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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상인 vs 개성상인] 조선조 최고 무역왕 '임상옥'

 

[의주상인 vs 개성상인] 조선조 최고 무역왕 '임상옥'

 

2022.10.26. 10:3056 읽음

조선시대 최고 거상을 모른다고…

‘임상옥을 아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예’라고 선뜻 응답할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조금 더 친절을 베풀어 ‘조선시대 최고의 거상 임상옥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도 결과는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가령 임상옥보다 훨씬 선대의 사람인 ‘해상왕 장보고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꽤 많을 것도 같은데 이 임상옥에 대해서는 아마도 거의 모두가 고개를 갸웃둥하는 반응을 보일 것 같다.  

2020년 판


지난 2000년 연말 한 출판사에서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商道)’를 펴내면서 일간지에 실은 그럴싸한 광고문안은 신문을 찬찬히 살펴보는 독자들의 눈길을 한 번쯤은 끌어당겼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본받아야 할 진짜 장사꾼이 있었습니다’라는 도발적인 문구로 시작하는 이 책 광고에는 국내 재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임상옥에 대한 한결같은 찬사가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래서 광고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이 누군가’라는 의문이 들게 되는 것이다.

경제 어려울때의 역사적 스승?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시절에 ‘돈 버는 소설’이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잠시나마 호기심을 갖게 마련 아닌가. 더구나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라도 하듯 그 당시 2000년 새해 들어 굴지의 한 방송사에서는 ‘거상 임상옥’을 창사 특집드라마로 방영할 예정이라는 자사 프로그램 광고를 요란하게 하기 시작했는데(2001.10.15. ~ 2002.04.02. 50부작으로 MBC에서 드라마 상도 방영됨)

드라마 상도에서 임상옥(林尙沃, 18세∼77세) 역을 맡았던 배우 이재룡. (갈무리=상도 공식홈페이지)


1999년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허준’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어 모으기로 작정한 듯 사뭇 ‘선동적’인 광고 기법때문인지 임상옥이라는 인물에 대한 인지도는 하루아침에 높아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임상옥이라는 2백년전 인물은 경제가 어려워져 아우성인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명실상부한 ‘역사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할 상당한 ‘매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인들은 사람에게 인색하고 인재를 키우지 않는다는 자조적인 얘기가 많이 들려오고 있는 요즘이다. 정치가 저 모양인 것도 사람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고 재계나 학계 문화 예술계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사람을 존중하고 인재를 대접해 주지 않는 풍토가 만연되어 있기에 한국사회는 발전하기 어렵고 희망을 붙이기 어려운 사회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시기에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는 사상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거상 임상옥의 일생을 최인호씨의 소설 ‘商道’를 통해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인 것 같다.

부친이 빚진 상점 점원으로 고용

1779년 정조 3년, 임상옥은 4대째 평안도 의주에서 만상을 하던 전통적인 장사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중국을 상대로 무역을 하는 상인을 일컬어 만상(灣商)이라 했는데 일개 보따리 장수에 불과했던 임상옥의 부친 임봉핵은 해마다 청나라로 들어가는 동지사 행렬을 따라 연경(북경)으로 가서 인삼을 팔고 그에 합당하는 비단을 사서 돌아와 되파는 영세상인이었다. 

임상옥 캐리컬처


임봉핵은 과거를 네 번이나 보았지만 번번이 낙과했다. 누구보다 만주어에 능통하다고 자부한 그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후일 자신의 선조가 비천한 계급출신이어서 등용이 안 되었다는 것을 알고 몹시 실망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술에 취해 압록강에 빠져 죽었다. 임상옥이 스무살 때였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비관해 죽었다고 수근거렸다. 

임봉핵은 엄청난 부채를 남겼고 임상옥은 부친이 빚을 진 상점의 점원으로 들어가 그 빚을 탕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의주상인들은 사람을 고용해도 품삯을 주지 않았다. 먹여만 줄 뿐 5년이고 10년이고 데리고 있다가 싹수가 보이지 않으면 내쫓아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자본을 대주어 독립을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다행히 임상옥은 주인인 홍득주의 눈에 들었다. 그의 부친이 시킨 가정교육의 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상도 스틸컷.



단골손님 경조사 잊지 않아

어릴 때부터 아버지 곁에서 수없이 인삼을 봐 온 덕에 인삼에 대한 안목을 남달리 키울 수 있었고, 이 안목은 훗날 그가 인삼무역왕으로 대성하는 받침돌이 되어주었다.    
임상옥은 부지런했으며 무엇보다도 인사성이 밝았다. 머리가 좋은 그는 한 번 본 사람의 인상을 절대 잊지 않았다. 생전에 부친 임봉핵은 늘 “장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이다. 인사야말로 최고의 예(禮)이다. 신임을 얻는 것이 장사의 첫 번째 비결이다.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인사로서 예를 갖추어야 한다”라는 말을 하고 또 했다. 

