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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원형과 근대기억 그리고 꿈과 현실

jaunyoung 2015. 6. 3. 09:44

2007년 경향신문에서 기획보도한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에서 부산에 관한 3편의 기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2)부산의 원형을 찾아

 

 

-컨테이너·고가도로 옆에 버려진 ‘도시의 서사’-

영도는 원래 절영도-타고난 역동성

① 증산에서 바라 본 부산의 기원지. 현 성남초등학교 교정 서쪽 끝에 있었던 부산진성 서문이 멀리 자성대 산 밑에 잘못 복원되어 있다. ⓒ 김민수.

 

‘Dynamic Busan’ 최근 부산시는 도시혁신계획의 구호로 ‘역동성’을 내걸었다. 아마도 이 구호를 접한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각기 다를 것이다. 내 경우, 부산시 영도의 옛 이름 절영도(絶影島)가 먼저 떠오른다. 옛날 이 섬에는 ‘제 그림자를 끊을 만큼’(絶影) 겁나게 빠른 명마 방목장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부산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이를 영도라고 부른다. 본래의 역동성을 스스로 버리고 ‘그림자만 남은 섬’(影島)으로 전락한 셈이다. 새 구호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부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사실 부산의 경관적 다양성은 그 자체가 역동성의 근간이다. 구릉성 산지와 만입이 심한 해안 지형 덕에 다채로운 삶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부산의 도시 이미지는 어떤가. 획일적인 난개발로 특색 없이 복잡성만 증가했다. 부산탑에 올라 보면, 멀리 북항 일대에서부터 건설 중인 107층 롯데월드 옆 영도다리에 이르기까지 건물, 가로, 철도, 항만 등이 서로 뒤엉켜 있다(그림1). 과연 무엇이 역동적인 부산을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을까? 원형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로선 옛 지도와 그림 등을 통한 우회적인 방법만이 가능하다. 길이 잘 보이질 않을 때는 지도의 도움이 중요하다.

부산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는 조선조 성종2년(1471년) 신숙주가 편찬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 수록된 ‘동래부산포지도’(東萊富山浦之圖)로 알려져 있다. 이 필사본 지도는 절영도 쪽에서 북쪽 부산포를 조망하고 있다. 포구 양쪽 두 개의 산 사이에 범천이 흐르고, 왜관과 견강사(見江寺), 영청(營廳), 동평현(東平縣) 등의 위치가 간략히 표시되어 있다. 왜관 앞 바다엔 넘실대는 파도를 힘차게 그린 수파묘(水波描)가 마치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있고, 멀리 북쪽에는 굳건한 동래읍성이 지키고 있다. 이는 도상학적으로 부산포에 눌러 앉아 살았던 왜인들(항거왜인, 恒居倭人)을 통제하려는 조선 정부의 강력한 통제력과 의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15세기까진 ;富山-고지도 속 부산

② 경부선 철도부설 직후 해체된 부산진성과 부산포 전경. 1905년경. 왼편에 정상이 깎여진 자성대와 서문이 보인다. 포구 가운데 돌출되어 곶을 이루는 곳이 영가대 자리다. <부산시 중구청 소장>

이 지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부산의 지명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가마 부’ 산(釜山)이 아니라 ‘부자 부’산(富山)이라는 사실이다. 즉 부산은 동래성에 읍치를 둔 고을로서, 풍요로운 땅을 일컫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동제국기’가 편찬된 후, 성종 12년에 나온 ‘동국여지승람’에 부산은 다음과 같이 ‘가마 부’(釜)자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부산(釜山)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솥 모양과 같아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그 아래가 바로 부산포이니….” 이렇듯 부산은 대략 15세기 중엽까지 풍부한 수산물과 자원을 반영해 ‘부자 부’산이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가마솥 모양의 산 아래 부산포의 지정학적 장소성이 강조되면서 ‘가마 부’산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후, 18세기 지도에 이르러 옛 부산의 시각정보는 입체적으로 제작된다. 예컨대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필사본 ‘해동지도’(海東地圖)의 동래부 편은 실제 경관을 사생하듯 표현해 매우 사실적이다. 이는 영조 때 관에서 편찬한 군현지도로, 조선 후기 소위 ‘진경시대’의 정신을 잘 반영한 회화식 지도였다. 동래읍치를 중심으로 주요 지명, 거리표시 및 교통로까지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북서쪽에는 대규모의 금정산성이, 동남쪽의 수영강 옆에 좌수영 진영이 보인다. 이 좌수영 왼쪽에는 오래 전에 사라진 동래 고읍성(古邑城)이 그려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성은 신라 때 축성되어 동남쪽은 돌로, 서북쪽은 흙으로 쌓았고 둘레가 4430척(1.38㎞)이었다고 전한다. 이 성터는 2003년에 망미동 옛 국군통합병원 터에서 발굴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아파트단지 건설로 인해 훼손되어 버렸다. 지도 중앙에는 동래읍치를 휘감아 돌아 사천(絲川, 현 수영강)과 만나는 온천천(溫泉川)이 보인다. 남쪽에는 부산진성과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나는 영가대(永嘉臺)가 보이고, 서남쪽 해안선을 따라 개운진, 두모진과 담장에 에워싸인 초량왜관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부산진성 안에 그려진 솥뚜껑처럼 도드라진 산이 눈길을 끈다.

