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구미래 박사가 쓰는 사찰후원의 문화사] <11> 우물
-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 승인 2021.07.13 16:29
- 호수 3674
정화수 길어 부처님께 올린 신성한 공생의 물
울진 불영사 설선당 앞에 조성된 4개의 물확.
공동체의 젖줄, 우물
<조선왕조실록>에 ‘마을을 같이하고 우물을 같이하는 무리’라는 말이 나온다. 우물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인식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물을 쓰던 시절에도 개인 집에 따로 둔 경우는 드물었고, 마을에 공동우물이 여러 개 있으면 구역을 나누어 사용했다. 같은 우물을 사용하는 집들끼리 마을보다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우물을 중심으로 통·반이나 웃마·아랫마의 경계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렇게 구역을 나누고 집집마다 정해진 우물을 써야 혼란을 막고 수량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이는 ‘한 정지에 두 샘이 얼쩡거려서는 안 된다’는 농가의 금기어에서도 잘 드러난다. 두 곳에서 길어다 쓸 경우, 차별적인 용도로 사용함으로써 우물물의 우열을 가르는 행위가 발생해 공동체간의 갈등이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물은 마을 공동의 재산이자 젖줄이었기에 헤프게 쓰거나 함부로 다루는 일을 엄격히 제재하였다. 나라에서도 이를 엄히 규제하여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우물을 5가(家)마다 하나씩 파도록 했다. 태종 14년에는 노상인(盧尙仁)이라는 관리가 새로 지은 집 3채에 각기 우물을 판 이유로 파직당한 사례도 전한다.
사찰우물은 마을과 멀리 떨어진 데다 출가수행자들의 영역이라 마을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옥수동 미타사는 1970년대까지 경내의 수질 좋고 큼지막한 우물을 인근주민들과 자유롭게 나누었다. 해마다 한 번씩 우물물을 모두 퍼내어 청소할 때면 바닥에서 맑은 물에만 사는 작은 산가재가 한 대야씩 나오곤 했다. 청소를 마치면 염불과 함께 산가재를 다시 우물에 넣어주었고, 물을 모두 퍼낸 우물바닥에선 어느새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나 금세 우물을 가득 채웠다.
정화수(井華水)는 첫새벽에 길어온 깨끗한 우물물·샘물을 말하니, 이 물은 참된 의미의 청수(淸水)였다. 사찰에서는 이른 아침 정화수를 길어 부처님께 올리고, 청수로 마지와 대중공양을 짓고, 발우공양 때 출가자의 발우를 씻은 청수를 아귀에게도 베풀었으니, 모든 공동체의 생명을 지켜준 신성한 공생의 물이었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물확.
물지게로 길어온 식수
사찰에 우물이 있어도 사정이 순조로운 경우는 드물었다. 1960년대 낙산 청룡사에는 명부전 뒤의 우물과 채공간 옆의 펌프가 있었지만 식수로 쓸 수 없어, 식재료를 씻거나 빨래 등 허드렛일에만 사용했다. 식수는 절 뒤로 올라가는 낙산기슭의 공동수도에서 매일 행자와 학인들이 당번을 정해 나무 물지게로 받아와야 했다. 물을 채운 양동이 두 개를 양쪽에 매달고 지게를 져야 했는데, 요령이 생기기 전까지는 일어날 때마다 힘이 들었고,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물이 쏟아지기 일쑤였다.
수원 청련암에는 몇 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물맛 좋고 수량도 풍부한 우물이 경내에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법당과 후원은 지대가 높고 우물은 아래쪽에 있어, 나무지게로 우물물을 길어서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찰마다 물과 관련된 수두(水頭) 소임을 따로 두었지만, 물을 길어오는 일이 힘든 데다 양이 많아 하소임자들이 나누어 맡았다. 수두는 대개 급수시설을 관리하고 필요한 곳에 물을 채워두는 일을 맡았다.
이러한 사례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고, 먼 길까지 가서 식수를 길어 와야 하는 사찰도 많았다. 바닷가 어느 절에서는 2km 넘게 떨어진 우물도 하루에 두 번 물길이 열릴 때만 갈 수 있었다. 이처럼 경내에 급수시설이 없는 곳도 있었고, 우물을 파도 물 사정이 좋지 않으면 먼 곳의 물을 길어 먹어야 했다. 따라서 수질이 좋고 풍부한 물이 나올 수 있는 곳을 찾아 우물을 파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와 관련해 우리민족은 우물의 근원이 하늘의 은하수와 별에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우물을 팔 장소에 수십 개의 물동이를 두고 밤중에 이를 관찰해,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이 담긴 동이 자리에 우물을 파면 좋은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물은 하늘을 봐야 한다’며 덮지 않고 관리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하늘의 은하수가 내려와 맑은 물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물속이 깜깜하면 비가 온다’는 담론 역시 우물이 하늘의 정보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물이 하늘을 담고 있다는 생각에는 우물물이 땅속에서 솟아난다는 사실과 정반대에 놓인 신선한 상상력이 담겨 있다.