임상옥은 집물관리가 정밀하여 항상 치부책(置簿冊)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치부책은 오늘날의 금전출납부와 같은 성격의 장부이다. 그는 또 녹심첩(錄心帖)도 잘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는 자신의 상점을 드나드는 단골손님들의 명부로 단골들의 가계가 족보처럼 적혀있고 외가 처가의 가계까지 적혀있었는데 임상옥은 이들의 경조사를 절대 잊는 법이 없었다.
이런 고객들의 명단관리 기법은 비단 임상옥 뿐아니라 당시 의주 상인들의 상거래에 있어서 제 1조인 신용거래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꼽혔다고 한다.

드라마 상도 스틸컷.



“하늘 아래 天下第一商 되라” 유언

기록에 의하면 임상옥의 집물관리는 너무나 정연해 무슨 물건이든 쓰고 나면 반드시 제자리에 도로 갖다 두었으며 그의 집에서는 비 한자루 신발 한 켤레까지도 항상 일정한 자리에 두고 쓰는 버릇을 길러서 그것 어디 갔느냐고 찾는 일이나 허둥대는 일이 없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그의 치밀한 성격의 일면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임상옥의 부친 임봉핵은 죽기 얼마전 아들에게 유언처럼 자신의 비원(悲願)을 토해냈다. “이 아비처럼 살다가 죽어서는 안된다. 너는 반드시 하늘아래 제일의 상인이 되어야 한다”

이 ‘하늘아래’라는 말은 중국의 제일 관문인 산해관의 문루 현판에 써있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에서 나온 것으로 중국을 드나드는 의주상인들은 이 현판을 보면서 ‘웅지’를 다짐하곤 했다.

임상옥이 대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는 여러 요인을 꼽을 수 있겠지만 이처럼 한맺힌 아버지의 ‘비원’이, 어린 임상옥의 뇌리에 각인되어 그를 분발토록하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인의 특명으로 홍삼 다섯포를 가지고 정식으로 인삼 장삿길에 나선 임상옥은 타고난 장사 수완으로 머나먼 연경땅에서 거금 1천5백냥을 단숨에 벌어들인다. 
주인은 그 가운데 3백냥을 상옥에게 주기로 약속했는데 이 액수는 독립된 점포를 차리고도 남는 거액이었다. 

드라마 상도 스틸컷.



色酒家로서 만난 처녀 몸값 5백냥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더 큰 운명을 준비하는 하늘이 내리신 시련인지 임상옥은 뜻하지 않은 ‘여난’을 겪게 되고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옛말도 있듯이 그 위기가 천우신조의 기회가 되어 임상옥은 거상으로서 일어서게 되는 일생일대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식 상인으로서는 초행길이나 마찬가지인 연경에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 귀국하려는 하루 전날 임상옥은 장삿길에서 만나 평생 교우를 쌓게 되는 이희저(李禧著, 훗날 홍경래의 난에 가담, 참수형을 당함)의 강권으로 색주가에 들렀다가 뜻밖에도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름다운’ 장미령이라는 15세 소녀를 만난다. 이 소녀는 술주정꾼 아비가 색주가에 70냥을 받고 팔아넘겨 마침 그 날 임상옥을 첫 손님으로 받게 된 것이다.

(일러스트=이톡뉴스)


15세때 행자생활을 1년 하면서 인간이 지향해야할 길에 대해 공부를 단단히 한 임상옥으로는 ‘여인의 몸을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은 더러운 일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그는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돈 가운데 5백냥을 털어 이 소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준다. 

장미령이 고관부인되어 보은

결국 이 일로 인해 임상옥은 주인으로부터 쫓겨나게 되고 한때 의주상계에서는 발을 못 붙이는 ‘파문’을 당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 소녀가 당시 중국 최고위 관리인 광록대부의 부인이 되어 은혜를 갚음으로써 재기에 성공, 조선 최고의 무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상옥에게 장미령은 인생의 큰 은인이었으며 장미령에게도 임상옥이 역시 인생 최대의 은인이었다. 

드라마 상도에서 장미령(張美齡) 스틸컷.