③ 이성린(李聖麟), ‘사로승구도’(사路勝區圖), 1748년경. 옛 부산포 경관이 봄날의 정취가 흐드러진 매우 아름다운 절경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 앞쪽에 영가대 선착장과 그 뒤로 부산진성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마지막으로 정부가 제작한 ‘1872년 지방도’는 동래읍성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전해준다(그림2). 평산성(平山城) 구조로 축조된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로 파괴되어 영조 7년에 증축했다고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둘레 1만7291척(5.4㎞), 높이 17척(5.3m)에 달했다는 성곽에는 홍예식 문루구조의 남문과 그 좌우에 서문과 동문이 있었다. 특히 남문에는 이중구조의 익성이 있고, 동서북문은 옹성까지 갖추었다. 동래읍성은 조선시대 주요 읍성의 평균 둘레가 대략 2.9㎞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온천천 위로 동래읍성과 부산진성을 잇는 광제교(廣濟橋), 수영강 하구의 좌수영진과 해운포로 향하는 이섭교(利涉橋)가 보인다. 지금은 사라진 옛 다리들이다. 이 지도는 전략적 중요도에 따라 동래읍성, 좌수영, 부산진, 다대진, 초량왜관의 크기를 다르게 표시해 개항 전 옛 부산의 공간적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임란 후 부산진 왜관은 절영도에 잠시 이전되었다가 1607년에 두모포(현 수정시장 일대)에 정식으로 재설치되었다. 그러나 왜인들은 협소한 두모포에 배가 닿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전을 요청해 1678년 용두산 일대에 초량왜관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후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로 초량왜관 일대는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되어 일제 강점기 부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로써 옛 부산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원형에 대한 기억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솥뚜껑 닮은 자성대-‘가마’ 부산은 어디

④ 부산탑에서 본 북항 쪽 경관. ⓒ 김민수

부산시의 모태인 ‘가마 부’(釜) 산은 가마솥처럼 생긴 산 밑의 포구를 부산포라 부르면서 유래했다고 했다. 도대체 이 ‘가마 부’ 산은 어디인가? 많은 문헌들은 이 산을 동구 좌천동의 ‘증산’(甑山)으로 추정한다. 흔히 이런 주장들은 시루와 가마솥 형상과의 유사성에 기초하고 있다. 예컨대 ‘부산(釜山)의 맥(脈)’에서 저자 최해군 선생은 ‘시루 증’(甑) 자가 말하듯 증산은 산봉우리가 시루같이 평평해 ‘시루대’로 불러 왔다고 한다. 증산 정상은 실제로 평평해 현재 체육공원이 들어서 있다. ‘동구향토지’에 따르면 이 산의 가마솥 모양의 봉우리가 시루형이 된 것은 부산진 내성(內城)을 해체한 왜군이 뒤편 산 정상에 왜성을 축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루 증’산이 ‘가마 부’산이라는 주장은 여러 고지도와 실제 지형을 살펴볼 때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무엇보다 증산의 모습은 그 유래를 감안해도 가마솥 형상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증산은 산자락의 경사가 급해서 가마솥의 완만한 솥뚜껑 형상을 품기엔 지형 자체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가마 부’ 산은 현재 부산진시장 옆의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 즉 자성대 공원일 가능성이 있다.