산에서 흐르는 물
산사에서는 우물을 조성하기보다 산에서 흐르는 물을 끌어다 썼다. 예전에는 계곡의 물이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대나무나 소나무로 만든 홈통을 길게 연결하여 사용했다. 따라서 사찰마다 크고 작은 물확을 두고 대롱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저장하면서, 수로를 만들어 계속 흘러가게 하여 늘 깨끗한 물을 쓸 수 있었다. 지금은 사찰을 찾는 이들이 목을 축이며 쉬어가는 샘물로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사찰의 주된 급수시설이었던 것이다.
선암사의 달마전 뒷마당에 자리한 돌확은 자연 그 자체인 냥 아름답다. 모양이 다른 네 개의 확이 크기순대로 지그재그로 이어지고 돌확 사이는 대나무 홈통으로 연결하여, 가장 큰 확을 채우고 넘치는 물이 다음 확으로 흘러내린다. 따라서 가장 아래의 작은 확에서 물을 떠 마셔야 제 맛이라 한다. 사찰에서는 맨 위의 확에서 뜬 물을 불단에 올리는 청수로 삼고, 다음의 것을 대중의 식수로 쓰고 있다.
1960년대 동화사 양진암에서는 산중의 흐르는 물을 받아 쓸 수 있는 대형 수조(水槽)를 갖추어 두고 사용했다. 수질도 좋고 수량도 풍부해서 대중 모두가 목욕하는 물까지 하나의 수급시설로 감당이 되었다. “물이 확보되지 못하면 선방 객을 받지 못한다”는 철칙이 잘 지켜진 선방이었다.
석남사에서도 대나무를 쪼갠 홈통을 상류 개울과 연결해 물이 내려오도록 했고, 계속 흐르는 물이라 겨울에도 얼지 않았다. 이에 비해 해인사에서는 지대가 높아 겨울날씨가 유독 추웠다. 따라서 겨울철에는 매일 해가 진 뒤에 홈통으로 연결한 물을 끊어줘야 물이 얼지 않았다. 어쩌다 수각 소임이 깜빡 잊고 그냥 잠들 때면 다음 날 아침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사다리를 갖다놓고 홈통의 얼음을 모두 깨어 물이 흐를 때까지 공양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아니더라도 흐르는 물을 받을 때는 늘 홈통에 신경을 써야 했다. 수두는 여름철이면 이끼가 끼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나뭇잎이 걸리면 물이 나오지 않으니 수시로 확인하며 깨끗이 관리했다. 뿐만 아니라 홈통이 견고하지 못해 수시로 터지곤 하여 보수해야 했으니, 물과 불의 원활한 조달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부여 대조사의 수각 불유정(佛乳井).
우물가 이야기
식수로 쓰는 우물이나 돌확에는 기둥을 세우고 비 가림지붕을 만들어 수각(水閣)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야 식수로 쓸 수 있을뿐더러, 비오는 날에도 급수공간에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물가에서는 쌀과 나물을 씻고 설거지도 할 뿐더러, 무·배추를 소금에 절여 김장을 담그는 일까지 크고 작은 후원일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지하수인 우물물과 계곡에서 내려온 물은 여름에도 시원하여 사찰마다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냉장고의 구실도 겸하였다. 삶은 보리쌀, 나물반찬 등을 수각의 선반에 보관하는가하면, 두레박처럼 광주리에 담아 우물 속에 넣어두곤 하였다. 두부도 돌확에 담가두면 이삼일 정도는 보관했다가 먹을 수 있었다.
마포 석불사에는 열길 깊이의 수질 좋은 우물이 있어, 양철로 지붕을 만들어두고 귀하게 썼다. 우물에는 많은 것을 보관했는데, 당시엔 신도들이 초하루·보름마다 독불공(獨佛供)을 올리러 왔기에 늘 나물과 부침개 등이 남곤 했다. 여름철에는 재 음식을 소쿠리에 담아 보자기로 싸서 우물에 넣어 두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어느 절에서는 김치통을 우물에 담가뒀다가 끌어 올릴 때 뚜껑이 열려 김칫국물이 쏟아지고 말아, 우물을 다 퍼내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공양간에는 따로 커다란 물독을 갖추어두었고, 공양간 옆에 수조를 만들어 쉽게 물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곳도 있었다. 따라서 행자들은 저녁마다 우물물을 길어 물독에 가득 채워놓곤 하였다. 1970년대 수덕사 견성암처럼 수조를 공양간 안에 둔 곳도 있었다. 국거리 등을 바깥에서 씻으면 모기와 벌레가 많이 달려드니, 공양간에 큰 수조를 갖추어두고 큰방 대중스님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물일을 했다고 한다.
물 사용과 관련해 송광사에는 예로부터 독특한 전통이 이어졌다. 송광사도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끌어다 썼는데, 당시 노스님들은 승방마다 입구에 대야를 놓아두고 바깥에서 들어올 때마다 손을 씻곤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 송광사로 출가한 어느 행자는 스님들이 밖에만 나갔다오면 손을 씻고 들어가는 청정한 모습을 보고 감탄하였다.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당시의 그 행자가 노스님이 되어 머무는 화엄전의 한 승방에서만 이어지고 있다.
[불교신문3674호/2021년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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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래 박사가 쓰는 사찰후원의 문화사] <11> 우물 - 불교신문
공동체의 젖줄, 우물에 ‘마을을 같이하고 우물을 같이하는 무리’라는 말이 나온다. 우물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인식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물을 쓰던 시절에도 개인 집에 따로 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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