임상옥이 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돈을 벌었으나 돈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명예를 얻었으나 그를 누리지 않았고 풍류를 즐겼으나 쾌락에 탐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 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며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인 것이다” 

장사는 곧 사람…林 商道의 제1조  

상즉인(商卽人), 장사는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장사라는 상도에 있어서의 제 1조는 임상옥이 평생을 지켜나간 금과옥조였다. 당시 의주 상인들 역시 삼계라 하여 친절 신용 의리를 상도의 계율로 굳게 지키고 있었다.

당시 상권의 쌍벽을 이루고 있던 의주와 개성 상인들은 그들의 옷차림새만큼이나 차이가 분명했다. 만상으로 불리던 의주상인들은 행색이 거칠고 난폭했다면, 송상으로 통하던 개성상인들은 행색이 세련되고 깔끔했다.

의주상인들은 신용을 장사의 제1조로 삼은 반면, 개성상인들은 흥정을 장사의 제1조로 삼았다. 의주상인들이 의리를 생명으로 여기는 신용의 이상주의였다면 개성상인들은 장사란 일단 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흥정을 생명으로 여기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의주상인들이 상도(商道)를 중하게 여겼다면 개성상인들은 상술(商術)을 중시했다. 게다가 개성 상인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는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어찌보면 개성상인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현대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에 더 근접한 ‘개명한’ 의식의 소유자들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우리나라의 풍경 사진 130장을 수록한 ‘반도의 근영’이란 도록을 발간했다. 사진은 신의주 압록강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때 佛家에 귀의, 승려생활

자신의 행위에 대해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아 의주상계에서 쫓겨난 임상옥은 한때 불가에 정식으로 귀의해 도원이라는 법명까지 얻고 승려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이때 그를 환속시킨 사람이 바로 평생지기가 된 개성상인 박종일이다. 박종일은 평생을 통해 상옥에게 ‘상술의 비법’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했다. 임상옥과 박종일의 만남은 절묘한 조화였다.  

임상옥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스승은 추월암의 석숭 스님이었다. 석숭은 임상옥을 세상에 내보내면서 세 가지 예언과 함께 그의 위기를 일러주었는데 이 가르침들이 임상옥을 결정적인 위기 때마다 구출했다. 특히 석숭이 준 작은 술잔 하나가 임상옥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계영배(戒盈杯). (사진=연합뉴스)


“이 잔을 잘 갖고 있도록 하여라. 이 잔이 너의 마지막 위기를 잘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잔이 너를 전무후무한 거부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잔에는 계영기원 여이동사 (戒盈祈願 與爾同死): 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너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계영배로 불리기도 한 이 잔이야말로 임상옥에게 인생의 눈을 틔워준 반면교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가득 채우면 술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7할쯤 채워야 온전히 마실 수 있는 계영배의 숨은 뜻에서 무한한 야망을 경계하며 스스로 자족하는 지혜야말로 최고의 상도임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세도가 박준원 문상길이 富의 길

1807년 당대의 세도가 박준원이 타계하자 현실주의적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는 박종일은 임상옥을 설득해 함께 한양으로 문상길에 올랐다. 이 길이 바로 임상옥에게 당대 최고의 부를 거머쥘 수 있게 한 성공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종일은 개성상인답게 장사에는 권세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작은 장사에는 작은 권력, 큰 장사에는 큰 권력이 필요하다’는 지론으로 임상옥에게 ‘정경유착의 길’을 가도록 권유한다.    

1958년 정부 시정업적 전시에서 홍삼 주요 소비지 및 인삼 경작 분포상황표. (사진=국가기록원)


당시 백삼이 아닌 홍삼이 무역의 주류를 이루면서 매년 무역고는 백만냥이상 올라가기 시작했고 나라에선 이 방대한 세원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아래 인삼교역권 제도를 신설하게 된다. 이 교역권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당대 제일의 무역왕으로 명성을 자랑하던 임상옥의 존재는 하루아침에 전락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마침 교역권을 좌지우지하는 당대 최고 세도가가 세상을 뜨게 되고 당시 내로라하는 장사꾼들은 저마다 한양으로 몰려들어 세도가의 아들인 박종경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꾀를 모으고 있었다. 

