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2월 불교신문에 2회에 걸쳐 연재한 최응천 교수의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기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③ 성덕대왕신종 (上)
-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 승인 2017.02.22 11:29
세속의 번뇌망상 잊게 해주는 천상의 소리
우리나라 범종 중 가장 긴 여운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
예로부터 에밀레종 별칭 ‘유명’
성덕대왕 왕생극락 ‘염원’ 담아
지금도 타종 가능한 신라 범종
8세기 통일신라 불교 조각 반영
①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진수를 간직한 성덕대왕 신종.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의 범종은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 긴 여운을 특징으로 한다. 마치 맥박이 뛰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러한 범종의 긴 공명을 우리는 맥놀이 현상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맑고 웅장한 소리를 지니고 있어 누구라도 이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 주는 오묘한 천상의 소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성덕대왕 신종이 지니는 공명대가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처럼 소리와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상원사 종보다 약 반세기 뒤인 771년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현재까지 유일하게 손상 없이 그 형태를 유지해 온 아직까지 타종이 가능한 신라 종이기도 하다.
원래의 종이 있던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경주 북천(北川) 남쪽의 남천리에 있던 성덕왕의 원찰(願刹)이었다. 성덕왕이 증조부인 무열왕(武烈王)을 위해 창건하려다 아들인 효성왕(孝成王)에 의해 738년에 완공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景德王)이 이 절에 달고자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혜공왕대(慧恭王代)인 대력(大曆) 6년(771)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러운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있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된 이후 여러 번에 걸쳐 그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권 2에는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 5년(1460)에 영묘사(靈廟寺)로 종을 옮겨 달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후 중종 원년(1506)에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이 경주 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아 군인을 징발할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慶州古蹟保存會)가 경주 부윤의 동헌(東軒)을 수리하면서 동부동 옛 박물관 자리에 진열관을 열게 되었고 이때 첫 사업으로 봉황대 아래에 있었던 성덕대왕 신종도 옮겨 가게 되었다. <고적도보해설집(古蹟圖報解說集)>에는 이 때를 1916년이라 하였으나 국립박물관의 유물대장에 의하면 1915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1915년 8월에 동부동 옛 박물관으로 옮겨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오랜 기간 구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75년 5월27일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②성덕대왕신종 용뉴.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신종의 세부 형태를 살펴보면 몸체의 상부 용뉴(龍)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목 뒤로는 굵은 음통(音筒)이 부착되어 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따르고 있다. 앞, 뒤의 발을 서로 반대로 뻗어 힘차게 천판을 딛고 있는 용의 얼굴은 앞 입술이 앞으로 들려 있으며 부릅뜬 눈과 날카로운 이빨, 정교한 비늘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역동감이 넘친다.
머리 위로는 상원사종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뿔이 솟아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이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용의 목 뒤에 붙은 굵은 음통에는 대나무처럼 중간에 띠를 둘러 4단의 마디로 나누었는데, 각 단에는 연판 중앙에 있는 꽃문양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붙은 앙복련의 연판을 동일하게 부조하였다. 그리고 음통의 하단과 용뉴의 양 다리 주위에는 음통의 연판과 동일한 형식의 연꽃 문양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처럼 잘 보이지 않는 종의 천판 부분에까지 섬세하게 문양을 새기고 있는 것은 이 종이 세부까지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 제작하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천판의 용뉴 주위를 둥글게 돌아가며 주물의 접합선을 볼 수 있으며 여러 군데에 쇳물을 주입하였던 주입구의 흔적도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종의 몸체 중앙부를 돌아가며 희미하게 주물선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성덕대왕 신종이 용뉴 부분의 천판까지를 한틀, 그리고 워낙 종이 크다보니 하나의 틀로 몸체 전체를 제작하기 어려워 몸체를 반으로 나누어 접합한 뒤 주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흔적이 남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범종은 중국 종이나 일본 종과 달리 섬세한 용뉴 조각과 문양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사형주물법이 아니 밀랍주조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에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거대한 종을 만들면서 동원된 밀납의 양은 엄청났을 것이어서 이 종이 당시로서도 국가적인 사업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 작품이란 것을 잘 말해준다.
종의 몸체 상대(上帶)에는 아래 단에만 연주문이 장식되었고 대 안으로 넓은 잎의 모란당초문을 매우 유려하게 부조하였다. 상대에 붙은 연곽대(蓮廓帶)에도 역시 동일한 모란당초문을 새겼다.
