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삶을 길어올리는 '두레박'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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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1> 동래부의 장려한 낙일(落日)
- 국제신문
- 박창희 대기자
- 2015-04-21 20:08:18
- / 본지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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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1> 동래부의 장려한 낙일(落日)
조선 자존심 지켰던 '동래부 전령서'…日 강경파 초량왜관을 무력 접수하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5-04-21 19:11:03
- / 본지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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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인 500명 거주…조일 외교의 장
- 1854년 힘센 미국에 고개 숙인 日
- 왕정복고 서계 접수 거부 당하자
- 결국 왜관 거주 일본인 집단 난입
- 대원군 측근 인사 정현덕·안동준
- 동래부 난출 규정 철공철시 조치
- 고종 집권 후 1875년 서계 접수
- 사실상 일본 영토로 떨어졌지만
- 항왜정신, 일제 항일정신 이어가
#'격식 아니다' 서계 거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고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동아시아 바다에도 이양선들이 출몰했다.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끈 흑선에 놀라 일본은 항구의 문을 열었다. 사무라이들은 군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1867년 명치유신으로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가 붕괴됐다.
명치 신정부는 조야에서 제기되던 정한론(征韓論) 카드를 만지막거렸다. 한반도 지도를 펴자 동래의 초량왜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런 기막힌 조차지가 있었다니…'. 용두산 일원 10만여 평이 초량왜관 부지였고, 그곳에 400~500명의 왜인들이 상시 거주하며 조일 간 외교와 교역을 해오고 있었다.
세상이 변했는데도 조선은 정세 파악이 늦었다. 명치 신정부는 1868년 말 대마도 사절로 하여금 서계(書契·외교문서)를 통해 왕정복고 사실을 통보하도록 했다. 하지만 왜학훈도(倭學訓導) 안동준은 "서계에 새로운 인장이 찍혀 있고 '황실' '칙(勅)' 같은 조선을 얕보는 내용이 들어 있는 등 격식이 종전과 다르다"며 접수를 거부했다. 안동준 뒤에는 정현덕 동래부사와 대원군(大院君·고종의 아버지)이 버티고 있었다. 명치 신정부는 1869년, 1870년, 1872년 서계 접수를 시도했으나 동래부는 계속 거부했다. 일본 정부 내 강경파인 사다 하쿠보는 1870년 은밀히 조선을 정탐하고 와서 "조선의 군비는 보잘 것 없다. 정예 병력 30개 대대만 동원하면 조선을 정벌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872년 5월 말엔 왜관의 일본인들이 서계 접수를 요구하며 집단으로 동래부에 난입했다. 동래부는 난출(亂出)사건으로 규정해 철공철시(撤供撤市)라는 강력한 제재를 가했다. 철공철시는 왜관에 숯과 땔감, 미곡 등을 지급하지 않고 새벽시장을 폐쇄하는 것으로, 당시 대마도가 가장 두려워하는 조치였다.
급기야 한달 뒤 왜관이 일시 철폐되고 조일 간 국교가 끊겼다. 동래부는 고시문 형태로 왜관 수문 벽에 '동래부 전령서'를 붙였다. 파장은 예상외로 컸다.
#정현덕-안동준의 국권 지키기
구미 열강의 이양선이 출몰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강도를 더해갔다. 조선 8도 도처에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졌다. 동래부사 정현덕과 훈도 안동준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와 함께 '대원군 라인'의 핵심이었다. 정현덕은 동래부사를 7년간 역임하며 왜관을 무대로 발호하는 일본의 준동을 막아낸 인물이다. '부사 반년 감사 일년'이란 말이 그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정현덕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해 동래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데도 힘썼다. 그는 '봉래별곡' '태평원' 등의 작자로 시문에도 능했다. 그의 자취는 동래, 범어사 옛길, 양산 물금 등지에 각종 선정비로 남아 있다.
정현덕·안동준은 대원군 측근으로서 항왜의식이 특히 강했다. 초량왜관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측 기도에 맞서 '서계'의 격식을 철저하게 따졌고, 일본 군함의 해상 무력시위를 목도하면서도 왜관 철공철시를 강행했다. 왜관 수문벽에 붙힌 '동래부 전령서'는 일본의 무례를 당당하게 타이르는 모습 그 자체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고종은 정현덕과 안동준을 대원군파로 지목해 유배 보내거나 죽였다. 망국적 정쟁이 인재를 없앤 꼴이다.
#초량왜관, 기억의 저편으로
1872년 1월, 일본 외무성은 외무대승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부산에 특파했다. 하나부사 일행은 서계 접수가 뜻대로 되지 않자, 몰고 온 철제기선 만주환(滿珠丸)에서 기적 시위를 감행했다. 그해 9월에는 보란듯 2개 소대가 승선한 군함 춘일함(春日艦)과 유공함(有功艦)을 끌고 부산항에 들어와 쾅쾅~ 대포를 쏴 댔다. 가공할 위력 시위였다.