부의금으로 낸 백지어음 

박종일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면서 ‘꿀은 달면 달수록 좋다’는 얘기를 임상옥에게 들려준다. 그 꿀은 물론 박종경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의금 성격의 뇌물의 액수를 일컫는다. 임상옥이 세 번이나 고쳐쓴 부의금 액수에도 박종일은 번번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임상옥은 마지막 액수는 박종일에게 보이지 않고 상가에 간다. 임상옥이 부의금을 내밀자 방명록을 작성하던 서기들은 깜짝 놀란 눈으로 임상옥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백지어음!!
아마도 우리나라 상인중 백지어음을 발행한 최초의 상인일 것이라는 게 작가의 주장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히트 작전으로 임상옥은 세도가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당연히 세도가 박종경은 임상옥을 대령시키라 명했고, 이 자리에서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평생 지기가 될 것을 마치 도원결의하듯 다짐한다. 그렇다고 임상옥이 오로지 세도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런 잔꾀를 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임상옥은 일만냥까지 적은 액수를 친구 박종일에게 보였다가 퇴짜를 맞자 밤새 고민을 한다. 임상옥의 주장은 천냥을 쓰면 천냥만큼의 대가를 받겠고 만냥을 쓰면 만냥의 대가가 오겠지만 자신은 그런 상거래차원이 아닌 자신의 진심을 주고 싶다는 순진하고 우직한 발상으로 백지어음을 내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박종경이 ‘자네가 백지어음위에 쓰고 싶은 것을 써보시게’하자 임상옥은 적심(赤心)이라고 적는다. 조금도 거짓이 없는 참되고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리키는 말로 단심이라고도 한다. 그러자 박종경은 인물을 알아보고 임상옥에게 그 자신도 마음을 주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해서 임상옥은 그 막대한 인삼교역권을 얻어낼 수 있었고, 한때 자신을 내쫓았다가 후일 자신을 사위로 맞은 홍득주에게도 이 교역권을 따게 해준다. 그러니까 처가 일족도 사위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1809년 무렵 임상옥이 나라에 세금으로 바친 돈만해도 4만냥이 넘었다고 한다. 1822년 무렵에는 국고 비축 재산중 은자(銀子)는 총액이 44만냥이었는데 임상옥의 무역거래량은 총 1백만냥이 넘었으니 조정의 재정은 임상옥이 잡아 흔든 셈이다. 

(1962-09-26) 박정희 의장이 강화도 인삼 재배 현장을 시찰중이다. (사진=국가기록원)



“생명같은 인삼을 불태워라”

임상옥이 당시 동양의 종주국임을 자부하던 중국에서 조선 상인의 매운맛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의 부를 한 차원 업그레이드시킨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인삼 한 근의 가격은 25냥으로 근 2백년 가까이 가격 변동없이 요지부동의 가격을 고수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중국상인들의 경영철학인 박리다매가 기저를 이루고 있는데다가 종주국으로서의 텃세도 단단히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사농공상의 우리 개념과는 달리 사상농공으로 ‘부’를 이루게 해주는 견인차인 상업을 중시여기고 있었다.

요즘말로 하자면 중국인들은 그야말로 ‘타고난 자본주의자’(born capitalist)들이어서 상업에 있어서의 자신들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 중국 상인들에게 임상옥이 내건 한 근당 40냥이라는 가격은 그야말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경악을 넘어서 분노를 폭발시킨 중국 상인들은 특유의 단결력으로 불매동맹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배포 크기로 유명한 임상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아예 내킨 김에 닷 냥을 더 올려 45냥을 매겨 버린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다 보니 애가 타는 것은 아랫사람들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장자방 박종일도 우리는 모두 죽게 되었다고 장탄식만 하고 앉아 있었겠는가! 

秋史로부터 必死則生 휘호받아

이때 임상옥은 손아래 벗이자 그가 가장 존경하는 학자 추사 김정희로부터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휘호를 받아들고 용기 백배했고 자신이 환속할 때 계율문자로 죽을 사자를 내리신 석숭스님의 큰 뜻에서 자신의 갈길을 정하고  용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1977-04-28) 박정희 대통령이 추사 김정희 고택을 시찰중이다. (사진=국가기록원)


마침내 귀국일이 코앞에 닥치자 임상옥은 하인들을 시켜 장작불을 피우게 하고 이판사판의 처절한 심정으로 자신의 생명같은 인삼을 불지르라고 명한다. 물론 결코 쇼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는 저 불타는 인삼과 함께 자신의 생애도 마친다는 비장한 결의를 단단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중국인들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백배 사죄하고 불태워진 인삼가격까지 셈해서 한 근에 90냥이라는 전대미문의 가격으로 그들에게 있어서도 목숨같은 인삼을 사들이고 만다. 한판 승부로 끝낸 깨끗한 KO승! 이로써 인삼왕 임상옥의 명성은 연경은 물론이고 조선 팔도에 좌악 퍼지게 된 것이다.