한편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蓮)는 상원사종(725)과 같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연밥(蓮顆)이 장식된 둥근 자방(子房) 밖으로 이중으로 된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 독특하다. 대부분의 신라 종이 돌출된 모습의 연뢰를 지닌 점과 달리 이러한 납작한 모습으로 장식된 종은 이후 8세기 후반의 일본 운주우지(雲樹寺) 종이나 일본 죠구진자(尙宮神社) 소장 연지사(蓮池寺) 종(833)에도 계승을 이루며 나타난다. 성덕대왕 신종은 이 뿐만 아니라 주악천인상과 종구(鐘口)의 모습 등이 다른 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즉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柄香爐)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비천상 대신 공양자상을 새겼다고 볼 수 있다.
③성덕대왕신종 음통.
공양자상은 연꽃으로 된 방석 위에 두 무릎을 꿇은(座) 자세로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두 손으로 가슴 앞에서 향로의 손잡이를 받쳐 든 모습이다. 머리카락(寶髮)은 위로 묶은 듯 하며 벗은 상체의 겨드랑이 사이로 천의가 휘감겨져 있고 배 앞으로 군의(裙衣)의 매듭이 보인다. 연화좌의 방석 아래로 이어진 모란당초문은 공양자상의 하단과 후면을 감싸며 구름무늬처럼 흩날리며 장식되었고 머리 위로는 여러 단의 천의 자락과 두 줄의 영락이 비스듬히 솟구쳐 하늘로 뻗어 있다. 공양자상이 들고 있는 향로는 받침 부분을 연판으로 만들고 잘록한 기둥 옆으로는 긴 손잡이가 뻗어있으며 이 기둥 위로 활짝 핀 연꽃 모습의 몸체로 구성된 모습이다.
최근 마모된 공양자상과 병향로의 모습을 복원해 본 결과 비슷한 시기의 중국 석굴이나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향로와 향합(香盒)을 양손에 각각 나누어 들고 있다는 점이 새롭게 확인되어 근래 제작된 신라대종에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였다. 성덕대왕 신종의 공양자상은 비록 얼굴 모습이 많이 마모되어 세부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세련된 자세와 유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천의, 모란당초문의 표현은 통일신라 8세기 전성기 불교 조각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범종 부조상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꼽힌다.
[불교신문3276호/2016년2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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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④ 성덕대왕신종 (下)
-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 승인 2017.03.10 17:01
지옥서 고통받는 중생 제도하겠다는 자비심 상징
신라 사회의 정치와 사회
교리 아는 중요한 금석문
어린아이 인신공양 설화
종교폄훼 의도 가진 낭설
①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과 종각.
성덕대왕신종의 공양자상은 그 배치에 있어서도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종신의 앞, 뒷면에 새겨진 양각 명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로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으로 4구의 공양자상을 배치하고 있는 점도 이 종의 중심이 다른 종과 달리 기록된 명문임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종구 부분을 8번의 유연한 굴곡(八稜形)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도 다른 종에서 볼 수 없는 양식적 특징이다.
이에 따라 그 위에 장식되는 하대 부분도 8릉의 굴곡을 이루게 되고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당좌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겼으며 그 사이를 유려한 모습의 굴곡진 연화 당초문으로 연결시켜 한층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당좌는 그 주위를 원형 테두리 없이 8엽으로 구성된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는데, 타종으로 인해 문양이 많이 마모되었다.
②성덕대왕신종 명문과 공양좌상 배치.
종신 앞, 뒷면의 가장 중심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하여 ‘서(序)’와 ‘명(銘)’을 배치하였는데 1000여자에 이르는 장문으로 당시 신라 사회의 정치 상황. 불교 교리 및 사회 제반 사항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기도 하다.
서문의 내용은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단락은 신종을 높이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는 내용으로서 종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불교의 내용을 들어 역설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음(圓音)이란 바로 부처의 설법을 원음(圓音), 일음(一音), 다음(多音) 등으로 구별해서 보는 것이다. 이 가운데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는 일승(一乘)을 설하실 때의 설법음을 바로 원음(圓音)이라 한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이 내용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회통(會通)하는 부처의 설법을 신종의 소리를 통해 깨닫게 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점에서 자못 의미 깊다.
둘째 단락은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러한 공덕을 종에 담아서 그 공덕을 영원히 기릴 뿐만 아니라, 종소리와 더불어 나라가 평안하고 민중들이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발원을 담았다.