하나부사에 이어 1873년에 온 히로쓰 시로노부는 초량왜관을 명실공히 접수해 일본 외무성 소속으로 만들었다. 그후 왜관은 대일본공관으로, 관수(館守)는 관사(館司)로 바뀌었다. 왜관을 거쳐간 관수는 모두 105명. 관수는 왜관의 우두머리로서 미우나 고우나 조선땅에서 경계의 역사를 쓴 사람들이다. 한일교류사에 있어 대마도는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존재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로 노략질을 했고, 임진왜란 때는 조선침략의 길잡이가 됐다. 그리곤 애걸복걸해 다시 왜관을 열었고 구한말에는 원치 않게 조선 침략의 교두보를 여는 악역을 담당한다. 무서운 역사 데자뷰다.
#성신교린이 헌신짝처럼
초량왜관이 접수되고 대원군이 실각하자 조선측은 1875년 11월 결국 일본 서계를 접수한다. 서계 접수는 조정의 뜻에 따라 동래부가 손을 들었음을 의미한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항이 개항되고, 이듬해 부산구조계조약이 체결되어 초량왜관은 일본인 거류지(전관거류지)로 바뀐다. 조계조약은 매년 일본 돈 50엔을 조선정부에 납부하고 임대하는 조건을 담았지만, 그 대신 경찰권 징세권 행정권을 내주도록 명시했다. 초량왜관 부지 10만여 평이 사실상 일본 영토로 떨어졌다. 1896년 동래부가 동래군으로, 1910년 부산부로 개칭됐지만, 조선의 동래부는 초량왜관과 함께 사실상 종막을 고한 것이다. 동래부사는 1546년 초대 부사 이윤암이 부임한 이래, 349년 동안 모두 255명, 마지막 부사는 정인학(1894. 12~1895. 5)이었다. 막바지까지 서계와 '동래부 전령서'를 내세워 자존심을 꺾지 않았으니 '장려한 낙일(落日)'이었다.
따져보면, 항왜·항일은 동래정신의 중요한 기반을 형성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길을 내달라'는 왜군에 맞서 동래부사 송상현이 '차라리 목숨을 내놓겠다'며 싸우다 전사한 이래 정현덕이 그 정신을 잇고 있음이다. 안희제 박재혁 박차정 한형석 등 부산지역에 일제 강점기 항일투사가 많았던 것도 이런 정신이 이어진 결과일 것이다.
초량왜관이 전관거류지로 바뀐 후 '동래부 전령서' 방이 붙었던 수문 자리엔 일본 제일국립은행이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 논문에는 '수문이 본정 1정목 제일은행 사환숙소 자리'라고 일러준다. 동광동은 초량왜관 동관(東館)이 있던 곳. 부산관광호텔은 지금도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다. 이곳이 일본인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우리가 잊고 있던 초량왜관의 역사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인가.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 빈약한 韓 역사자료, 치밀한 日과 대조적
■ 기록문화로 본 한국과 일본
'동래부 전령서'는 지금까지 거의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다. 초량왜관의 막바지 역사 드라마 한편을 보는 느낌이랄까.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당시 조선 관리들의 입장이 이보다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기록은 엄정해야 하는 법. 이 점에서 우리는 일본에 한 수 뒤지는 것 같다.
구한말 초량왜관에 관한 우리측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증정교린지' '서계' 등이 고작이다. 그것도 구체적 현장기록이 아닌 단순 보고서 형태가 대부분이다. 반면 일본측은 '대마도 종가문서'를 비롯 '조선탐사'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 등 질·양에서 우리보다 앞선다.
3만 점 가까이 되는 '대마도 종가문서' 안에는 외교문서인 서계(書契)가 9000통 이상 들어 있다. 종가문서 속의 '분류기사대강'은 조일 간 모든 현안을 검색할 수 있게끔 주제별로 엮은 책이다. 1937년 간행된 '부산부사원고'는 방대한 문헌을 토대로 부산 역사를 고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정리한 자료다. 분량이 6권 6000여 쪽에 이른다. 해석·해독이 쉽지 않아 누구도 손을 대지 못했는데, 올초 최차호 초량왜관연구회 회장이 '초량왜관'(어드북스)에 일부를 번역했다.
가끔 일본측 자료의 세심함과 꼼꼼함에 혀가 내둘러질 때도 있다. 1716년(숙종 42) 대마도주가 왜관을 통해 기록했다는 '조선탐사'의 한 대목을 보자. '…동래에서 서울까지 990리의 연락은 평상시엔 13일 걸리고, 급할 때는 5일, 파발은 2일반 걸린다….'