첫째, 회화식 필사본으로 제작된 고지도들 속에는 부산진지성 안에 가마솥처럼 도드라진 산이 자주 등장하며, 부산포 일대의 주요 경관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광여도’ ‘해동지도’ ‘1872년 지방지도’ 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둘째, ‘동국여지승람’에 “부산포는 가마솥 모양의 산 아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성남초등학교 교정의 서편에 있었던 부산진지성의 서문(금루관) 밖 일대의 포구를 지칭했던 옛 부산포는 자성대에 더 가깝고, 증산 밑의 포구는 개운포였다. 셋째, 자성대 역시 임진왜란 발발 다음해(1593년) 왜군이 산봉우리를 깎아 성을 축성하면서 증산과 같은 시루 형상이 되었다. 실제로 자성대 정상은 현재 게이트볼 운동장으로 사용될 만큼 평평하다. 이는 결정적으로 1905년쯤 부산포 일대의 전경을 담은 사진에서 분명히 확인된다(그림3). 사진 왼편에 정상 부위가 깎여진 자성대와 서문 일대에 형성된 부산포의 모습이 보인다. 따라서 왜군이 솥뚜껑 부분을 깎아내 평평한 시루형이라서 좌천동 증산을 ‘가마 부’ 산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논리라면 자성대도 ‘시루 증’산인 셈이다. 따라서 ‘가마 부’ 산은 좌천동 증산이기보다는 자성대공원의 산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⑤ ‘1872년 지방도’ 동래부편, 1872년. <서울대 규장각 소장>

논란이 많은 ‘가마 부’ 산의 실체는 서로 마주하고 있는 증산과 자성대에 올라 비교해보면 좀더 분명해진다. 왜성축성법으로 깎여 나간 자성대의 산봉우리는 오늘날 나무가 무성히 자라 도드라진 손잡이만 없을 뿐 완전한 솥뚜껑 모양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놀랍게도 질곡과 망각의 세월이 흘러 많이 훼손되었어도 가마부산은 여전히 ‘장소의 원형’을 품고 있는 것이다(그림4). 그러나 범일동 자성대교차로에 서면 과연 이곳을 부산의 기원지라 할 수 있을지 좀 민망해진다. 18세기 중엽 화원 이성린(李聖麟)이 그린 ‘사로승구도’(사路勝區圖, 그림5)에 표현된 부산포의 아름다운 옛 경관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부두에 야적된 컨테이너 더미요 칼로 베듯 허공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뿐이다. 이점에서 최근 부산시가 고유한 지역성과 도시경관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동래읍성 및 부산진 역사길 경관정비’ 등의 10대 전략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읍성 복원과 역사길 정비만이 아니라 앞서 설명한 옛 장소들의 풍성한 서사적 의미를 회복시켜 창조적 상상력과 흥미를 생성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부산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역동적 부산을 가꿔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성궤를 찾듯 도시의 원형을 찾아 나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민수|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경향신문에서 2007년에 기획시리즈로 보도한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에서 부산부분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3)근대 부산의 기억

‘동광동 돌계단’의 식민지배 흔적을 살려라

지난 편에서는 ‘가마 부’ 산(釜山)의 기원지를 찾아 잊혀진 도시의 서사를 회복하려 했었다. ‘부산다움’은 단순히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고 간판을 정리하는 공공디자인이 아니라 도시의 삶과 역사에 대한 의식 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즉, 역사와 삶의 체취가 없는 도시 디자인은 한낱 ‘빈 깡통에 금도금’하는 환경미화사업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은 본래 역동적인 부산이 실타래처럼 뒤엉켜져 버린 이유를 개항기 이후 부산의 근대 공간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동광동 2가 11번지 일본영사관 계단. ⓒ 김민수

 

