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람암과 경봉선사
극람암과 경봉선사
통도사 극락암
극락암에 모셔져있는 경봉스님 영정앞에 열반 30주기, 탄생 120주년을 추모하고 있다.
경봉(1892∼1982) 스님은 근세에 가장 존경받는 선승 가운데 한 분이셨다. 스님은 시·서·화 삼절에, 선과 차까지 두루 갖춰 오절(五絶)로 불렸다. 1982년 7월 17일 시자가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라고 여쭈니 스님은 웃으시며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세수 91세, 법랍 75세로 열반에 들었다.
경봉스님의 영정
경봉 스님은 1892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1907년 양산 통도사에서 성해 스님을 은사로 15살에 출가했다.
경봉 스님은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에 취임했으며,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지금의 선학원) 이사장을 거쳐 1949년 다시 통도사 주지에 재임되었고, 1953년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에 추대되어 입적하는 날까지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다.
경봉스님의 일기
경봉 스님은 18살 때부터 85살까지 67년동안 매일 일기를 썼으며, 일기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의 근현대사가 그대로 담겨있고, 사찰에서 화장실을 지칭하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내력은 다음과 같다.
"휴급소에 가서 다급한 마음 쉬어가고, 해우소에서 근심걱정 버리고 가면 그것이 바로 도를 닦는 거지."
경봉스님이 50여년 거처했던 삼소굴
올해는 바로 스님 열반 30주기,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경봉 선사 열반 30주기 특별전-삼소굴(三笑窟)'을 열었다. 열다섯 살에 출가한 스님은 1935년과 1949년 두 차례 통도사 주지를 지낸 바 있다. 극락암 '삼소굴'은 경봉 스님이 50여 년간 거처한 방문 앞에 내건 현판 이름이다. 현판 方丈은 경봉스님 글씨이다.
근대 영남 문인화의 대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의 글씨 삼소굴(三笑窟) 현판
성품이 청정하고 꼿꼿하기가 댓가지 같은 출가자의 올곧은 모습을 보였던 경봉 스님은 자신이 거처하는 방문 앞에 ‘삼소굴(三笑窟)’이라는 현판을 붙여놓았다.
경봉 스님은 삼소굴에 대해 “삼소의 ‘삼’은 우주의 극수인 3이요, ‘소’란 염주를 목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찾다가 결국 목에 걸린 것을 발견하고는 허허 웃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삼소굴은 경봉 스님이 50여 년을 머물면서 ‘선과 차는 하나’라는 선다일미(禪茶一味)의 가르침을 설파했던 곳으로 이름 높은 곳이며, 지난 2004년 보수공사 과정에서 1백43년 전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삼소굴의 본래 이름은 `영봉헌`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향성(香聲)(21.1×37.3cm)
경봉스님 선시
身在海中休覓水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니 물을 찾지 말고
日行嶺上莫尋山 매일 고개위를 가면서 산을 찾지 말지어라
鶯吟燕語皆相似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 서로 비슷하니
莫問前三與後三 지나간 삼일과 돌아올 삼일을 묻지 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