취직 부탁온 청년이 洪景來

사람의 인연은 인연이 가연을 낳기도 하고 악연을 만들기도 하는 것인가!
평생 교우인 이희저로부터 임상옥은 사람을 써달라는 천거를 받게 된다. 당시 조정의 정치는 지금만큼이나 시끄러웠는지 평소 차별받고 있다고 여기던 서북지방에서는 ‘이(李)씨 나무 쓰러지고 수(水)씨 강이 흘러든다’라는 역성혁명의 불온한 기운을 담은 노래가 히트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 임상옥에게 취직을 부탁해온 사람이 바로 친구 이희저의 추천장을 들고 온 홍씨 성을 가진 청년이었다. 바로 조선 조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조선 민중에게 반역의 기운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시대의 혁명아 홍경래였다. 

1812년(순조 12) 홍경래(洪景來) 난의 전말을 한글로 기록한 일기인 '임신평란록(壬申平亂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람 보는 눈이 밝은 임상옥은 홍경래를 보자마자 “이 사람은 조가(朝家)에나 있을 사람이지 상가(商家)에는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직감한다. 

당시 장사꾼끼리는 원래 돈을 빌리고 꿔주는 일은 있어도 사람을 추천하거나 보증해 주는 일은 금기시 되고 있었다. 사람에 관련해서는 철저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간청을 물리치기 어려워 홍경래를 자신의 집 서기로 쓰게 된 임상옥은 일을 야무지게 잘하고 문장에도 밝은 홍경래를 마음 속으로는 끝까지 신임하지 않고 있었다. 역시 직관과 통찰력이 뛰어난 것도 하나의 재주인가보다.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임상옥을 혁명군에 포섭할 목적으로 접근했던 홍경래는 결국 한을 품고 돌아섰고, 결과적으로 혁명군은 참패를 당해 지도부 전원이 참수형을 당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임상옥의 죽마고우 이희저는 임상옥에 버금가는 부를 이루긴 했지만 혁명군 측에 가담하는 바람에 참수당하고 가솔들은 모두 관노가 되고 만다. 여기서 임상옥과 이희저의 인연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官妓 송이를 양민 만들려 소실로

그의 유복녀 송이가 임상옥이 군수로 첫 부임한 곽산군의 관기로 있으면서 임상옥의 눈에 띄게 되어 결국 임상옥은 송이를 양민의 신분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소실로 삼게 된다. 물론 명분은 그러했지만 남녀간의 만남이 그토록 간단한 것만은 아니어서 이 만남은 결국 두 사람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사랑의 상처’를 남기고 비련으로 끝을 보게되는데 비련에도 그 등급이 있다면 이들에게 닥친 비련의 상처는 결국 그들의 목숨까지 앗아가 버리는 최고의 비극미를 연출하고 만다. 옛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치열한 자세를 엿보게 해주는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다. 

송이가 친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서방님’이 된 임상옥과의 별리 장면은 아마 웬만큼 눈물샘이 강하지 못한 여성들이라면 그 애절함에 눈물을 참아내기 힘들 정도로 지극하다.

드라마 상도 스틸컷.


재산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구나

곽산 군수 시절 임상옥은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도자였다. 재력가이기도 한 그는 의주부 일대에 큰 수재가 나자 사재를 털어 수재민 구제에 앞장섰다. 이 공으로 이듬해인 1835년 귀성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논척을 받자 사퇴했고  사저를 크게 지었다는 이유로 잠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만년의 임상옥은 고향집에서 시를 지으며 소일하는 한편 자신에게 빚진 상인들을 모두 불러 일일이 빚을 탕감해주고 아울러 금덩어리까지 들려 보내는 파격적 조치를 행한다. 이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평생친구이자 집사인 박종일에게 임상옥은 이같은 문장을 적어 보이면서 자신의 소회를 밝힌다. 이 문장이야말로 임상옥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인 것 같다. 

1950년대 동대문 시장에서 상인들이 고무신을 파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임상옥의 상업철학과 사상을 집약한 것으로 재산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과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소중히 여기라는 깊은 뜻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재산의 사회환원! 2백년전 사람의 생각으로 선뜻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임상옥의 이같은 상업철학은 현대의 기업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그야말로 탁 트인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주는 것 같다.