개항기 ‘네 개의 부산’-조선 안의 日· 歐· 淸…-

“다음날, 차 대접을 받으러 간 나는 서양적인 관습에 신속히 적응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조선인의 놀라운 순발력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예 유럽식으로 편하게 나를 맞이했을 뿐 아니라, 샴페인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이는 19세기 말 조선인 관리들을 만난 한 서양인이 한 말이다. 강화도조약 체결(1876)로 개항한 지 불과 12년 만에 부산은 박래품과 유럽식 취향에 이미 젖어 있었던 것이다. 1877년 부산구조계조약으로 용두산 일대의 초량왜관이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개방되고, 일반 외국무역 역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1882)로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개항장 부산의 변화를 생생히 목격한 인물은 프랑스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샤를 루이 바라(1842~1893)였다. 그는 1888년 10월 말 한성에서 부산까지 여행을 했는데, 사후에 출간된 ‘조선종단기’에서 다음과 같이 부산을 기록했다. “전체가 네 개의 구역으로 뚜렷이 구분된 이 도시는 ‘네 개의 부산’이 가히 한데 모여 있다.” 여기서 그가 첫 번째 부산으로 본 곳은 “일본인들이 수세기 동안 장악한 무역의 중심지”로서 옛 초량왜관 부지에 들어선 일본인 전관거류지였다. 두 번째는 “가장 북쪽에 조선인에 의해 건설된 요새화된 부산”으로 동래읍성 지역을 말한다. 세 번째 부산은 그가 “가장 최근에 생겨난 부산”이라고 한 곳으로 사라진 영선산 일대의 유럽인 거주지였다. 네 번째 “바다 풍경이 압권인 조선쪽 부산”은 조선인 토착민들이 거주했던 부산포를 일컫는다. 이처럼 바라가 목격한 개항기 부산은 적어도 네 개의 지역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가 언급하지 않은 ‘청국조계지’까지 포함하면 부산에는 모두 다섯 개의 부산이 존재했던 셈이다. 즉, 개항기 부산에는 오늘날 서울시를 비롯한 광역대도시들이 꿈꾸고 있는 ‘다핵분산형 도시 모델’이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에도를 꿈꾼 초량왜관-침략 관문으로 재편-

이런 다핵구조의 부산은 개항 후 점차 일본인 전관거류지 중심의 도시로 변해갔다. 부산이 일제 대륙침략의 관문으로 근대화되면서 도시의 역동성이 퇴화되어 갔던 것이다. 일장기 속엔 오직 하나의 붉은 히노마루만이 존재하듯, ‘한 개의 부산’이 되어 버렸다. 이런 맥락에서 부산은 새로 태어난 도시다. 일제의 식민지 도시건설 과정을 연구한 하시야 히로시에 따르면 부산은 경성과 평양처럼 전통적인 도시의 켜 위에 생겨난 도시가 아니었다. 인천과 원산, 대만의 가오슝(高雄), 만주의 다롄(大連) 등과 같은 항만도시들처럼 식민 지배를 위해 완전히 새로 조성된 도시였던 것이다.

1903년 일제가 제작한 부산항일대 시가지 지도. 현 중앙동과 여객터미널 일대에 해당하는 매축지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옛 부산역 자리 오른쪽에 착평 공사로 사라진 영선산이 표시되어 있다. 부산시 중구청 소장.

바라가 무역의 중심지로 보았던 첫 번째 부산인 초량왜관은 용두산을 사이에 둔 동관과 서관으로 구성되었다. 동관에는 왜관 우두머리 관수(館守)와 무역 업무를 담당한 장기체류자들이 거주했고, 서관은 주로 객관으로 사용되었다. 현 신창동 대각사 일대의 서관 쪽과 동관 쪽의 동광동 부산호텔 앞에 서면 옛 초량 ‘왜관도’의 한 장면과 마주하는 듯하다. 아직도 이곳의 필지와 거리에는 왜관에서 유래한 흔적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데 흥미롭게도 초량왜관의 지형은 당시 일본의 성곽도시 에도(江戶, 현 도쿄의 옛 이름)를 연상시킨다. ‘도쿄이야기’의 저자 사이덴스티커는 17세기 에도가 궁성을 중심으로 서쪽의 야마노테(山の手)와 동쪽의 시타마치(下町)로 각각 반원형을 이루며 이원화된 원형 구조였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야마노테는 고지대로 주로 무사계급들이 거주했고, 시타마치는 저지대로 상인이나 직인이 사는 번잡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동서로 구획된 초량왜관의 기본 공간배치가 이와 아주 흡사하다. 예컨대 동관은 무역업무를 담당한 장기체류자들이 거주해 서관보다 훨씬 더 번잡했다. 또한 동관에서 북쪽 부산포로 이어진 지형은 동쪽 시타마치 지역에서 북쪽 스미다가와(隅田川) 하구로 이어지는 에도와 매우 닮아 있다. 이렇듯 왜인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에도의 공간개념을 부산에 이식해 용두산에 신사를 짓고, 선창이 잘 내려다보이는 동관의 동남쪽 산자락에 왜관 수장이 사는 관수가(館守家)를 배치했던 것이다.

