무했는데, 야간 당번을 서는 ‘지밀’은 주야 2교대로 일했다. 견습나인 시절부터 ‘번살이’를 시작하지만, 일종의 예비 훈련을 받는 견습 땐 야간근무는 하지 않고 낮에만 나인들의 보조자로 근무했다.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21122401031412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