셋째 단락은 그러한 국가적인 큰 주조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성덕왕 아들인 경덕왕의 효성과 덕을 찬양한 부분이다. 넷째 단락은 결국 종의 주조를 다 마치지 못하고 경덕왕이 돌아가자 그 아들인 혜공왕이 이 사업을 이어서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효성과 덕망의 소치라고 찬양한 부분이다.
다섯째 단락은 종이 완성되자 이에 대한 감격과 신비로움, 그리고 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서술하여 ‘모양을 보는 자는 모두 신기하다 칭찬하고 소리를 듣는 이는 복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마지막 단락이야말로 극락세계는 물론이고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신종을 치고자 한 가장 궁극적인 조성 목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대쪽의 명은 서문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여 4자구(四字句)로 시적(詩的)인 맛을 살려 찬양과 발원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당시에 이 글을 지은 사람은 한림랑(翰林朗) 급찬이었던 김필오(金弼奧)이며 종 제작에 참여한 많은 인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인 대나마(大奈麻) 박종익(朴從鎰)과 차박사(次博士) 박빈나, 박한미, 박부악(朴賓奈, 朴韓味, 朴負岳) 등이다. 여기에 기록된 고위 관직의 인물들은 당시에 이 종이 국가적인 대역사로 이루어진 점을 잘 말해준다. 여기에 당시로서도 엄청난 양에 해당되는 구리 12만근이 소요된 점을 밝히고 있는데, 실제 달아본 종의 무게만도 18.9톤에 달했다.
한편 이 종에 얽힌 에밀레종의 설화는 종을 만들 때 시주를 모으는 일반적인 모연(募緣) 설화와 달리 인신공양(人身供養)의 내용인 점에 주목된다.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함으로써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다는 다소 애절하기까지 한 설화의 내면에는 성덕대왕 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은유적으로 대변해 준다.
그러나 실제로 범종을 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는 자비심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공양하였다는 내용 자체가 조성 목적에 전혀 맞지 않아 더욱 의구심이 든다. 더욱이 성덕대왕 신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상원사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었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황, 철, 니켈 등이 함유되어 있었지만.
결국 세간에 떠도는 바와 같은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인체의 성분이 70%이상 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조 당시에 사람을 공양하여 쇳물에 넣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종이 깨져 완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종의 유아희생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전설이 언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도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범종의 최대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그것이 비록 전설이나 설화이던 간에 어디에서라도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한다. 아마도 조선 후기쯤 유림의 세력이 드높았던 경주 지역에서 불교의 인신공양을 범종에 결부시켜 종교적 폄훼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분명한 것은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이 종의 이름을 명문 첫머리에 두어 일반적인 종과 달리 그야말로 가장 신성스런 종이란 점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록된 명문에서 보이듯 일승의 원만한 소리인 부처의 말씀과 같은 종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범종의 참 뜻을 성덕대왕 신종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어엿한 본명 대신 전혀 근거도 없고 왜곡된 별칭인 에밀레종으로 부르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범종은 비록 혜공왕대인 771년에 완성되었지만 통일신라 불교미술에서 최고의 황금기를 구현하였던 8세기 경덕왕대(景德王代, 742 ˜765)에 제작되기 시작한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었던 당대 최고의 과학, 건축, 조각술이 주조기술과 합쳐져 총체적인 완성을 이루게 된 것이 바로 성덕대왕 신종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975년 인왕동 박물관으로 종을 옮겨 달 때 옛 철고리를 다시 바꿔 달려고 당시 가장 유명한 포항제철에 의뢰해 고리를 특별히 주문 제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종을 직접 달기 전 실험을 해본 결과 고리의 직경이 중량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원래의 고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는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금속 주조 기술을 지니고 있었는지 여실히 증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높이 3.66m, 구경이 2.27m에 이르는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이면서 신비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함께 간직한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품이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종임에 분명하다.
여음(餘音) 성덕대왕 신종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근거도 없는 제야의 종이란 명목으로 반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타종되었다. 함께 치기 시작한 보신각종은 결국 균열이 생겨 새로운 복제 종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성덕대왕 신종 역시 제아무리 통일신라의 완벽한 주조기술로 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 수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종을 중단한 것인데, 아직도 성덕대왕 신종의 타종을 주장하는 의견이 많다. 다행히 2016년 11월 경주시에서 성덕대왕 신종을 완벽히 재현한 신라 대종을 주조하여 타종하기 시작하였다. 천만 다행한 일로서 이 종을 주조한 성종사 및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
[불교신문3280호/2017년3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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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793
<한국의 문화유산-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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