은폐에서 치유로-유럽풍 건물에 스민 역사-

이 관수가는 개항기에 관리관청사로 사용되었는데, 이후 여기에 일본 영사관이 들어선다. 현재 동광동 2가 11번지에 일본 영사관으로 올라가던 돌계단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위 오른쪽). 이 계단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한동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백 년을 넘게 견딜 만큼 육중한 4m 폭의 화강암 계단에서 일제침략의 치밀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37개의 이 계단 위에 자리했던 일본영사관 터엔 현재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옛 사진 자료를 보면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경찰서와 왼쪽에 일본인 거류민단사무소가 있었다. 일본영사관은 마치 근위병처럼 이 두 건물을 좌우에 세워두고, 계단 위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수용한 서구건축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1888년에 준공된 두 번째 일본영사관, 후에 이사청(1905년)과 부청사(1910년)로 1936년까지 사용되었다. 부산근대역사관 소장.

일본 영사관 건물은 두 번 지어졌다. 1879년에 처음 지어진 영사관은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목조로 된 르네상스풍 2층 건물로 2층 정면의 회랑과 현관 위의 발코니가 특징적이었다. 사실 이 건물은 1859년에 개항한 나가사키의 히가시야마테(東山手) 외국인 거류지에 세워진 양관 건축을 그대로 흉내낸 것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서구인이 된 양 타자의 시선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84년 다시 지어진 두 번째 영사관 건물은 서양식 목조 구조와 일본식 기와지붕을 결합한 2층으로 이전과 큰 차이를 보인다(위 왼쪽). 소위 ‘화양(和洋) 절충주의’라고 부르는 양식이었다. 이 건물에서 2층을 뚫고 솟아오른 탑옥(塔屋)이 인상적인데, 이는 지배자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건축적 상징이었다. 앞서 언급한 하시야 히로시에 따르면 “유럽에서의 탑은 하늘을 향한 종교적 상징이자 시민 자치의 상징 내지는 권력이나 부를 상징했지만 식민지 통치기관에 우뚝 솟은 탑은 동양적 건축과의 대비로 일본의 국력을 과시하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디자인은 일제가 조선 침략을 위해 1904년 가덕도 외양포에 포대와 진지를 구축하기 오래 전부터 식민 지배를 꿈꾸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외양포에는 아직도 일본군 포대 사령부 비석과 산자락에 은폐된 콘크리트 진지, 탄약고, 지하 벙커 시설들이 남아있어 일제 침략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일제가 1910년 부산세관을 지으면서 영국풍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에 높은 탑을 세운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런데 1936년 준공한 부산부청사에선 탑의 형태가 사라졌다(아래 오른쪽). 이는 1929년에 지은 동양척식주식회사(현 부산근대역사관, 이하 ‘동척’으로 약칭함) 부산지점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제2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이 건물들은 1920~30년대 서양에서 유행하던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의 기계미학을 반영했다. 이 중 동척 건물의 윗부분은 단순한 평지붕과 기하학적 창틀로 처리되었고, 아랫부분은 로마네스크식의 아치 창문이 있다. 디자인사적으로 볼 때 일본이 서구의 모던 건축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온 과도기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산부청사는 동척 건물과 달리 일체의 장식을 허용치 않는다. 마치 한 덩어리의 기계 같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서구의 모던 건축이 지향한 과학적 합리주의의 탈을 쓰고 보다 체계적으로 감행되어 가는 과정을 함축한 것이다.

부산부청사, 1936년. 해방 후 이 건물은 1998년 현 연산동 시청사로 이전하기 전까지 부산시청사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 터에 107층 롯데월드가 세워지고 있다. 사진출처: ‘부산문화, 1992’, 144쪽.