적수공권에서 시작해 당대 최고의 부를 이룬 사람이 자손에게 부를 대물리지 않고 사회에 돌려준다는 얘기는 현대에도 들어보기 쉽지 않은 선각자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는 것 같다. 요즘 자식에게 재산을 변칙상속하는 일부 재벌들의 행태가 도마위에 올라 있는 세태를 감안해 보면 임상옥의 올곧은 상인정신, 그 누구도 선뜻 따라하기 어려운 재산에 대한 그의 순교자적 정신은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사뭇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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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왕 '임상옥'의 호연지기

2023.04.13. 15:4810 읽음

" 浩然之氣(호연지기)란? "

맹자를 보면 호연지기를 기르는 법이 나온다. 
이른바 삼물(三物)로서 억지로 마음을 바로잡으려 하지 말 것(勿正心), 억지로 기르려고 하지 말 것(勿助長), 그렇다고 잊고 있지도 말 것(勿忘)의 세 가지다.
요컨대 호연지기는 자연스레 길러야 한다는 뜻인데 멋이라고 무엇이 다르랴 싶다. 그만큼 멋이나 호연지기를 기르기 어렵다면 천성으로 타고 태어나는 사람의 행운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경제풍월 2001년 2월호에서 임상옥의 일대기를 읽고 더욱 그런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다.

1962년 9월 26일, 당시 박정희 의장이 강화도 인삼 재배 현장을 시찰중이다. (사진=국가기록원)


사창가에 팔려나가는 양가의 규수를 남의 돈으로 풀어주고 귀부인이 되게 한 아름다운 의협심이며, 허허실실의 병법을 원용한 대담한 승부수를 중국상인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인삼값을 몇 배나 받아낸 배포며, 은퇴 후 미련없이 재물을 살포해 버리는 청욕(淸慾)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멋있지 아니한 행동이 없었다.
그의 일생은 멋 그 자체이지만 그가 남긴 말 또한 멋있기는 마찬가지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상도 곧 인도에 다름 아님을 말해주는 명언이라면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며 했다는 다음의 말은 또 얼마나 멋있는가?

임상옥 캐리컬처



" 사람은 곧기가 저울대 같아야… "

財上平如水(재상평여수)
人中直似衡(인중직사형)

이는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곧기가 저울대 같다”는 뜻이라고 하나 정확한 국역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재물은 너무나 불공평하고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하다면 다음과 같이 고쳐야 마땅하리라.

“재물은 공평하기가 물과 같아야 하고 사람은 곧기가 저울대 같아야 한다”
이처럼 당위를 강조하는 해석이 임상옥의 취지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도 완벽한 해석은 아니다. 재상(財上)이라는 말은 “재물을 거래함에 있어서”의 뜻이고 인중(人中)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는”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의역함이 타당할 터이다.
“재물을 거래함에는(그 마음이) 공평하기가(허심탄회하기가) 물과 같아야 하고 사람을 대함에는(그 마음이) 곧기가 저울대 같아야 한다”

(일러스트=이톡뉴스)


여기서 우리는 정직이 어떠한 미덕을 지니는 것인가 인식할 필요성이 다분하다. 
곧은(直) 마음이 크다(悳)면 큰 마음인즉 호연지기인데 그건 맹자가 말한 정심(正心)임에랴.
이 호연지기의 큰 마음, 바른 마음은 나와 천지가 합일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만다. 그 아름다운 경지는 다음의 경구가 유감없이 표현해주고 있지 않은가 한다.

天地心間靜(천지심간정)
日月眼中明(일월안중명)

이는 “천지는 마음 속에 고요하고 일월은 눈 가운데에 밝다”는 뜻이다.
이러한 호연지기는 미셀 푸코도 비슷하다.
“인간의 두 눈은 해와 달에 의해 하늘 저편까지 미치는 거대한 밝음의 반영이다”


이 얼마나 눈부신 상상력의 우주적 투시인가?
필자는 아직 백두산 천지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들 경구야말로 천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싶다. 천지에서 우러드는 하늘과 굽어보는 땅은 마음 속에 얼마나 고요할 것이며 일월은 마음의 눈 속에 얼마쯤 밝을 것인가?
그 한없을 공명정대함, 그 경계 그 경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량함을 느낀다. 일생일대의 벅찬 순간이 되련만, 언제일 것인지….

" 통일도 곧 人道가 아닌가 "

주역에 택산함(澤山咸)괘가 있다.
이는 산 위에 못이 있는 괘로서 함(咸)은 감(感)과 뜻이 통한다. 즉 양(陽)을 뜻하는 간(艮)괘가 아래에 있고 음(陰)을 뜻하는 태(兌)괘가 위에 있어 음양이 감응해 만물이 생성하고 천하가 화평함을 형상한다. 환언하면 고귀한 남자가 겸손하게 낮은 신분의 처자를 떠받들어 서로 감응해 일심동체를 이룸을 뜻하는 괘인 것이다.