초량왜관에서 조일 간 외교 담판이 벌어질 때 중앙과의 연락에 걸리는 시일이 나오고, 멸종위기종을 잡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다. 염탐을 넘어 가히 첩보 수준이다. 이에 반해 조선은 통신사가 일본으로 파견되었을 때 그곳의 풍물을 살피는 정도였고 조일 간 새로운 외교 교섭이 시작될 때조차 일본 사정을 거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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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2> 우물 인문학
인간사 고스란히 담은 이야기샘…인문학적 상상력 채운 두레박을 띄우자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5-05-05 18:47:09
- / 본지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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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서상균 기자 |
먹을 물을 긷고 빨래를 하며 몸도 씻던 일상적인 장소이면서
건국신화 모태이자 제의 치렀던 성스러운 의미도 담긴 공간
다시 살아난 냉정에서 도시 공동체 회복의 희망도 엿보았다
#냉정 재발견
냉정(冷井)을 알고 난 후 우물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동네 우물 하나가 도시 공동체 회복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것, 인문학적 상상력이 그 생각을 깊게 만든다는 것. 꿈이라면 길몽이다.
찬물이 나온다는 냉정은 부산 사상구 주례2동 주민센터 인근에 있다. 도시철도 2호선 3번 출구로 나가면 언덕빼기 어디선가 '찰찰~' 샘물소리가 들려온다.
비록 바로 먹지는 못하지만 도시의 지친 영혼을 씻어주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일찍이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조선 13도의 우물 중 천하일품'이라 말했거니와, 지금도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흐른다는 게 신기하다. 도시개발로 사라졌던 냉정이 지난 2000년 되살아났을 때 주민들은 '용왕님이 보살핀 덕'이라 여겼다. 냉정보존회 윤준섭(80) 회장은 "당산 소나무가 450년 됐다 하고 우물 나이는 그 곱절이라 안 카나"라며 오는 24일 밤 11시쯤 열리는 냉정의 당산·용왕제에 놀러오라고 당부한다.
냉정은 운이 좋은 우물이다. 아무리 살리려 해도 안 되는 게 있고,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구멍과 틈새로 당대를 숭숭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퍼마셔왔던 이 땅의 수많은 우물들이 그렇다. 시인 송유미는 '냉정'을 다룬 스토리텔링 글에서 '오, 천년우물…. 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마음을 씻어본 적이 없는 이여,/ …흐르는 물에 차마 흘려보내지 못할/ 때 묻은 영혼이라도 씻어보자'고 쓴 적 있다. '때 묻은 영혼'이란 말이 폐부를 찌른다.
#제의의 공간
지난 2000년 여름,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를 발굴하던 조사단 눈앞에 이상한 유골이 보였다. 개 고양이 소 말 사슴 멧돼지 토끼 쥐 오리 까마귀 호랑지빠귀 새매 상어 도미 농어 광어 복어 등 온갖 것들의 뼈가 나왔다. 그 옆엔 항아리 병 토기 금속그릇 나무빗 뒤꽂이 나무두레박이 뒹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깊이 10m가 넘는 우물 바닥에 거꾸로 쳐박힌 어린아이의 유골이었다. 조사단은 긴장했다. 어린아이가 실수로 빠져? 죽어서 폐기? 아니면 인신공양?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어느 날, 왕실 차원의 우물 제사가 벌어진다. 제관들은 토기들을 가지런히 쌓은 다음 제물로 고양이 소 말 개 등을 차례로 빠뜨렸다. 분위기가 절정에 달할 즈음 10살쯤 된 어린아이가 산채로 우물에 던져진다. 인신공양이다. 왕이 엎드려 빌었다. "역병을 물리쳐 주시고, 왕실과 백성들이 편히 살게 해 주옵소서. 부디 깨끗한 물을 내려 주시옵소서…." 기원이 간절한 만큼 지상의 생명체를 최대한 많이 넣어야 했다. 우물에 상석이 덮히고 흙이 채워졌다.
학자들은 이 우물을 제의 유적으로 보고 '우물 고고학'이란 새로운 영역을 찾아냈다. 유물 보존이 용이한 우물이 역사 창고가 될 수 있음이다. 아이를 넣었다는 대목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아이 공양과 비슷한데, 그 진실은 우물 고고학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우물과 마을
신라의 건국신화는 우물에서 발원한다. 시조 박혁거세는 경주의 나정(蘿井) 옆 금궤 안에서 발견됐다. 그의 부인 알영은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신화가 우물에서 춤을 춘다.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을 때 식수 확보가 용이한가부터 살폈다. 마을 형성의 1차 조건이 물이었다. 마을 '동(洞)'자는 물(水)을 같이(同) 쓰는 지역공동체란 의미다. 우물이 마르면 동네를 옮겼다. 실록에 보면 1415년 조선 태종은 도성에 가뭄이 들자 도성 안 5가구마다 공동 우물 하나씩을 파도록 했고, 1421년 경상도 관찰사는 "기장현에 우물물이 없어 현청 관아를 박곡리로 옮기고자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동래읍지'는 동래읍성 안에 6개의 우물(문헌에 따라선 최대 10개)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래구 복천동(福泉洞)은 복 받은 우물이 있었다는 동네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옥미정동(玉未井洞) 대정동(大井洞) 야정동(野井洞) 등으로 불렀다. 모두 '井'자를 품었다. 큰샘, 옥샘, 골샘 등으로 이름 값하던 동래읍성의 옛 우물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다. 역사 멸실이다.