오늘날 부산은 이러한 근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그동안 세관과 부청사처럼 멸실되거나 부산역(1910년)과 부산우체국(1910년)처럼 화재로 소실되어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복병산배수지(1910년), 구 경남상업고등학교 본관(1925년)과 경남도지사관사(1926년, 현 임시수도기념관) 등 극소수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구청은 몇 해 전 ‘일본인 거리’ 조성계획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거센 반발로 계획을 취소한 적이 있다. 일본 관광객 유치를 위해 광복동의 옛 미화당 건물과 부산근대역사관, 부산호텔을 잇는 거리에 일본식 정원과 상점을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진즉 부산의 근대문화유산을 잘 보존 관리했다면 굳이 짝퉁 ‘일본인 거리’가 왜 필요했겠는가. 예컨대 1970년에 옛 부산세관을 부수는 대신에 ‘범아시아 일제수탈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식민 건축물들을 연계하는 도시탐방코스를 만들었다면 훌륭한 문화관광 콘텐츠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사실 부산은 도시 디자인 측면에서 독특하고 다양한 장소들이 많은 도시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얄팍한 상술에 편승한 ‘은폐된 역사문화의 공간화’가 아니라 기억상실증을 치유하는 도시문화로 가꿔나가야 한다. 일례로 동광동 5가 ‘40계단’에는 한국전쟁 중 삶과 애환을 담은 거리와 문화관이 조성되어 있다. 이처럼 동광동 2가 ‘11번지 계단’ 위에 ‘초량왜관 및 식민지도시역사관’을 세워 이 계단과 주변거리의 기억을 증언하고 교훈으로 발전시키는 대안은 어떠한가? 그럴 수 있을 때 부산은 다른 도시가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문화도시로 거듭날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수|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4)부산의 꿈과 현실

 
-浮山아닌, 부산다움으로 富山을 디자인하라-

중앙동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 입구조형물. ⓒ김민수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잣집에 /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한 때 심금을 울린 ‘경상도 아가씨’의 노랫말이다. 한국전쟁 당시 보수산과 복병산 비탈에 판잣집 짓고 부두노동을 하며 40계단을 오르내리던 피란민들의 심정을 담은 가요였다. 최근 부산시 중구청은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 일대 거리를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로 조성했다.

한여름, 이곳에 가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번쩍이는 대형 아치가 눈에 띈다. 바다를 상징하는 물방울 형상으로, 관리하기 쉽게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한 듯하다. 그러나 왠지 번쩍이며 타오르는 횃불을 연상시킨다. 이곳이 1953년 중앙동 일대를 초토화시킨 이른바 ‘부산역 대화재’ 화마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부산시사’에 따르면, 대화재는 부산역 앞 상업중심지역을 전소시켰다. 3000여 동의 가옥이 소실되고, 피해 이재민이 무려 3만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때 부산역뿐만 아니라 부산우체국, 공회당, 부산일보 사옥 등도 불타 버렸다. 이런 거리의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40계단 거리에 세워진 ‘횃불’ 조형물은 마치 대화재를 기념하듯 번쩍이며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40계단 앞에 서면 추억의 서사가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곳곳에 세워진 청동 조각상들이 고단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자극하며 우리를 추억의 시공간으로 인도한다.

이 40계단거리의 입구 조형물은 보수동 헌책방 골목 입구에 세워진 조잡한 ‘문화의 거리’ 조형물에 비하면 양반이다. 사실 시 상징을 비롯해 가로등과 육교 등 대부분의 부산시 공공디자인 역시 조잡한 느낌을 준다. 태생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부산의 도시 경관 탓에 가급적 선이 굵은 단순한 디자인이 요구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영주동 코모도호텔처럼 복잡한 요소들을 철저하고 꼼꼼하게 담아내야 한다. 1979년에 준공된 이 호텔은 호주 출신 건축가 조오지 프류가 조선 왕궁에 기초해 지상 15층 건물로 디자인했다. 물론 일본 오사카성을 연상시킨다는 부정적인 눈총도 있지만 코모도호텔은 전통요소로 이뤄진 뛰어난 완성도가 조잡하다기보다는 독특한 정취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곳은 과거 초량왜관의 길목이었던 장소성으로 인해 해운대 해변에 즐비한 획일적인 현대식 호텔들보다 훨씬 더 ‘부산다움’을 풍긴다.