1972년 10월 25일, 평양 여인들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이 함괘가 오늘날 의미하는 바는 남남북녀의 결혼 즉 남북통일이 아닐까 한다. 그러자면 주도권을 쥐지 않을 수 없는 우리가 겸허한 태도로 북한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할 터이다. 
이러한 점에서 통일 또한 사람을 얻는 일이라면 통일의 길도 인도이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것이 사람의 일일진대 인도 아님이 무엇이겠는가?

돈보다 소중한 것은 오직 시간 뿐이다. 그 막중한 시간을 남을 위해 아낌없이 쓰는 자원봉사자가 북한 돕는데는 인색한 모습을 주위에서 보고 탄식을 금하지 못했었다.
정녕 우리는 임상옥의 마음을 본받을 수 없는 노릇일까?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랬는데 북한 돕기야말로 호연지기 중의 호연지기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 by 황인용 수필가 )


 

 

출처: [무역왕 '임상옥'의 호연지기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무역왕 '임상옥'의 호연지기

[BY 이코노미톡뉴스] " 浩然之氣(호연지기)란? " 맹자를 보면 호연지기를 기르는 법이 나온다. 이른바 삼물(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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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최인호 장편소설 '상도' 100만부 돌파

입력2001.06.05. 오후 6:38
 
최인호씨의 장편소설 ‘상도(商道)’가 출간 7개월여만에 판매량 100만부를 돌파했다. 5권으로 이뤄진 이 소설은 낱 권씩 계산해 총 100만부를 넘어선 것. 출판시장이 위축된 가운데서도 국내 소설이 이처럼 단시간에 밀리언셀러가 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

이 소설은 출간 직후 대형서점 베스트셀러에 진입, 줄곧 상위권을 지켜왔다. 1800년대 실존인물인 임상옥이란 상인을 주인공으로 상업의 정도(正道)를 보여준 것이 요즘 경제 불황과 맞물려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베스트셀러는 여성이 만든다’는 관례를 깨고 남성독자가 이 소설의 붐을 주도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 책을 펴낸 여백출판사는 “처음에는 30, 40대 직장인이 중심 독자층이었는데 두세달 만에 정,관계층으로 확대됐고, 올해초부터는 주부와 직장여성에게 전파되더니 최근에는 중고생으로 독자층이 넓어지고 있다”고전했다. 특히 올 봄부터 대기업들이 간부와 신입사원 교육용으로 이 소설을 대거 구매한 것도 판매량을 늘리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최인호씨 개인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펴낸 소설 20여편 중 이 소설이 첫 밀리언셀러다. 지금까지는 80만부가 팔린 ‘길 없는 길’(93년작)이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었고, 70년대 ‘경아 신드롬’을 일으켰던 ‘별들의 고향’도 60만부 남짓 팔렸을 뿐이다.

최씨는 또 최근 일본 도쿠마출판사(德間書店)와 ‘상도’를 내년 봄 일본에서 번역 출간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최씨의 작품이 일본에 소개되는 것은 1987년 ‘바보들의 행진’, 93년 ‘잃어버린 왕국’에 이어 세 번째.

한편 지난해 ‘허준’을 연출했던 이병훈 MBC 프로듀서가 올 9월 이 소설을 50부작 대하드라마로 제작한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인물네트워크]'상도' 작가 최인호와 CEO 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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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업데이트 2009년 9월 18일 13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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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인호씨(57)의 장편 ‘상도(商道)’가 최근 판매량 250만권을 넘어섰다. 쉬운 문체, 다채로운 인물, 극적인 전개, 휴머니즘 등이 크게 어필한 때문으로 보인다. 원작이 동명의 TV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는 데 따른 영향도 적지 않다.

‘상도’는 조선시대 거상(巨商) 임상옥의 드라마틱한 삶을 그렸다. 사실 최씨의 주위에는 최고경영자(CEO) 등 기업인이 적지 않다. 크게 성공한 이도 있고, 그늘 속에 있거나, 곡절 끝에 재기한 이들도 있다. 그는 가까운 곳에 이같은 이들이 있었던 게 ‘상도’의 집필 동기 중 하나였음을 인정했다.