#샘솟는 추억들
우물 치는 날은 괜시리 마음이 들떴다. 보통 모내기가 끝날 무렵인 칠월칠석이면 우물 청소를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풍물을 치며 놀았다. 한 달에 한 두번이라도 공동우물을 이용하는 집 여자들은 모두 나와 청소를 했다.
남정네들은 흰옷을 입고 고르박질을 했다. 고르박은 네모진 커다란 물통으로, 네 모서리에 줄을 달아 두 사람이 맞잡고 물을 퍼냈다. 물을 다 퍼내면 우물 속에 사다리를 놓고 들어가 싸리비로 이끼를 긁어내거나 잡물을 건져냈다. 어떤 동네는 부정이 타지 않게 어린아이를 먼저 들여 보내기도 했다. 우물 친 날은 동네 골목이 환했고 왠지 기분이 개운했다.
여름엔 우물이 천연 냉장고였다. 두레박 대신 그물자루에 수박이나 토마토, 물김치, 음료수 등을 넣어 우물 속에 담궈 두었다가 꺼내 먹었다. 우물물을 길러 찬밥 한덩어리를 넣고 풋고추·된장과 함께 먹던 점심은 얼마나 시원했던지…. 우물가에서 아버지는 등목을 했고, 어머니는 몸을 숨기며 목욕을 했다.
아침이면 텅빈 우물 속에 서늘한 안개가 차 올랐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두레박 줄이 바르르 떨리며 샘물이 올라왔다. 뒤란에서 장작을 패던 아버지가 땀을 훔치며 우물물 한 바가지를 들이키면,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상을 차렸다. 굴뚝 연기는 맑았고, 마굿간에선 소가 목을 빼고 길게 울었다.
상수도가 놓이면서 우물가는 썰렁해졌다. 우물에 모이던 아낙네도, 떠돌던 가담항설도, 빨래터도 사라져간다. 나이든 것, 오래된 것들이 속절없이 밀려난다. 앵두나무 우물가, 바람난 동네 처녀 이쁜이와 금순이는 물동이 호미자루 다 내던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우물 두레박의 꿈
지역방송의 '골목' 프로그램에 참여해 약 3년간 이곳 저곳 골목을 누볐던 사진가 김홍희는 동구 범일동에서 마주한 우물을 떠올리며 아직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곳은 우물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올망졸망 집들이 붙어 있었죠. 우물을 만났으니 속을 들여다보는 건 프로 진행상 당연한 일. '이런!' 어두운 우물 안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물체가 눈에 들어왔죠. 맑은 우물 속에 어른 팔뚝만 한 은빛 잉어들이 놀고 있었지 뭡니까. 생명의 환희랄까요. 한동안 감전된 듯 아무 멘트도 할 수 없었어요."
지하수 이론에 따르면 우물이나 샘 같은 지하수는 보이지 않지만 지층의 수맥을 통해 대부분이 서로 통한다고 한다. 지하수는 땅 밑에 바로 있기도 하고 수백 미터 깊이에 있기도 하다. 거대한 지하 순환계를 생각하면 우물의 상상력은 지구적이다.
크게 말하면 우물은 하늘과 땅, 문명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다. 식수, 탄생과 성장, 만남, 제의, 공동체, 소멸과 파괴, 재생, 꿈, 순환 등 인간사 세상사가 우물에 이야기의 빨대를 꽂고 있다. 이것을 '우물 인문학'이라 이름할 수 있다면 우물에서 건질 것이 의외로 많다.
되살아난 냉정이 도시재생의 희망으로, 고려 왕건과 장화왕후의 로맨스가 싹튼 전남 나주의 완사천(浣紗泉)이 관광상품으로 뜬 것은 우물을 콘텐츠로 여긴 결과다. '은빛 잉어가 노니는 우물'에도 이야기 두레박을 드리울 수 있을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잉어)'가 되든, '우물 밖 낚시'가 되든 상관없다.
이제 아버지의 우물은 사라졌고 수도꼭지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우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광장과 시장, 카페, SNS 같은 21세기의 공동우물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공동우물을 찾으려면 인문학적 상상력을 갖춘 두레박이 필요하다. 급고수경(汲古修綆), 옛 것을 길어 올리려면 두레박 줄부터 점검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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