영주동 코모도호텔(1979). 호주 태생의 건축가 조오지 프류가 조선 왕궁에 기초해 지상 15층 건물로 디자인했다. 외관은 물론 전통 요소로 된 실내 마감의 완성도가 뛰어나다. ⓒ김민수

옛 시청 자리에는 지상 107층의 제2롯데월드가 2013년 개장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이다. 호텔, 백화점, 멀티플렉스 영화관 등의 복합공간이 들어설 이 건물은 부산의 새 명물이 될 예정이다. 그러나 롯데월드가 세워지면 개발 여파로 영도다리 부근의 ‘남포동 건어물 도매시장’의 풍경도 크게 변할 것이다. 주변거리에는 벌써부터 건물 리모델링을 비롯해 재개발 조짐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영도다리는 롯데월드를 건설하며 철거하려다 시민단체의 강력한 반대로 6차로로 확장하고 도개 기능을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었다. 그러나 최근에 다리가 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심의과정을 거쳐 조심스레 추진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원형을 보존과 6차선 확장 및 보강이란 두 마리 토끼잡기가 난제에 부딪친 것이다. 하지만 다리를 보존하기로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1934년에 개통된 이 다리 속에는 한국동란 중 피란살이의 애환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광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롯데월드가 완공되면 부산 경제가 재도약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부산의 한 지인은 부산을 ‘침몰한 아틀란티스’라며 안타까워했다. 산지 지형 탓에 건물 부지가 부족하고, 성장 동력의 부재로 재정이 악화되고, 도시과밀화로 교통난이 심각해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산 경제의 침체는 1980년대초 5공 시절부터 주요 생산기반들이 경남으로 빠져나가면서 시작되었다. 게다가 고유 브랜드와 디자인 없이 주문자생산방식에만 의존하던 신발산업마저 붕괴되자 부산의 경제는 급속히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 위기 상황은 역설적으로 부산의 역동성을 창출하는 새 동력의 촉진제가 되었다. 위기 극복을 위해 부산시는 ‘21세기 동북아시대 해양수도’ 건설이라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앞으로 부산을 동북아 경제활동과 국제물류 중심지이자 세계 일류도시로 도약시킨다는 것이다. 2005년 APEC 정상회담 개최를 기점으로 매력적인 도시이미지 창출을 위한 대규모 도시발전계획을 추진 중이다. 야심찬 ‘2020비전과 전략’에 따르면, 부산은 21세기 동북아시대 해양수도 건설을 목표로 ‘아시아 게이트웨이’ ‘서부산·동부산 개발’ ‘도시재창조’ ‘유비쿼터스 시티’ 등 7대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중 아시아 게이트웨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북항 재개발이다. 계획에 따르면, 부산의 도시기본골격은 광복동과 서면을 잇는 1개의 도심, 5부도심(하단, 사상, 구포, 동래, 해운대), 5지역중심(기장, 정관, 금정, 대저, 가덕, 녹산)이 된다. 여기서 북항 일대는 도심부의 근간으로 도시, 항구, 철도를 일체화해 범아시아의 관문으로 재개발된다. 이는 도심기능을 활성화하고, 여가공간을 창출하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도시재창조 계획과도 맞물려있다. 이참에 지난 부산탐사 1편(본지 2007년 9월14일자)에서 필자가 추적한 부산의 기원지, 곧 자성대 일대 옛 부산포에 대한 재조명 사업도 추진되길 기대해 본다. 그동안 삭막한 항만시설물로 가득 찼던 북항 일대가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처럼 부동산 투기나 부추기고, 민락동 유원지 같은 놀이시설을 옮겨오는 등 졸속 개발의 선봉이 되지 않길 바란다.

제임스 코너의 ‘시민공원조성사업 기본구상안’(2007). 이 구상은 충적지를 뜻하는 얼루비움(Alluvium)을 주제로 낙동강 삼각주의 물결무늬에 기초한 이미지로 디자인되었다. <부산시청 제공>