최정호씨

우선 그의 형 최정호씨가 기업인이다. 젊은 시절 산업은행에 수석 입사했으며, 대우가 동유럽을 공략할 당시 폴란드 센트룸대우 사장 등으로 일선에 섰다. 대우 해체 후 실의의 세월을 보냈으나 최근에는 세계기업경영개발원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최정호씨는 문필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아우의 등단 작품에 ‘견습 환자’라는 제목을 붙여줬다. ‘별들의 고향’이라는 작명에도 조언했다. 소설 ‘겨울 나그네’의 제목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 제목은 ‘겨울 나그네’가 영화 드라마 뮤지컬로 성공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최인호씨는 “형이 가끔 ‘솔직히 말해 내가 문학적으로는 너보다 한 수 위지 않느냐’고 우기곤 하는데 그 때마다 이런 제목들 이야기를 꺼내 난감해진다”고 말했다.

정준명씨

최인호씨가 형만큼 깊은 교분을 나누는 CEO로는 정준명 삼성 일본 본사 사장이 있다. 두 사람은 서울고 동기다. 최씨는 정 사장이 “필력이 훌륭했고, 독서광이었다”고 말한다. 정 사장은 책이 드물던 시절 최씨와 함께 보들레르 릴케 하이네 바이런 롱펠로 등의 시집을 나눠 읽던 기억이 새롭다고 회고했다.

정 사장은 이병철 이건희 삼성 회장 부자(父子)를 각각 비서팀장으로 보좌한 유일한 기업인이다. 그에게 두 전·현 회장의 공통점에 대해 물어봤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거듭 하는 것, 담당자의 대답이 명료하게 이해될 때까지 심도를 높여 물어보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병철 전 회장은 특히 “신조류 신기술 신제품에 민감했던 분이었다”며 “이 같은 관심사를 충족하기 위해 일본 등지의 서점 전시장 학술회장을 찾거나 새로운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났다”고 회고했다. 비서실에서 정 사장이 자주했던 일들의 하나가 일본 전문서와 잡지 등의 내용을 육필로 요약하는 것이었다.

이수억씨

정 사장 만큼 최씨와 오래 알고 지내는 이로 아서앤더슨사의 이수억 대표가 있다. 최씨는 “신혼 시절 서울 서대문의 좁은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총각이었던 이 친구가 찾아와 와이프와 나 사이에서(?) 며칠씩 자고 갔던 기억이 난다”며 “요즘도 부부 동반으로 만나 가족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했다.

이수억 대표 가족과의 교분은 오랜 것이다. 최인호씨 형제는 어릴 적부터 이수성 전 총리, 이수인 전 국회의원(작고), 이수윤씨, 이수억 대표 형제와 잘 알고 지냈다. 형들끼리 서울고 동창이었던 데다, 최씨 형제의 부친인 최태원 변호사와 이씨 형제의 부친인 이충영 변호사가 서로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윤윤수씨

최인호·이수억씨 부부와 함께 ‘이름 없는 모임’을 만들어 ‘기분이 오를 때마다’ 만나는 이로 윤윤수 휠라코리아 사장 부부가 있다. 윤씨는 최씨와 서울고 동기다. 윤씨는 91년 휠라코리아 사장이 된 후 2000년까지 139억원의 연봉을 받았으며 이 중 62억원을 세금으로 낸 이다. 월급쟁이들에겐 ‘신화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윤 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자기 인생의 추진력을 ‘근성’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근성은 참을성과도 통하는 말인데, 죽기살기로 돈을 벌려고 하기 보다는 일 자체를 즐기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윤종용씨

최씨와 장년기에 새롭게 교분을 쌓은 CEO로는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있다. 두 사람은 10여년 전 문학평론가 이어령씨의 소개로 만났다. 최씨는 윤 부회장의 ‘메모광 습관’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듣고 본 것, 생각 난 것을 수첩에 철두철미 메모한다는 것이다.

최씨는 “‘잃어버린 화면 1인치를 고객에게 되찾아준다’는 삼성전자 TV 광고의 유명한 카피는 윤 부회장의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윤 부회장이 엔지니어 출신이면서도 문화적 관심이 커 신선한 아이디어가 많다”는 것. 윤 부회장은 화가 반 고흐 등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추고 있다.

김우중씨

최씨를 가까이 해온 재계 인사 가운데는 김우중 전 대우 회장도 있다. 최씨는 “대우의 오늘과는 별개로, 김 회장은 참 신들린 듯 일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 회장이 소설 ‘잃어버린 왕국’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데 물심양면 지원해준 기억이 난다”며 “김 회장이 몇달만 더 앞당겨 구조조정을 택했더라면…” 하고 말끝을 흐렸다.

최씨는 “조직의 최상층에 있던 김 회장은 ‘자유인 최인호’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며 “하지만 나는 그의 열정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는 “김 회장이 먼 곳에서 ‘상도’를 잘 읽었다”는 말을 전해왔다”며 “그 밖의 근황은 들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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