화려한 유원지 개발보다는 그 고장 고유의 쾌적한 삶을 위한 정직한 실천이 곧 한 도시의 매력을 창조하는 길이다. 예컨대 광복로에 덕수궁 돌담길을 흉내낸 굽이치는 차로와 보도를 만드는 데 돈을 퍼부을 게 아니라 메마른 거리에 부산 풍토에 적합한 나무 그늘을 만드는 일부터 해야 한다. 녹지환경이 태부족한 부산의 거리에는 여름날 ‘태양을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하얄리아 미군부대 이전에 따른 시민공원조성사업은 그나마 도심부 녹지창출에 큰 공헌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에 선정된 미국의 조경전문가 제임스 코너의 기본구상은 부지의 장소성에 대한 해석보다는 피상적으로 낙동강 충적지의 물결무늬를 도상화한 듯하다. 이는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이 16만평짜리 거대한 캔버스에 그린 ‘액션페인팅’을 방불케 한다. 이 땅에는 삶의 공간을 제 손으로 해석하고 창조할 만한 전문가가 없는가? 만일 부산의 꿈이 제대로 실행된다면, 해양수도로서 도시 브랜드를 구축하고 새로운 도약을 할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 한·중·일 삼각지대에서 부산이 해양수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도시 기반의 탁월한

센텀시티의 초고층 주거단지 ‘The #’ 전경. 옛 좌수영성지(현 수영공원)에서 바라본 센텀시티의 모습. ⓒ김민수

기능과 더불어 문화적 차별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우려되는 것은 이 계획들이 외모지상주의에 기초한 획일적 성형수술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센텀시티, 블루시티, 더 파크, 더 #, SK뷰’ 등 부산을 소위 ‘명품도시’로 만들어줄 환상적인 부동산 개발 상품들을 보자. 이 중 해운대구 센텀시티는 부산시가 최첨단 미래 도시개발의 성공사례로 일컫는 곳이다. 하나 건물들이 만들어낸 경관은 서울의 타워 팰리스나 인천 송도신도시와 별 다를 것이 없다. 명품을 지향하며 거대한 초고층 숲을 이루는 이곳은 최근 수영만 매립지에 세워진 이른바 ‘블루시티’와도 유사한 성형미인일 뿐이다. 게다가 2005년 세계 정상회담이 열린 ‘누리마루 APEC 하우스’ 부근의 블루시티는 이름부터 마치 카지노 포커판의 ‘블루칩’(고가 우량주)을 연상시킨다. 혹시 삶과 주거의 문제를 황금빛 부동산 도박판과 동일시한 것은 아닌지. 실제로 이곳엔 금궤를 연상시키는 황금빛 아파트가 졸부 취향을 뽐내며 서있다(사진3). 결과적으로 ‘누리마루 APEC 하우스’는 평당 2000만원대 부산 아파트 시대를 열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수영만 매립지 블루시티의 초고층 아파트 단지 전경. 오른쪽에 금궤 덩어리 같은 황금빛 초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김민수

부동산 개발과 건설 열풍은 오륙도 일대 천혜의 자연경관마저도 훼손시켜 놓았다. 남구 용호동 일대, 즉 한센병 환자 정착촌인 ‘용호농장’을 밀어내고 재개발한 초고층 아파트단지 ‘오륙도 SK뷰’가 그것이다. 급격한 인구 감소와 고령화를 염려하면서 부산시가 계속해서 대규모 아파트 건설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주택 실수요층이 줄고 과잉공급으로 미분양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런 개발주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국 제살 깎아먹기식 획일적 부동산개발에서 손쉽게 부산시의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과연 부산은 욕망의 바다에 떠다니는 부산(浮山)과 스스로를 부정하는 부산(否山)이 될 것인가.앞서 살펴봤듯이 부산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지리적 조건 덕에 형성된 부자 부산(富山)과 가마 부산(釜山)의 맥을 잇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도시로 새로 태어났다. 이러한 타자의 시선으로 형성된 도시공간과 삶은 해방 후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채, 이제 건설과 토건에 이어 겉만 번드르르한 디자인을 앞세운 신개발주의에 직면해 있다. 또한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지워버리는 성형중독 증세가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과거 고유 브랜드와 디자인이 없어 붕괴를 자초했던 신발산업을 교훈 삼아 스스로의 고유자산을 등한시하는 우를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양한 장소들의 시간의 켜와 서사가 존재할 때 도시문화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며 풍요로워지는 법이다. 앞으로 부산의 원대한 꿈이 21세기 동북아 해양수도라고 해서 하는 말이다.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성찰하고 확실히 표명하는 도시디자인이 부산의 꿈과 미래를 좌우하는 관건인 것이다.

〈김민수|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출처: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210000&artid=200709271747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